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의 도백열전(16)] 제7대 제주도지사 길성운①

제주도 총무국장에서 제7대 제주도지사로 발탁된 길성운(吉聖運. 41)은 1953년 11월23일부터 1959년 5월12일까지 5년6개월간 역대 지사 가운데 최장기 재임하면서 제주대학 4년제 승격, 제주시 승격, 서귀읍·대정읍·한림읍 승격, 국립 송당(松堂)목장 설치 등의 많은 치적을 남겼다.

 

전임 최승만 지사와의 개인적인 특별한 인연으로 외자관리청 근무 중에 제주도총무국장으로 전격 기용됐던 길 지사는 전임 최 지사에게는 그림자와 같은 핵심참모이자 도정의 동반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 지사가 가는 곳에는 항상 길 국장이 있을 정도였다.

 

전임 최 지사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지사로 임명된 그는 평안북도 출신으로서 1938년 일본대학 법문학부 문학과를 졸업한 후 만주에 있는 安東신흥상업학교 교사로 있을 때인 1945년 7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 수감됐다가 해방과 함께 석방되고 문교부 인사과장을 지냈다. 1948년 임시 외자청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서무과장, 총무과장, 감사과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길 시자는 도정 방침을  「애국애족· 공비완멸· 교육진흥· 농촌진흥· 산업개발」등에 두었다. 그러나 길 지사가 부임과 동시에 풀어나가야 할 과제는 전임 최승만 지사 때에 추진됐던 제주대학의 4년제 승격과 제주읍의 시(市) 승격을 비롯해서 공석으로 있는 후임 총무국장의 임명이었다.

 

길 지사는 취임하자마자 5대 자원 개발론을 주장했다. 즉 수산자원개발, 특용작물개발, 축산자원연구, 공원자원연구, 학술자원연구 등으로서 제주도를 잘 사는 「소망의 나라」로 가꿔 나가기 위해서는 5대 자원 개발을 연구, 개발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변의 압력 물리치고 제주출신으로 총무국장 내부 발탁

 

길 지사는 우선 자신과 도정을 함께 수행해나갈 총무국장 인선에 착수했다. 길 지사는 자신이 이북출신인 만큼 총무국장은 반드시 제주 출신이어야 하며 도의회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총무국장 인선은 쉽지 않았다. 길 지사는 총무국장 인선 때문에 외부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았다. 심지어 도의회의 모 의원은 길 지사가 총무국장시절에 그의 파면결의를 뒤에서 사주했던 사람을 추천하는가 하면 피난민협회에서는 육지사람인 길 지사 혼자 도정 수행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피난민을 추천했다. 어떤 사람은 치안국장을 통해 인사청탁을 해왔고 길 지사가 부임인사차 상경중일 때에는 서울 집으로까지 찾아와 인사를 부탁하기도 했다.

 

길 지사는 외부인사의 영입을 일절 배제한 채 공무원들의 인사숨통도 터주고 지역출신을 우대한다는 의미에서 제주출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결국 총무국장의 인사는 길 지사가 취임한 지 한 달이 훨씬 지난, 이듬해인 1954년 1월7일에 단행됐다.

 

총무국장에는 이홍림(李洪琳) 산업국장이 기용됐고 산업국장에는 양남전 지방과장이 승진 발령됐다. 또 지방과장에는 김익중 학무과장, 북제주군수에는 김왕진 서무과장, 서무과장에는 부항석 前 북제주군수, 학무과장에는 송정호 장학관, 사회과장에는 안경규 내무부조사계장이 각각 임명됐다.

 

도청 간부에 대한 인사 작업이 마무리되자 길 지사는 제주읍에 대한 시(市)승격과 제주대학 4년제 승격 문제에 매달렸다.

 

제주대학은 그때까지도 제주농업학교 운동장 한구석을 빌려 나무판자로 임시 건물을 지어 루핑지붕과 흙 바닥에서 수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빈약한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4년제 대학승격에 대한 도민들의 열망을 대단했다.

 

1954년 시무식을 마친 직후인 1월5일 오후2시 제주대학후원재단이사회를 소집하고 제주대학 건물신축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최승만 전 지사가 맡고 있었던 후임 이사장으로 선임된 길 지사는 건물신축에는 엄청난 사업비가 소요될 것으로 보고 제주읍내에 있는 건물인 인수하기로 했다.

 

그때 제주에는 6.25 사변으로 경인(京仁)지구에서 옮겨온 공장 등이 ECA자금으로 가동 중이거나 조업을 중단하고 있는 건물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대학건물로 개축해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 제주비행장과 한국피혁공장, 조일(朝日)고무공장, 세계고무공장 등이 있었다.

 

 길 지사는 4개의 건물을 모두 돌아보고 난 후 한국피혁공장이 대학건물로 쓰기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ECA대충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식산은행 제주지점장을 통해 매수문제를 은밀히 추진했다. 식산은행은 마침 공장을 처분해서 서울로 철수하려던 때여서 길 지사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여 550만환에 매각하기로 했다.

 

4년제 대학 승격을 위한 첫 삽…자체 건물 마련 방안 추진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한국피혁측이 식산은행에 지고 있는 부채 200만환을 즉시 현금으로 갚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길 지사는 그해 2월21일 제주대승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간의 경위를 설명했다. 위원들은 길 지사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부지매입교섭위원으로서 이윤희, 양홍기, 김석호 등을 선출했다. 제주대 승격에는 도의회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집행기관과 의결기관이 한 뜻으로 뭉쳐졌다. 도의원들은 대표를 서울로 보내 문교부와 협의한 결과 3월25일에 이근칠(李根七) 대학교육과장을 보내 후보지를 살펴보겠다는 대답을 얻어냈다.

길 지사는 제주초급대학 졸업식 직후 전인홍 도의회의장, 이윤희 대학후원회장, 김석호 제주신보사장, 홍완표 미국공보원장과 더불어 문교부 이근칠 과장과 함께 후보지 4곳을 돌아봤다. 이 과장은 “4년제 대학 승격에는 건물과 부지확보도 선결과제 이겠으나 교수진의 확보도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이다”고 말함으로써 4년제 승격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시사했다.

 

  길 지사는 우선 건물을 확보하는 문제부터 추진하기로 했다. 식산은행이 한국피혁공장의 매각을 제주도에 약속함에 따라 밝은 전망을 주고는 있으나 예산확보가 문제였다.

길 지사는 한국피혁이 식산은행측에서 즉시 현금으로 갚아야 할 부채 200만환의 상환을 위해 도의회와 협의한 끝에 도민 기부금을 모금하기로 하고 대학승격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받게 될 제주읍에서는 150만환, 그밖의 지역에서는 100만환을 모금하기로 했다.

 

  길 지사는 모금운동에 모든 공무원의 동참을 촉구했다. 그러나 모금은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 더구나 제주읍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모두 기한 내에 전액을 모금하는 열의를 보였으나 정작 제주읍에서는 목표액에 훨씬 못 미친 90만환만이 모아졌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제주읍이 목표액을 채울 때까지 모금액을 납부하지 않겠다고 입장을 밝혀 길 지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길 지사는 제주읍장을 불러 야단을 쳤다. 결국 목표액에서 58만환이 부족한 98만환이 모아졌다.

 

돈이 어느 정도 모금되자 이번에는 계약담보물이 문제가 됐다. 식산은행은 제주도가 공장을 인수하게 되면 학교재단의 소유가 되므로 무슨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식산은행만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담보물이 제공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길 지사는 대학후원회와 학부형회, 지역유지들을 모아 추진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당부했다.

 

길 지사는 “현재의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학부형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 부동산을 담보물로 제공하는 방법 밖에 없는 것 같다”면서 승낙을 받아냈다.

 

대학 건물 인수를 위한 계약담보물 제공에 학부모들도 동참

 

그러나 막상 공무원들이 담보제공을 위해 방문하면 대부분이 개인사정을 들어 곤란하다거나 담보설정에 어려운 낡은 집을 내놓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도 안되겠다 싶은 길 지사는 다시 식산은행 지점장을 찾았다. 은행측은 담보설정이 곤란하다면 본점에 올라가서 도지사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각서를 제출하는 방안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려웠던 담보문제도 이렇게 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54년 10월1일 한국피혁 4251평이 인수됐다. 길 지사는 본관 건물을 전면 개축하기로 하고 공개 입찰에 붙였다. 제주도내 5개 업체가 응찰한 결과 그 중에서 동방공영에 낙찰됐다. 최저 응찰자 대신에 내정가격에 가장 가까운 응찰자에게 공사가 맡겨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되어 도의회로까지 비화됐다. 도의원 5명과 함께 길 지사를 방문한 전인홍 의장은 “이번 제주대학의 본관 신축공사 입찰은 최저응찰자에게 낙찰한다는 道조례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즉시 취소하고 다시 입찰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길 지사는 “지난번에 실시한 교실개축공사 때에 최저가격 응찰자에게 공사를 맡겼더니 부실공사가 발생하여 이번에는 백년대계의 입장에서 내정가격에 가장 가까운 업체에 공사를 맡긴 것이다”고 양해를 구했다. 길 지사는 또 “공사입찰은 제주도의 소관이나 제주대학이 도립이기 때문에 도민들은 물론 도의회에서 적극 협조해달라”고 당부하고 나서 “만약 이번 입찰에 문제가 있다면 제 자신도 학장직을 그만둘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동문매일 시장 화재…486세대, 2604명의 이재민 발생

 

  대학승격을 위해 모든 도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을 때였던 1954년 3월13일 제주읍내 동문매일시장에 큰 불이 일어났다.

 

 불은 이날 오후5시45분 시장에 왔던 한 주민이 라이터에 휘발유를 넣고 시험하던 중에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새벽까지 계속된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가옥 77채를 전소시켰는가 하면 16채가 절반 가까이 탔고, 2명이 숨졌으며 부상자가 속출했다. 화재는 486세대에 2604명의 이재민을 냈다.

 

  마침 제주대학의 4년제 승격과 제주읍의 시승격문제로 상경 중이었던 길 지사는 도청으로부터 급보를 들은 즉시 다음날 귀임하자마자 구호본부를 설치하고 대책마련에 나섰다. 동문매일시장의 화재소식은 중앙으로까지 알려져 KCAC(한국민사원조처)의 해이든 총사령관이 직접 내려와 화재현장을 돌아보는 한편 복구지원을 약속하고 돌아갔다. 길 지사는 화재 피해가 예상외로 컸던 것은 좁은 곳에 상가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복구계획과 함께 시장재정비 계획을 수립했다.

 

김차봉 제주읍장은 특별담화를 통해 “화재현장 주변에는 폭 70m의 로터리를 설치하고 화재터에는 읍 소유나 개인소유를 막론하고 어떠한 건물의 건축도 금지하며 노점개점도 허용하지 않을 방침이다. 그 대안으로서 현재 서문통과 동문통 쪽에 각각 1개소의 상설시장의 설치를 구상 중이며, 이재민에 대해서는 천막수용과 구호미를 배급하고 세금을 감면하겠다”고 밝혔다.

 

김 읍장은 이와 함께 공설시장특별대책위원회는 매일시장 복구계획으로서 5일시장 자리에 서문상설시장을, 남일자동차부 동남쪽에 동문상설시장을 설치하고 5일 시장은 제주도립병원 뒤의 화장터 또는 남문통에 있는 옛 감시대의 동쪽 빈터로 이전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동문시장의 화재사건은 결과적으로 전근대적인 시장구조를 혁신 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에 따라 그 해 4월3일 서문공설시장이 착공됐고, 7개월후인 11월23일과 11월27일에는 서문시장과 남문시장이 각각 설치됐다. 남문시장은 감시대의 2000평을 매수하여 개설됐다. 주민 오 모 씨가 실화혐의로 금고 2년을 선고 받은 것은 화재가 난 후 한달 만인 4월6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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