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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더 좋은 세상 고민하다 택한 ‘사회적경제’

사회적기업이 세상을 바꾼다 - (8) 사단법인 일하는사람들

사회적기업이 세상을 바꾼다 - (8) 미생물비료가 서민은행을 만든다? 사단법인 일하는사람들

                               

최근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사회적경제’가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는 <제주사회적경제네트워크>와 함께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한 사회적경제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풀어서 제공하는 동시에, 매주 사회적경제를 구성하는 사회적기업-마을기업-자활기업-협동조합을 차례로 탐방할 계획이다. 특히 이들이 우리의 삶과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고, 우리와 직접 연관된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도 유의미한 기회가 될 것이다.

 

▲ 일하는사람들 김경환 대표는 20년 넘게 자활-복지-지역운동 분야에서 일하며 전문성을 쌓았다. 그리고 2009년부터는 서귀포에 사회적경제의 뿌리를 내리려 노력 중이다. ⓒ제주의소리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이 고민은 과거 수많은 사람들을 학생운동에,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하고, NGO들을 탄생시켰다. 이들은 더 좋은 사회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지역, 연대, 진심, 사회적경제와 같은 생각에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결국 30대가 되고 가정이 생기면 결국 먹고살기에 바쁘다”는 냉소처럼 이 길은 한 사람의 평생을 건 싸움이다. 느리고 긴 실험이기에, 당장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기에 실제로 많은 이들은 어느 시기에 큰 벽을 만난다.  

이 지점에서 사회적기업가들이나 협동조합 모델을 도입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들은 이런 세상의 장벽을 뛰어넘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자활, 빈민구제 운동에서 시작해 사회적경제에 이르기까지 20년 넘게 지역운동을 하고 있는 ‘사단법인 일하는사람들’의 대표 김경환(49)씨도 그 중 한 명이다.    

그가 대표로 있는 사회적기업 ‘일하는사람들’은 2009년 말 빈민층이나 취업취약계층의 자립을 돕는 사회복지시설인 자활공동체 7곳이 모여 구성된 곳이다. 저소득층, 노인, 경력단절 여성 등 일반 취업시장에서 선택받기 힘든 이들을 직원으로 뽑는다.

과거 서울 관악에서 다양한 지역운동을 펼치던 그는, 2001년 불쑥 제주로 내려와 자활센터에서 근무했다. 경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도의회에서 복지분야 자문위원으로 일하다가 ‘제대로 된 사회적경제 실천모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사회적기업 일하는사람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1년 만에 매출 8억 원을 넘길만큼 큰 수확을 거뒀다. 하지만 더 큰 수확은 그가 20년간 고민했던 사회적경제의 모델을 현실로 옮기고 있다는 데 있다. 

더 좋은 세상 고민하다 내린 답이 ‘사회적경제’

 

▲ 일하는사람들의 직원들 모습. 이 곳에서 일하면 갑작스럽게 퇴직을 해서 일을 못하게 될 때 도움을 주는 안정기금, 공무원카드 처럼 제공하는 복지포인트, 자녀 학자금 무이자 대출까지 혜택을 받는다. 놀랍게도 다 잘 돌아가고 자리를 잡았단다. ⓒ제주의소리

- 이 기업을 먹여살리는 히트상품이 바로 양식장 폐사어를 이용한 천연 액상 비료라면서요? 언론에도 자주 오르내리더군요.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진 겁니까?

“현재 제주도의 양식장이 400개가 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상품화가 안 되는 광어가 연간 7000톤입니다. 그게 뭐 먹으면 안되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 비실비실한 광어가 계속 양식장에 놔둘 경우 병을 옮길 수도 있으니까 건져내는 거죠. 그걸 유통할 수도 없고. 그래서 2010년 양식수협하고 협약을 맺어서 매일 아침에 수조에서 건져낸 것을 수거해왔어요.

그거를 바로 우리가 공장에서 그 갈아서 천연 미생물 비료로 발효시켜서 제품을 만들었어요. 농가에서 자체적으로 이렇게 만드는 곳들이 있긴 있어요. 효과가 좋은 걸 아니까. 근데 만들어 쓰기 번거롭고 냄새가 심한 단점이 있죠. 그래서 당시 우리가 가진 유일한 자본인 공장부지에다 조금씩 조금씩 도움을 받고 돈을 모으고 지원을 받아 공장을 만든거죠. 그렇게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이제 언론에도 알려지게 됐죠”

- 당시 시작할 때 자본은 그렇게 아름아름 모았다 하더라도...기술적인 부분은 어떻게 해결했나요?

“주먹구구에서 체계화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죠. 제주농업기술원에서 친환경과의 김유경 박사가 정말 많은 자문을 해줬어요. 큰 도움이 됐죠. 그 다음에 유기농 보급을 위해 애쓰는 서귀포EM센터에서도 사무국장을 우리 조직에 스카웃했어요”

- 김 대표하면 박원순 시장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데 지난 2011년 박 시장이 ‘박원순의 희망열차’란 제목으로 제주도 내 사회적기업을 연달아 방문했을 때 김경환 대표를 만나 ‘제주 오니까 신수가 훤해졌네’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눈 게 화제였어요. 두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거죠?

“1993년 당시 박원순 변호사사무실에서 인권 간사로 처음 일했습니다. 당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사무국장 간사가 우리 선배였는데... 그 때 제가 아마 놀고 있었나?(웃음) 그 때 선배가 소개해줘서 일하게 된 거죠.

그러던 중 박 변호사가 하다가 ‘뭘 하나 해보자’ 해서 만든 곳이 참여연대였구요. 거기서도 한 1년 반 정도 같이 일했습니다. 그 당시 일한 곳이 내부고발자 지원센터라고 양심선언자들을 지켜주는 행정감시센터였습니다. 1년 7, 8개월 정도 일하다가 저는 서울 관악구 지역 빈민자활활동에 들어가게 된 거죠. 사는 데도 관악구였구요”

- 서울에서도 계속 비슷한 맥락의 일을 해오신거네요? 관악에서 또 어떤 일을 하셨죠?

“관악주민연대, 사단법인 관악사회복지센터... 이 때 시작된 것이 지금 복지센터까지 이어지는 거다. 한 번 해보자 해서...뭐 관악을 지역운동의 메카라고 하기도 하잖아요”

- 당시 지역사회가 좀 변한 건 느꼈나요?

“사실 뭐 제가 한 활동이 변화시켰다 그렇게 말하기는 곤란하고...어쨌든 자활센터 같은 경우는 시범사업으로서 모델이 됐죠. 거기서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1995년도 12월에는 자활센터라는 개념을 전국에서 처음 만들기도 했어요”

- 그럼 박원순 변호사를 만나기 전 1993년 이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하네요.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 이런 의식이 대학 시절에도 있던건가요?

“우리 대학 다닐때야 다 운동권이죠(웃음) 사실 그런 나름대로 그런 가치.. 일관되게 미는 거죠 사실은. 84학번인데 당시 졸업 후 바로 처음 노동운동을 생각하다가... 92년도에 졸업을 했는데 졸업 마을버스 운전 하다가 지역에서 이런 지역운동을 처음 했죠. 이것저것 해보니 이제 뭔가를 할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 같더라구요”

- 그 이후로 20년 넘게 시민운동에 지역운동,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이한 도전까지...한 건데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건가요?

“(웃음)에... 타협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여러 가지 경험들을 해 본 것 같아요”

- 2001년에 제주도 내려온 것도 신기하네요. 가족들이 다 함께 서울 관악에서 제주도로 내려왔다는데 무슨 계기가 있었나요?

“앞으로는 지방화시대다. 이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우리 선배들도 50대 넘어가면 다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또 계속 이어서 활동들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뭐 나이 들어서 갈 필요가 있나. 갑자기 그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부모님과 와이프와 아이 둘을 데리고 제주로 내려왔습니다. 마침 아내 고향이 제주 성산이기도 했구요”

- 아까 ‘현실과의 타협’ 얘기를 질문 드리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가시밭길 아닌가요?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 돼서 살 수 도 있었을텐데...

“저는 꿈이 있어요. 사실 우리 기업이 협동조합보다 더 강화된 틀의 민주성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출자를 아예 하지도 않았고 배당도 없고 총회를 계속해서 의사 결정을 하고...명함에도 ‘사회적경제 공동체’라고 쓰고 다녀요. 이 이유는 100년 가는 사회적경제 공동체를 만들고 싶습니다. 지금 제조판매, 청소, 수리 사업 이외에도 지역사회공헌사업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당장 몬드라곤과 볼로냐가 될 수 없을지라도...

 

▲ 3년 동안 도의회 자문위원으로 일하면서 느낀 점도 많았다. "복지정책과 예산은 분명 많은데 왜 제대로 안 돌아갈까? 사람들은 왜 모를까?" 그는 칸막이식 행정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그림을 잘 파악해 정말 필요한 정책만 남기고, 그것을 확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제주의소리

- 일하는 사람들의 지역공헌사업.. 이게 사회적기업이라는 특성에 가장 알맞은 것 같군요. 어떤 게 있죠?
 
“서귀포사회적경제복지센터를 설립했고 이제 운영할 계획이에요. 음 가령 실질적으로 복지서비스는 정말 많이 제공되고 있지만 일반인들 체감도가 낮은 이유는 자기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업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도의회 자문의원을 했을 때 의회에서 놀랐죠. 이렇게 많은 복지사업들이 있는데 왜 사람들은 모르는지...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복지정보를 제공하고, 상담을 하고, 자원 연계를 시켜주는 사업을 하는 센터입니다. 종합정보센터죠

또 소통공간이자 문화공간이에요. 차 한 잔 마시면서 대화를 나눌 이런 공간이 없죠. 남자는 다 술이나 마시려고 하고 여성들은 어쨌든 집에 가서 뒷바라지 하는 게 태반입니다. 여유가 없죠. 그래서 이 센터를 종합문화공간처럼 만드려고 해요”

- 이미 시행해 온 것들 중 좀 놀라운 게 있네요. 일하는사람들이 사업으로 번 돈으로 저소득층 신용대출사업을 한다면서요?

“네. 혼올렛 마이크로크레딧이라고 해서 2011년 1월에 설립됐죠. 종자돈 2000만원을 후원출자하고, 조합원들이 기금모금 바자회로 1000여만원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됐죠. 말 그대로 돈 없고 막막한 저소득층 대상으로 이자율 3%로 대출해주는 겁니다”

- 음... 그런데 그게 잘 돌아가긴 돌아가나요?

“잘 돌아가니까 여기서 말하죠.(웃음) 얼마전 총회 때는 자산이 7600만원으로 불어났어요. 50만원, 100만원씩을 한도로 해서 빌려줬죠. 금융사고도 하나도 없었어요.

사실 병원비가 없고 얘가 없고 금융기관 가도 쉽지 않지, 지인 돈 빌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총회에서 이 사연을 말하자 다들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우리 사례를 보고 이어도자활센터에서도 이와 같은 사업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 이것도 아까 말한 ‘100년 가는 사회적경제’를 위한 건가요?

“그렇죠. 앞으로는 의료생협도 할 계획이고 마지막으로 주택협동조합도 하려고 합니다. 우리 회원, 조합원들이 지역사회에 필요한 일들을 끄집어내고 협동조합 방식으로 이끌어내겠다 이거죠. 몬드라곤이 그렇게 해서 컸죠”

- 그럼 서귀포를 사회적경제의 중심지 몬드라곤이나 협동조합의 도시 볼로냐처럼 만드시려는 건가요?

“그렇게 까지는 아니지만...(웃음) 그런 생각을 종종 하죠. 그런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일하는사람들도 사업이 자리잡아주면... 물론 그렇게 돈이 필요한 부분도 있고, 사실 끊임없이 조합원들 모으고 공부하고 마음을 모으는 게 제일 중요한거죠. 여기다 사회적자본, 제도 등 백그라운드 돼있으면 훨씬 탄력을 받는거죠”

-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게 누군가 이익을 독점하거나 배당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봐야할까요?

“그렇죠. 돈 벌어서 ‘인 마이 포켓’도 아니고. 우리가 번 건 지역사회에 환원시켜나가고. 머지 않아 그렇게 자리잡을 거라 봅니다”

<제주의소리>

<문준영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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