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기업이 세상을 바꾼다(10) 폐목재로 사무용품을? 지구구조대 ‘알이’

사회적기업이 세상을 바꾼다 - (10) 폐목재로 사무용품을? 지구구조대 ‘알이’

 

최근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사회적경제’가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는 <제주사회적경제 네트워크>와 함께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한 사회적경제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풀어서 제공하는 동시에, 매주 사회적경제를 구성하는 사회적기업-마을기업-자활기업 등을 차례로 탐방할 계획이다. 특히 이들이 우리의 삶과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고, 우리와 직접 연관된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도 유의미한 기회가 될 것이다.

 

 

▲ 알이의 주특기 중 하나는 '감성 사무용품'이다. 버려진 나무로 만들어진 연필꽂이를 바라보고 있는 신치호 대표. ⓒ제주의소리

부서진 가구들, 건축에 쓰고 남은 자재들, 대형 폐기물들. 더 이상 어떠한 쓸모도 없을 것 같은 이들이지만 '알이'를 만나면 새로운 상품으로 재탄생한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 위치한 ‘알이’는 폐목재를 이용해 사무용품과 가구를 만들고 인테리어도 하는 예비사회적기업이다. 쓰레기로 새로운 제품을 만든다는 컨셉 자체도 신기하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알이’의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나무 좇아 제주로 내려온 서울토박이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적기업 아름다운가게의 재활용 디자인팀 ‘에코파티메아리(Eco Party Mearry)’의 팀장이었던 신치호(44)씨는 2011년 갑자기 제주행을 택한다. 제주에 ‘폐목재’를 재활용하는 기업을 만들고 싶다는 발상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서다.

“재활용을 잘 하는 아름다운가게도 어쩌지 못하는 게 목재에요. 헌 옷이나 기증된 중고품들은 버려지지 않고 어찌됐든 버려지지 않고 고물상을 통해서라도 소화될 수 있는데 목재는 안되더라구요. 다 부서져서 고장난 가구가 들어오면 폐기물로밖에 처리를 못하는 거에요. 이걸 생각하다보니 폐목재를 리디자인해서 상품으로 재탄생 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렇다면 어째서 제주였을까. 단 한 번도 객지생활을 해 본적도 없이 40년 가까이 서울토박이로 살아온 신 대표였다.

“전국에서 발생하는 폐목재 발생량이 어마어마해요. 그런데 그 중에서 제주도가 폐목재 발생량이 그나마 제일 적어요. ‘먼저 모범사례를 만들자’ 그럼 우리가 제주도에서 시작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 회사 자체가 ‘지구구조대’인데 이게 ‘청정’을 말하는 제주와도 아주 잘 어울린다고도 생각했어요”

 

▲ 폐목재는 사무용품과 기념품 뿐만 아니라 가구로도 재탄생 한다. ⓒ알이

그는 곧바로 계획을 현실로 옮겼다. 2011년 초 조천 송당리를 ‘찜’했다다. 회사를 세우기 전에 한 일은 지역사회에 녹아드는 일이었다. 본격적으로 제주에 문을 열기 전 서울에서 왔다갔다하며 6개월 간 공을 들였다. 마을 주민들을 찾아 뵙고 ‘이러이러한 일을 하면서 여기 살고 싶습니다, 이쁘게 봐주세요’하고 말을 건넸다. 브리핑도 열었다.

처음 마을 주민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육지 젊은이’가 내려오는 것은 그렇다 쳐도 쓰레기를 갖고서 무슨 걸 만든다니 이해를 못했다. 하지만 찬찬히 공을 들이자 마을주민들은 ‘젊은이들이 뜻 깊은 일을 해보려고 한다’며 선뜻 이전 리사무소 건물을 내줬다. 그렇게 제주생활이 시작됐다.

지자체와 관공서 제안서를 내기도 하고 여기저기 직접 몸으로 부딪쳤다. 서서히 그의 회사의 독특한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원목이 갖는 감성, 게다가 버려지는 것들을 다시 세상 속에 불러낸다는 ‘착한 상품’이 어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프로야구팀은 연습과 경기 때 사용하다 부러진 야구배트를 버리기 아깝다며 알이에게 이것으로 구단기념품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제주 올레코스에 간세스템프함 벤치를 만들게도 됐다. 물론 버려진 나무들을 이용해서.

고물상에서 실업자, 운전 간사에서 디자인 팀장까지

 

▲ 알이의 주특기 중 하나는 '감성 사무용품'이다. 버려진 나무로 만들어진 연필꽂이를 바라보고 있는 신치호 대표. ⓒ제주의소리

신 대표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로도 유명하다. 많은 사람들은 ‘디자인팀장이 된 홈리스’로 그를 기억한다. 실제로 실업자에서 단 기간에 디자인 팀장으로 올라선 그의 삶은 두고두고 이야기거리가 될 만큼 흥미롭다.

특히 그가 단 한 번도 정규 디자인 교육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은 더욱 신기한 일이다.

“그런 정규교육은 평생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어요(웃음). 하지만 원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많았어요. 아주머니들이 많이 가입하는 리폼 카페에 가입해서 집안의 물건들 고치거나 다시 칠해서 다시 써서 작은 규모의 리디자인을 했었죠. 그러면서 궁금해지니까 국내외 관련서적들을 읽기 시작했고... 또 고물상에서 일하면서 실제적인 경험에 살이 붙은거죠”

고물상에서의 3년은 그에게는 잊지 못할 자양분이 된 시절이다. 폐기물들의 물성을 이해하게 됐고,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오게 되는 지, 또 자기 맘대로 이것저것 작품들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작품이 완성되지 못하고 실패해도 다시 버리면 그만이니까.

원래 인권실천시민연대의 열렬한 인권운동가였던 그는 잠시 일을 쉬는 동안 친구의 부탁을 듣게 된다. 고물상을 운영하는 친구가 도대체 회사에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 큰일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딱 3개월만 고물상에서 일해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구인난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친구에 발목을 잡힌(!) 그는 3년이나 고물상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뭐 딱히 뭘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던 차에 도와달라고 하니 하게 된 일”이라고 웃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2006년. 그는 일을 그만두고 시골로 낙향해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해졌다. 갑갑한 아파트 숲에서만 살아온 그에게 편안하고 안락한 시골마을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꿈의 공간이었다. 제주로 내려오려는 결심도 이 때 시작된 것. 하지만 서울 말고는 연고가 없는 그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그 사이 본의 아니게 실업자 상태가 됐다.

그 때 딸 율이가 태어났다. 다시 직업을 얻는 일이 절실해진 그 때 아름다운가게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처음으로 맡은 일은 운전 간사. 차량을 운행하며 재활용품을 싣고 다니는 역할이었다. 봉급은 많지 않았지만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한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며 지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디자인 팀’으로 옮기지 않겠냐는 제의가 온다.

“제가 안에서 이것저것 좀 만들고 하니까 이제 그런 걸 좋게 보신 거 같더라구요. 그런데 말이죠 아름다운 가게 부서 트랜스퍼는 상당히 까다로워요. 외부에서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랑 똑같이 ‘면접’을 봐야하거든요. 어쨌든 턱걸이로 운 좋게 디자인 팀에 들어가게 됐죠”

 

▲ 곰곰히 생각해보면 책상 위에는 '나무'가 없다. 신 대표는 이런 부분에서 원목으로 된 사무용품이 '감성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알이

여기서 그의 재능이 꽃을 피운다. 아트 오브제나 상품을 만들면서 이론과 실재를 겸비할 수 있게 됐다. 버려진 젓가락들로 만든 결식아동 모금함, 폐 양장본 책으로 만든 축하카드. 많은 재료로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결과물들은 호평을 받으며 2009년 순식간에 그를 디자인 팀장의 자리로 이끈다.

실업자가 순식간에 한국 대표 사회적기업의 디자인팀장으로, 그리고 다시 기업CEO로. 누가 봐도 멋진 인생극장이다. 실제로 그가 디자인팀장이 된 이후 많은 언론들이 관심을 보이며 그의 성공을 조명했다. 하지만 이런 접근이 그는 마냥 기쁘지 만은 않다.

“우상화되는 부분도 생기더라구요. 명문대에 간 장애인, 이런 경우는 사실 일반화시키기 어려운 모델이거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운이 좋고 주변 상황 여건이 잘 맞아떨어져서 여기까지 온 거죠. 그렇다고 노숙자나 실업자들이 맘만 먹는다고 뭐든 다 할 수 있고, ‘너는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식으로 부각되는 것은 별로에요. 물론 저도 노력은 했죠. 하지만 이를 뛰어넘는 멘토들과 여러 가지 도움과 경험들이 있었을 거잖아요. 하지만 그런 걸 쏙 빼거든요. 세상은 신화적인 것들을 사랑하니까”

자신의 삶이 성공학의 언어가 돼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게 그는 영 불편했다. 특히 어떻게 하면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그에게 구조적 문제는 숨기는 대신 개인적 특질만 조명하는 세상의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지구를 위한 두 번째 선택

 

▲ 알이의 지하작업장. 폐목재는 원단화 작업을 거쳐 이 곳에서 새로운 상품으로 재탄생한다. ⓒ제주의소리

‘알이’는 이제 폐목재뿐만 아니라 다른 폐기물들로 소재들을 늘릴 생각이다. 실제로 알이의 사무실 앞 공터에는 건축현장에서 나온 듯한 폐건축 자재들이 널려져 있었다. 이 모든 것들에 가치를 부여해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으로 재탄생 시키는 것의 그들의 목표다.

그런 점에서 그는 두고두고 아쉬운 게 있다고 한다. 얻을 수 있는 폐기물들이 한정돼 있다는 것. 실제로 알이는 고물상이나 철거업체를 통해 소재들을 얻는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제일 좋은 그림은 따로 있다.

“봉개동에 폐기물처리센터를 도차원에서 시차원에서 저희같은 기업들에게 그 문을 개방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게 조례인지 법령인지 모르겠는데 폐기물로 등록되는 순간 반출이 안된다고 그러더라구요. 섬이라는 특수성도 있으니 저희같은 기업이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주거나 제도를 정비하면 이와 관련해 더 많은 기업들이 생길 거라고 봐요”

인권운동가에서 고물상으로, 실업자에서 디자인 팀장으로. 또 서울 토박이에서 갑자기 제주 조천 선흘 시골마을까지. 모험과 같은 그의 인생은 다시 그만의 방식으로 사회적경제 생태계를 확산시키려는 거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 아직 유통망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가격대가 높다며 걱정을 하는 신 대표는 조만간 알이만의 쇼-룸도 마련하고 주문생산 방식에서도 벗어나 기성상품들도 만들 계획이다.

“제주도에서 모범사례를 만들면 다른 지역에서도 저희같은 기업이 생기겠죠. 저는 그런 기업을 바라는 거죠. 이런 기업이 많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될 거고, 그렇게 된다면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봐요” <제주의소리>

<문준영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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