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22) 上 세계가 직면한 모든 문제엔 그녀가 있었다

 

▲ 절대로 유턴할 줄 모르던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한 정치가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소위 ‘철(鐵)의 여인’으로 불리던 한 영국인 노파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영국은 물론 전 세계가 시끄럽다. 그녀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왜냐하면 그녀가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3연임하면서 집권하던 당시 그녀가 추진한 정책들로 인해 영국인을 넘어 수많은 세계인들의 삶과 풍경을 극단적으로 바꾼 ‘대처리즘’으로 통칭되는 신자유주의의 기획자였다. 그리고 그의 동업자는 바다 건너의 헐리웃 스타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이 둘은 그들의 집권 당시 냉전의 막바지에서 세계를 주무른 이념적 동업자였으며, 소위 부자들을 위한 충견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치활동의 결과 수혜를 입은 집단들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녀의 정책으로 삶의 기반마저 해체당한 집단들은 그녀의 죽음을 반기며 축제의 나팔을 불고 있다.

불행하게도 특히 그녀는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모국인 영국 내에서 더욱 혹독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그녀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사롭지 않은 그녀의 죽음을 성찰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국의 한 여성정치인의 삶을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한 시대를 성찰하는 일과 같다. 왜냐하면, 그녀의 정치적 행보는 영국의 운명뿐만 아니라, 지구촌 자본주의의 풍경 자체를 바꿔놓은 신호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난 8일(현지시간) 영국 최초의 여성총리였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 Margaret Hilda Thatcher/87세)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은 오늘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에서 거행된다.

영국 보수당의 정치가이자 유럽 최초의 여성 총리, 1979년부터 1990년까지 12년 동안 집권하면서 역대 영국총리 중 유일하게 3연임을 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영국 내부적으로는 소위 ‘영국병’(British disease, 1970년대 경제침체를 겪던 영국에서 과도한 복지제도와 막강한 노조를 비난할 때 사용된 용어)을 걷어냈다는 평가와 외부적으로는 북아일랜드에 대한 가혹한 정책과 포클랜드를 둘러싸고 아른헨티나와 전쟁을 불사한 철혈 여성총리, 국제적으로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당시 미국대통령과 짝을 이루어 소위 ‘대처리즘’으로 불리는 신자유주의의 기치를 올렸던 타협을 모르는 카리스마적인 정치가였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평가는 이제부터인 듯하다. 

대처의 사망소식은 세계언론에 의해 전 세계 지도자들의 예의 그 추도사를 보도하는 것으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먼저 나선 것은 과거 대처의 동반자였던 미국이다. 오바마는 “우리는 위대한 자유의 투사를 잃었다.”라며 대처 전 총리의 죽음에 애도의 뜻을 전했다. 독일의 여성총리인 앙겔라 메르켈은 “그는 뛰어난 지도자이며 많은 여성들의 본보기였다.”라며 애도의 뜻을 밝혔고, 캐머런 영국 총리는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이자 위대한 총리, 위대한 영국인을 잃었다.”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애도 성명에서 “대처 전 총리는 냉전의 시기에 평화와 안보에 기여한 선구적인 지도자였다.”라며 “정치력뿐만 아니라 여성 평등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라고 대처의 업적에 대해 언급했다. 특히 반 총장은 대처 전 총리가 1989년 11월 유엔 총회에서 세계가 기후 변화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지도자라고 밝히며 “대처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라고 전했다. 그녀의 힘센 친구들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우리나라의 박근혜 대통령 역시, “8일 월요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영국 국민들이 위대한 지도자를 잃게 돼 애석하게 생각한다.”라고 말했으며, 이어서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영국의 경제를 살리고 지난 1980년대 영국을 희망의 시대로 이끄셨던 분이고 고인은 한·영 우호 협력 증진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셨던 분으로 유가족과 영국 국민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정치인들의 국가 간의 외교관례에 따른 정중한 추도사와는 별개의 상반된 평가는 대처리즘의 직접적이고 1차적 피해자였던 영국 국민들에게서 나왔다.

영국의 <가디언(Gadian)>지는 그녀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사설을 통해 “마거릿 대처의 유산은 인간 정신을 파괴한 사회 분열, 이기심, 탐욕”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인디펜던트>의 칼럼니스트 오웬 존스도 칼럼을 통해 “대처리즘은 지금도 우리를 파괴시키는 국가적 재난”이라고 규정했다. 영국의 런던시장을 지낸 켄 리빙스턴은 “대처는 영국이 오늘날 직면한 모든 문제에 책임이 있다.”라고 비판했다.

영국 탄광노조(NUM)는 8일(현지시간) 성명에서 “대처 이후 계속된 보수당 정부의 정책은 자랑거리가 아니다.”라며 “대처는 자유로운 시장의 상징이었지만 이들이 취한 이익은 소수에게만 돌아갔다.”라고 비판했다.

UM 사무총장 크리스 키친은 “오랫동안 대처가 사라지길 기다려왔기에 그의 죽음에 유감이라고 밝힐 수는 없다.”라면서 “그가 땅에 묻히며 대처의 정책들도 함께 사라지길 기대할 뿐”이라고 밝혔다.

12일 영국 ‘아이튠스’(iTunes) 차트에서 ‘딩동, 마녀가 죽었다(Ding-Dong the Witch Is Dead)’라는 노래가 음원차트 1위를 기록했다. 또 다른 영국 음악 순위인 오피셜 차트 컴퍼니 영국 톱40 차트에 의하면 이 곡은 3위에 올랐다. 이 노래는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사악한 마녀가 죽었을 때 축하곡으로 쓰였던 노래인데, 의미만 살짝 바꿔 대처를 비판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BBC뉴스 인터넷 판에 따르면 이날 BBC라디오1 방송 측은 1939년 개봉된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삽입됐던 ‘딩동, 마녀가 죽었다’라는 노래가 오는 14일 공식 주간 차트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5초 동안만 짧게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BBC방송의 토니 홀 심의관은 “개인적으로 대처 전 총리를 비난하는 캠페인이 무례하고 부적절하다.”라면서도 “노래를 완전히 금지해버리면 언론의 자유에도 위배되고 노래에 대한 관심을 더 끌게 만들 수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확실히 한국보다는 나은 듯하다. 우리였으면 국가보안법으로 묶어버리면 그만인데.

 

   

가장 강력하고 위트 있는 일격은 영국의 세계적인 좌파 영화감독 ‘켄 로치(Ken Loach)’가 날렸다. 그는 “마거릿 대처는 현대 영국 총리들 중 가장 분열적이고 가장 파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대량 해고, 공장 폐쇄, 공동체 파괴 - 이게 그녀의 유산입니다. 그녀는 싸움꾼이었고, 그녀의 적은 영국 노동계층이었습니다. 그녀의 승리는 정치적으로 부패한 노동당 지도자와 노조 지도자들의 지원에 힘입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엉망진창인 이유는 그녀가 시작한 정책들 때문입니다. 다른 총리들도 그녀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토니 블레어는 잘 알려진 경우죠. 대처는 거리 공연 악사였고, 블레어는 원숭이였습니다. 대처가 남아공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고문자, 살인자 피노체트와 차를 함께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떻게 그녀를 기려야 하냐고요? 그녀의 장례식을 민영화합시다. 경쟁 입찰에 붙여 최저가에 낙찰시킵시다. 그녀는 그런 걸 원했을 듯합니다.”(위키트리 4월 9일자 기사)

그녀의 장례식은 처음에는 국장으로 치러질 것으로 알려졌으나, 영국의 <미러(Mirror)>지의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그녀의 국장 반대의견이 75%에 달하고, 사회분위기가 부정적으로 쏠리면서 국장보다 한 단계 낮은 공식 장례(ceremonial funeral)로 치르기로 했다고 한다.

대처리즘(Thatcherism)과 그녀의 시대, 그녀의 행보

‘대처리즘’은 마거릿 대처가 총리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펼쳐진 사회경제정책의 총칭이다. 그 핵심골자는 정부 재정지출의 삭감, 공기업의 사영화, 자본에 대한 규제 완화와 경쟁의 촉진, 노동조합의 권한 축소 등으로 압축된다. 대처가 총리로 취임한 1979년 영국은 이른바 고비용 저효율의 ‘영국병(British disease)’에 시달리고 있었다. 실업자가 160만 명에 달했고, 이자율과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만성적인 국영기업의 노사분규와 과도한 사회보장제도로 영국 사회는 생산성이 뒤떨어지고 곳곳에서 피로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대표적인 것은 대처 취임 이전의 노동당 정부가 집권했던 1964년에서 1979년 사이, 표를 의식하여 펼친 지나친 친 노동적 선심성 정책이었다. 그 결과 노조의 파업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지나친 임금인상과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은 경제침체를 더욱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정부의 과도한 복지지출은 재정적자를 심화․확대시켰다.

 

▲ 철의 여인의 여러 이미지

1979년 정부의 전체예산에서 복지예산은 45.7%를 차지할 정도였다. 또한 노동당 집권 당시 과도한 기업의 국유화는 당초 이상과 달리 기업의 경쟁력 약화를 불러왔다. 관료주의적 경영에 따른 효율성 저하와 경쟁제한에 의한 민간부문의 활력저하, 근로의욕의 저하 등을 낳은 것이다. 대처는 바로 이 시기에 집권한다. 바로 신자유주의, 보수주의, 반공주의, 반노동조합주의의 ‘대처리즘’이라는 히든카드를 들고 말이다.

총리 취임 당시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국영기업이 가장 많았던 나라 영국, 그러나 대처 치하에서 이들 대부분은 민간자본에 팔리는 사영화의 길을 걷게 된다. 즉, 수송, 석탄, 에너지, 통신, 철강, 조선, 자동차, 항공 등 영국 산업의 중핵을 이루는 국영기업을 대부분 팔아 치우고 만다. 이로 인해, 1979년 당시 국영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수는 약 200만 명, 생산량은 GDP(국내총생산)의 10분의 1을 차지했다. 그러나 사영화가 진행된 후인 1988년에는 국영기업 노동자수가 약 100만 명으로 줄고 생산량은 GDP의 6%까지 감소했다.

▲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포스터와 영화 속 한 장면. 대처정부시대의 탄광파업에 참여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가족의 막내아들이 남자무용가가 되는 이야기를 담은 감동적인 이 영화를 통해 대처시절의 영국 노동자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한때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를 표방했던 영국의 사회 복지 모델은 그 전까지만 해도 외국의 칭송을 받던 모범이었지만, 대처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면서 대대적인 감세정책을 펼친다. 그 여파로 복지를 위한 정부의 공공지출을 대폭 삭감해버린다.

그 결과 대처의 퇴임 당시인 1990년도에는 영국 어린이 중 28%가 빈곤선 아래에 놓이게 된다. 특히 대처는 총리 취임 이전인 1970년 교육부장관시절에 아이들의 우유급식을 중단하여 ‘우유도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 대처가 사망한 이후 거리의 외벽에 “당신은 우유와 우리의 희망까지 날치기 했다.”라는 포스터가 나붙은 것은 이런 이력 때문이다.

노조를 다루는 방식과 태도 또한 이전의 노동당 정부와는 확연히 달랐다. 대표적인 사건이 1984년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정책에 반대한 광부파업이었다. 정부가 일부 국영 탄광을 폐쇄하고 2만 명의 광부를 해고하자,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파업이 일어났다. 대처는 물러설 수 없다며 대대적으로 경찰력을 동원해 이를 진압하는 한편, 노조와 타협하지 않고 광부들을 각개격파하면서 설득해 나갔다. 결국 1년여의 파업기간은 끝이 나고 대처는 승리한다.

또한 노동조합의 활동을 제도적으로 규제해 강성노조의 활동을 약화시켰다. 그동안 보장되었던 노조의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파업 여부도 집행부만의 결정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파업찬반투표를 법적으로 의무화했다. 또한 정치파업을 한 노조간부에 대한 면책특권을 제한했다. 그 결과 영국노조는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 1984년, 런던에서 벌어진 탄광노동자들의 파업행렬

특히, 대처는 경제 활성화를 위해 기업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규제완화와 외환관리를 전폐하고, 금융시장 활성화에 사활을 걸어, 제조업의 나라에서 금융업의 나라로 경제의 중심을 급속하게 이동시켰다. 그 결과 그의 임기가 끝날 무렵 영국 제조업은 몰락했으며, 금융업이 영국경제의 중심으로 우뚝 선다.

이러한 대처리즘의 관철은 그녀에게 ‘철(鐵)의 여인(The Iron Lady)’이라는 별칭을 안겼다. 대처는 집권 당시 이 별칭을 즐겼다고 한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는 사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덕목들에는 충실하지 못했다. 즉, 민주주의 가치와 지구환경에 대한 책임 있는 선진국의 정치지도자의 면모나 여성들의 아이콘으로서의 역할 등에서 말이다. 오히려 그녀는 이들과 반동적이며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지구온난화에 대처한다는 교토 의정서는 반(反)자본주의와 반미주의가 결합된 것에 불과하다며 반대했고, 집권 당시 베트남 이민자를 ‘보트 피플’이라 부르며 조롱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를 옹호하는 한편 ‘넬슨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고 칭하는 등 인종차별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 자신이 최초의 여성 총리로서 소위 정가의 유리천장을 없앤 인물로 평가받는 여성지도자였지만, 정작 여성의 권익 보호와 사회취약계층을 옹호하던 페미니스트들은 혐오했다. 그녀는 “페미니스트는 나를 싫어한다. 나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을 싫어하니까. 페미니즘은 독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죽자 세계적인 페미니스트 커뮤니티인 인터넷 웹사이트 ‘페미니스팅’은 “대처는 여성도 남성만큼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라면서 “여성으로서 역사를 만들었지만 자신의 권력으로 여성을 비롯한 취약계층을 억압했다”라고 비판했다. 또한 그녀는 영국의 노동조합을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여 집권 기간 내내 노동조합 탄압정책을 일관되게 펼쳐나갔다.

이와는 별도로 그녀는 우리가 익히 아는 냉전시기 자유진영의 독재자그룹들과도 절친했다.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등 악명 높은 독재자들과 흔들림 없는 우정을 지켜왔다. 대처는 이들을 “우리의 가장 훌륭하고 소중한 친구들”이라고 불렀다.

2004년 6월 레이건이 세상을 떠나자 이념적 파트너였던 그를 위해 대처가 추도사를 읽는 영상이 장례식장에서 방영됐다. 뇌졸중 후유증 탓인지 다소 어눌한 발음이었지만, 예의 위엄 있는 모습으로 ‘위대한 미국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대처는 “그는 미국과 동맹국들이 자유에 대한 믿음을 되찾도록 영감을 줬다.”라며 “그는 진정 하늘이 낸 사람이었다.”라고 고인을 기렸다고 한다. 그녀다운 일화다. 전 세계에 신자유주의를 전파했던 동지애를 뇌졸중의 후유증을 안고서도 공표하고 나섰으니 말이다.

대처와 레이건을 말할 때, 반드시 따라붙는 말이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다. 둘 다 두 정치인이 이끌었던, 경제와 정치정책에 관한 표현이다.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는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1981년부터 1989년까지의 임기 동안 수행한 시장 중심적 경제 정책 혹은 이와 유사한 정책을 가리킨다. 라디오 방송자 폴 하비가 레이건(Reagan)과 이코노믹스(economics, 경제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를 합쳐서 만든 말이다. 레이거노믹스의 중심 내용은 정부 지출의 축소, 노동과 자본에 대한 소득세 한계세율 인하, 정부 규제의 축소, 인플레이션을 줄이기 위한 화폐 공급량의 조절 등이 특징이다.(위키 백과)

▲ 대처의 사망소식에 기뻐하는 영국인들

이처럼,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는 경제에 있어서의 정부지출의 축소, 자본에 대한 감세정책, 정부규제의 완화를 통한 자본에 날개 달기 등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시작인 것이다. 영미 두 국가의 이러한 경제정책에 있어서의 새로운 변화는 이후 자국의 경계를 넘어 지구촌의 자본주의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한다. 얼마 전 퇴임한 MB가 입에 달고 살았던 기업프렌들리가 그것이다. 그들이 퇴임하고 한참 뒤인 오늘날까지 지구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시대, 세계는 모두 ‘대처의 아이들’ 

대처리즘의 최대 공적(?) 중 하나인 적대적이고 강력한 노동조합탄압과 강도 높은 산업구조조정의 결과, 국영기업의 사영화는 급격한 실업자를 양산했다. 바로 이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를 ‘대처의 아이들’세대라고 부른다. 이들은 실업이 부른 급격한 가정의 변화, 즉 이혼과 가족의 해체에 따른 생활환경의 변화에 의해 흡연과 알코올에 빠져 든다. 심각해진 실업과 그로 인한 일상의 불안감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이러한 말초적인 취향을 강화시켰으며, 이들은 성장하여서도 정치에는 무관심한 계층이 되어간다.

 

▲ 영화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 감독 대니 보일, 주연 이완 맥그리거, 1996)의 한 장면. 198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는 ‘대처의 아이들’ 세대의 방종과 청춘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적용시킬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 1% 대 99%의 경제를 가능하게 한,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소위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시대는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계경제는 이 쌍두마차의 진두지휘 아래, 금융자유화를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체제로 재편되어 가기 시작한다. 이를 뒷받침 한 것은 우루과이 라운드와 WTO(세계무역기구)의 설립이었다.

이는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 즉 자본의 세계화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진행 중인 FTA 역시 이의 산물이다. 이들은 세계적 차원의 신자유주의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제도들로,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본의 이동과 다국적기업의 이윤 추구가 국가의 경제시스템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것까지도 골자로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 규제 완화,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자유무역 등을 특징으로 한다. 곧 신자유주의론자들은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은 경제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떨어뜨려 오히려 상태를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소극적인 통화정책과 국제금융의 자유화를 통하여 안정된 경제성장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기업하기 좋게 규제를 완화하고, 노동을 유연화시켜 기업활동을 활성화하면, 그에 따라 고용이 증대되고 소비가 촉진되어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논리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듣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한 것이고, 이런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바람대로 이런 일이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공공복지 제도를 확대하는 것은 정부의 재정을 팽창시키고, 근로의욕을 감퇴시켜 이른바 ‘복지병’을 야기한다는 주장도 편다.(이는 전적으로 대처의 이야기다.) 또한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무역과 국제적 분업을 위해 시장개방을 주장하는데, 이른바 ‘세계화’나 ‘자유화’라는 용어도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다. 이는 세계무역기구(WTO)나 우루과이라운드 같은 다자간 협상을 통한 시장개방의 압력으로 나타났다. 신자유주의의 도입에 따라 케인즈 이론에서의 완전고용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해체되고, 정부가 관장하거나 보조해오던 영역들이 민간 자본에 매각되어 사영화되었다.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란 것이 있다. 즉, 워싱턴에 있는 IMF, World Bank, 미국 재무부 등은 90년을 전후로 하여, 개도국 등 제3세계 국가들이 국가적 위기발생 시 시행해야 할 경제 개혁조처들을 목록화했는데, 이 목록들의 주내용은 정부예산의 삭감, 외환시장 개방, 관세의 인하, 국가기간산업의 민영화(실은 사영화), 외국자본의 직접투자 허용, 정부규제 축소, 재산권의 보호(외국인의 재산권) 등이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이를 골자로 하는 미국의 경제체제 확산 전략을 이른다. 그들만의 이 합의는 전적으로 미국식 시장경제체제, 즉 신자유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특히, 위기가 발생한 대상국가가 이 권고를 따르지 않을 때에는 집권세력의 부패비리를 폭로하여 지배정권을 무력화시키고, 중도성향의 다른 정당이 집권하게 하여, 권고안의 구조조정을 단행케 한다는 매우 공격적인 전략이다, 또한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방치했다가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관철하는 기회로 삼겠다는 전략도 포함되어 있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경제체제로 전환시켜 세계경제를 미국 기업이 진출하기 쉽게 만들기 위한 영미 금융자본주의의 탐욕스런 음모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IMF 때에도 이 워싱턴 컨센서스에 따른 조처들은 그대로 관철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충실히 따른 결과 중산층은 몰락하고 빈익빈부익부의 양극화 문제는 더욱 심화되어 현재까지도 그 회오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IMF 탈출의 방편으로 시작된 조처들은 결국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 심화되었으며, MB정부는 이르러서는 IMF 때 빼앗기지 않아 그나마 남아 있던 공공부문을 매각해 사영화하는 데 정력을 쏟았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의 삶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양극화의 극단화로 치달으며 참 살기 힘든 나라로 변해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실업률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그렇잖아도 사회안전망이 시원찮은 나라에서 한번 추락한 국민들의 삶은 패자부활전을 바랄 수 없기에 자살률이 늘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대처와 레이건이 만들어 놓은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들이 주도해서 만든 세계는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는 세상이다. 그리고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월가의 자본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상징되는 국제금융위기를 몰고 온다. 그리고 극단적 양극화 상황에 내몰린 민중들의 봉기가 월가 점령시위였다. 1%의 부를 위해 99%를 희생시켜온 신자유주의에 대한 봉기였던 것이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 下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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