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22) 下 1%를 위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대처리즘의 또 다른 공적들, 인두세·광우병·훌리거니즘

오바마는 대처를 ‘위대한 자유의 투사’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좀 더 적절하게 바뀌어야 한다. 좀 더 정확히, 대처는 “가혹한 신자유주의의 여전사였다.”라고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지구촌을 더 많은 사람들이 살기 힘들게 만든 지옥으로 가게 하는 열차의 나팔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조타수는 미국의 자본가들과 레이건이었다. 이러한 표현이 과하다고 생각되는가? 다음을 보자.

1988년 4월 영국 정부는 인두세(poll tax) 카드를 빼어든다.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의 효과가 집권기간 중에 바닥을 드러냈다. 금융분야를 빼고 제조업이 몰락한 상황에서 실업자가 넘쳐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로 인해 부동산마저 경기 침체에 빠지자 그 부족분을 확충하는 방법으로 도입된 것이 인두세다. 인두세란 ‘지역 주민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란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지역세의 하나였다. 그 당시까지 영국의 지역세는 부동산 소유자와 거주지의 크기에 따라 차등 부과됐다.

그런데 이 새로운 세금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국민들, 즉 그동안 세금을 내지 않던 무직자들이나 학생 등 특수한 대상자들에게도 일괄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이 제도를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서 먼저 시범적으로 시행한다는 방침이 서자 이 지역 주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 문제는 런던에까지 파급되어 수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 1990년 3월 31일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인두세 반대 시위 현장(BBC 사진).

1990년 3월 31일, 트라팔가광장에서 행사를 주최한 ‘반인두세 연합회(Anti-Poll Tax Federation)’는 당초 집회 참가자 수를 6만 정도로 예상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늘더니 무려 20만 명이 참가하였다. 젊은이, 노인, 흑인, 백인 등 다양한 계층과 연령층의 사람들이 ‘NO POLL TAX PAY!’라고 적힌 플래카드와 깃발을 가지고 하이드 파크 쪽을 향해 거리 행진을 시작했다. 이 행진은 평화로운 행진이었으나, 시위대가 총리관저가 있는 다우닝가에 이르자 불안하게 행렬을 지켜보던 경찰은 폭력진압을 시작했고, 이내 저항하는 시민들과 경찰 간의 격렬한 충돌로 발전하였다. 경찰은 선량한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갔다.

그러나 이미 TV를 통해 경찰의 폭력진압이 방영된 상태에서 국민들은 대처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후 시민들은 인두세 납부거부운동을 벌이면서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결국 대처는 그해 11월 20일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임기를 남긴 채 존 메이저에게 자리를 넘겨줘야 했다. 후임 존 메이저 총리는 취임하자마자 인두세를 폐지하고 소득에 따라 차등 부과되는 새로운 세금 제도를 만들었다.

광우병(BSE, bóvine spongíform èncephalopathy). 영국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전 세계의 골칫거리가 된 이 동물 질병이 대처의 정책에서 시작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듯하다.

마거릿 대처는 대처리즘을 추구하면서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를 밀어붙이는데, 이 과정 속에 등장한 것이 자본의 무한증식을 관리하는 시스템을 무장해제 해버린다. 이른바 규제완화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완화목록 속에 들어가선 안 될 것이 포함되었다. 바로 ‘비육사료’와 같은 것에 대한 ‘규제’ 또는 ‘금지’도 포함되어 버린 것이다. 광우병이라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비육사료’는 영국에서 처음 사용했고(대처의 규제완화조처의 결과로 ‘비육사료’가 목축에 사용되면서 처음에는 새로운 산업의 개척으로 보였을 정도였다.), 이것이 점차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1980년대 초의 일이다.

영국의 사료업자들은 이 규제완화를 틈타 소를 해체하고 남은 부산물(뼈, 내장) 등을 갈아 고형으로 만든 뒤 다시 소에게 먹이는, 즉 ‘소에게 소를 먹이는 짓’을 했다. 이른바 ‘육골분사료’다. 10년 뒤 광우병 파동이 나기 전까지 ‘곡물사료의 일종’으로 분류되어 아무런 규제 없이 소들에게 먹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10여 년 이상이 흘러 1990년대 초 처음으로 광우병 소가 나타났다. 물론 철의 여인 대처정부에서 이미 메이저총리로 바뀐 상황이다. 메이저정부는 영국 축산산업의 몰락을 막기 위해 광우병의 과학적 진실을 덮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1990년 5월 당시 농림부장관이었던 ‘존 검머(John Selwyn Gummer)’는 자신의 4살 난 어린 딸과 함께 BBC 방송에 출연하여 쇠고기가 안전하다며 직접 햄버거를 먹는 쇼까지 연출한다.

그는 “광우병이 동물에게서 인간에게로 전파된다는 증거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참조할 수 있는 모든 과학적 증거들에 비추어볼 때 쇠고기는 안전합니다.”라고 떠벌였다.(그러나 그는 2007년 10월 4일, 친구 딸이 인간광우병(vCJD)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해야 했다.) 그리고 더 많은 젊은이들이 쓰러지는 일이 벌어지자 이번엔 보건부 장관이 1996년 1월 26일 “광우병이 크로이츠펠트-야콥병(CJD)을 일으킨다는 증거가 없다.”라며 방송과 언론에 나서서 기자회견까지 한다.

▲ 1990년 당시 농무부장관인 존 검머가 4살 난 딸과 함께 햄버거를 먹으며 쇠고기의 안전성을 홍보한 이벤트를 비판한 인터넷 BBC의 기사.

하지만 그로부터 두 달이 채 못 되어 3월 16일 “젊은 사람에게 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콥병(vCJD)이 발병한 것은 광우병 쇠고기를 먹은 것 때문”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 광우병의 발생과 감염경로(주간조선 사진).

결국 영국정부는 대처리즘에 의해 취한 조치인 ‘규제완화’를 다시금 거두어, ‘비육사료’에 대한 ‘제한’을 중심으로 한 ‘규제의 강화’로 복귀한다. 처음 1단계 규제를 했다가 그래도 되지 않자 모든 비육사료를 전면금지하는 3단계 규제로 나간다. 결국, 10여 년에 걸쳐서 500만 여 마리의 소를 불태워 처분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나서야 겨우 광우병 파동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광우병은 발생건수나 인간광우병 사망자 수를 볼 때 특히 영국인들에게 큰 재앙이 되었다. 2000년 블레어 정부가 발표한 ‘광우병 원인규명과 대책’에 관한 청문보고서(BSE Inquiry)에 따르면, 1986년부터 2000년까지 17만 마리의 소가 광우병에 걸렸으며, 470만 마리의 소가 도살되어 태워지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본다. 이 광우병의 기원은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있었다.

‘베버리지 보고서’란 게 있다. 소위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는 ‘복지’의 고전적 명제를 탄생시킨 바로 그 보고서다. 후에 영국 노동당이 사회보장제도의 완벽한 실시를 주장하며 내세운 슬로건이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 윌리엄 베버리지와 베버리지 보고서.

베버리지 보고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과 미국의 각 사회보장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보고서로서, 1941년 6월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영국 전시 내각이 창설한 ‘사회보험 및 관련 서비스에 관한 위원회’가 작성하여 1942년에 제출했고, 정식 명칭은 ‘사회보험과 관련사업(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이다. 당시 위원장인 ‘윌리엄 베버리지(1879~1963, William Henry Beveridge)’의 이름을 따서 ‘베버리지 보고서’라고 부르게 되었다. 빈곤 해소를 주안점으로 하여 국민이 기본적인 사회생활을 충족하도록 사회보험을 실시할 것과 긴급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부조를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세부적으로는 전 국민이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아 기본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고, 여기에 드는 비용은 국가, 노동자, 고용주가 동등하게 분담할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베버리지 보고서(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는 영국 복지국가의 청사진이 되었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냉전시기에 서방진영의 안보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후 동구권을 물들인 공산주의가 서유럽에 확산되지 않은 것은 베버리지 보고서에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유럽국가들의 사회보장제도 덕분이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이 보고서의 작성을 지시한 것은 윈스턴 처칠이었으나, 처칠은 이 보고서를 보수당의 정책으로 채택하지 않는다. 보고서의 내용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총리였으나, 전후 이루어진 선거에서 애틀리가 이끈 노동당에 패하고 만다. 반면 애틀리와 노동당은 베버리지 보고서에 입각하여 복지국가 영국을 만들어 나간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책임과 개입에 의해 선별주의적 ‘구빈법’ 체계로부터 탈피하여 보편적이고 보다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정치·사회·경제적 분위기에서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인들에게 베버리지 보고서는 복지국가와 동의어로 인식된다. 이러한 영국의 변화는 베버리지 보고서가 영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프랑스, 서독, 스웨덴 등 서유럽 복지국가의 기틀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한다.

이러한 1945년 이래 복지국가 영국을 해체한 이가 바로 마거릿 대처 총리다. 그녀는 이러한 복지제도에 기반했던 영국인들이 개인의 책임을 지키기보다는 광범위하게 사회에 그 책임을 떠넘긴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정부의 복지비 지출을 대폭 삭감하여, 베버리지 보고서에서 시작된 영국 복지제도를 작은 정부, 공공지출의 삭감이라는 관점에서 축소, 해체하고자 했다.

대처는 1987년 9월 23일 『여성 자신 Woman's Own』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우리가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알아서 해결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시대를 거쳐 왔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생겼다. 가서 보조금을 얻어와야지.’라든가 ‘노숙자가 됐어. 정부가 반드시 내 거처를 마련해줘야 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문제를 사회에 떠넘기고 있다. 그런데 솔직히 사회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 있고 가족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으며, “사회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지금도 좌파 정치인, 기자, 그리고 때로는 성직자들에 의해 인용되고 있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사회란 없는 것인가? 인류역사에 있어서 시대마다 그 복잡함은 달리하겠지만 사회란 늘 존재해 온 실체다. 대처의 이 같은 말들은 그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소수의 자본가계급이며, 이들은 그들 이외의 대다수 국민 또는 노동자계급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내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은폐하는 수사일 뿐이다.

대처 이후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상징되었던 영국의 복지시스템은 대폭 축소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현재에도 영국 GDP 대비 복지비 비율은 21.8%로 현재 우리나라의 복지비 지출비율의 3배(한국 6%대)에 이른다.

▲ 축구장의 폭력자 훌리건들은 80년대 내내 유럽의 축구시합을 뒤흔들었다. 특히 대처시절의 영국에서 훌리거니즘은 가장 흉포하게 발달했다.(BBC)

축구장의 깡패를 뜻하는 훌리건(Hooligan)의 이야기는 다들 아는 이야기다. 특히 TV화면을 통해 보는 훌리건들의 폭력이 난무하는 영국과 유럽의 축구장 풍경은 한때 스포츠뉴스 시간대의 단골 메뉴였다. 하지만, 맥락이 생략된 이미지만 본다는 것이 진실을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훌리건들의 난동이 대처리즘의 산물이란 것을 아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영국에서의 축구는 전통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전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특히 이들은 축구경기장의 입석 자리였던 테라스에서 평상시 쌓였던 울분과 분노를 표출하곤 했다. 이러한 이들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훌리거니즘(Hooliganism)으로 발달했고, 훌리건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가 대처가 집권했던 1980년대 내내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특히 헤이젤 참사(Heysel Stadium Disaster, 1985년)와 힐스보로 참사(Hillsborough disaster 1989년)는 훌리거니즘의 역사에서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으로, 단순한 축구장의 사고를 넘어서 대처정부 시기의 사회모순에서 비롯된 정치-사회학적 의미가 복잡하게 얽힌 사건들이었다.

▲ 헤이젤 참사의 현장 당시 사진(BBC)

헤이젤 참사는 대표적인 최악의 사건이었는데, 1985년 5월 29일 유러피언컵 결승전이 열린 벨기에 브뤼셀 북서부의 헤이젤에 위치한 보두앵 경기장에서 이탈리아의 유벤투스 FC와 잉글랜드리버풀 FC 서포터 사이에 벌어진 싸움으로 인해 39명이 사망하고 454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훌리건 29명이 구속되었고, 잉글랜드의 클럽팀이 5년간 국제 대회 출전을 금지당하는 중징계를 받는 등(리버풀 FC는 7년간 출전 금지 처분을 받음) 잉글랜드에서 축구의 서포터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 중 하나이다.

그로부터 4년 후 발생한 힐스보로 참사는 1989년 4월 15일,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 간의 FA컵 준결승전에서 힐스보로 스타디움(셰필드 웬즈데이의 경기장)의 레핑스 레인 테라스가 무너지며 96명의 리버풀 서포터들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경기장은 당시 어떠한 안전 검침도 받지 않았으며, 팬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정부 관계자들에게 사고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이는 모두 무시당했다.

참사 이후 이어진 수사에서 재판관은 사건의 원인이 난동을 부린 리버풀 팬들 때문이며, 경찰들이 관중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결을 내렸고, 1994년 8월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경기장들의 모든 관중석을 좌석으로 개편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이 판결은 결국 힐스보로 참사의 원인이 난동을 부린 리버풀 팬들에게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희생자들의 유족들은 끊임없이 사건의 재수사를 요구했지만, 법원은 이를 허용치 않았다. 결국 2009년 ‘힐스보로 독립 패널(Hillsborough Independent Panel)’이라는 단체가 발족하면서 이 참사의 전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힐스보로 참사의 전말을 조사해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45만 페이지 분량의 이 보고서에는 힐스보로 참사의 사망자 96명 중 41명은 제대로 응급조치를 받지 못해 사망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경찰은 책임을 면하기 위해 사망자들의 혈중 알코올 농도와 범죄 이력을 확인하는 데만 집중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경찰이 훌리건들에게 사건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고 시도했다는 점을 밝혀냈다.  

▲ 힐스보로 참사를 다룬 당시의 데일리 미러지.

대처정부는 당시 적대적으로 노동자 계급을 대하듯 축구 팬들을 상대로도 고압적인 태도를 일관했다. 이때 대처가 ‘잉글랜드 축구 협회(FA)’에 “당신들은 훌리건을 막기 위해 어떠한 계획을 갖고 있는가?”라고 물어봤고, FA의 수장이었던 테드 크로커는 “이 사람들은 사회의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만들어낸 훌리건이 우리 스포츠에 유입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대처는 자신들의 강압적인 방식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병폐를 양산하고 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훌리거니즘도 대처리즘의 결과물 중 하나였다.

강압적인 노동자탄압정책과 제조업의 기반을 붕괴시킨 대처리즘은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계급에게 깊은 상처와 울분을 던져 주었다. 결국 그들이 이를 풀어 낼 공개적인 장소는 ‘그들의 스포츠’인 축구장일 수밖에 없었으며, 값싼 입석표로 입장할 수 있는 테라스는 그들의 울분과 분노를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TV를 보면서 혀를 찼던 잉글랜드의 훌리건들은 사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에게 벼랑 끝으로 내몰린 영국노동자계급의 한이 서린 퍼포먼스였던 것이다. 선량한 시민들을 폭도로 만드는 것은 결국 잘못된 정책을 펼친 정부에 의해서라는 진리는 영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쯤 와 보면, 왜 그래도 한때는 ‘신사의 나라’라 불렸던 영국시민들이 대처의 죽음 앞에 저리도 양극단의 사회상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가가 이해될 것이다. 아니, 대처의 죽음을 놓고 영국사회가 극단적 양극화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대처가 이룩한, 즉 대처리즘이 만들어낸 영국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현재 세계인이 목도하는 영국의 풍경은 대처가 그토록 원했던 풍경이기도 한 것이다.


대처의 죽음을 보면서 MB를 떠올린다

MB는 작금의 이 영국 풍경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국판 대처리즘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MB에게 이 이국적 풍경이 반드시 이국적 풍경으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대처가 MB의 데자뷔였던 것처럼, 대처의 죽음 역시 MB의 미래에 다가올 장례식의 풍경이 데자뷔일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 참 비슷한 파트너와 비슷한 풍경. 대처는 MB에게는 데자뷔였는지도….


앞에서 우리는 모두 ‘대처의 아이들’ 세대라는 말을 했다. 즉, 김영삼정부가 열어 놓은 판도라의 상자인 IMF시대를 떠맡은 김대중 대통령은 <민족경제론>의 이론가 박현채의 경제정책에 관한 한 정신적 계승자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IMF시대를 탈출하기 위해선 그들이 마련한 출구전략, 즉 ‘워싱턴 컨센서스’의 이행조처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국민들을 동원해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이고, 알짜 기업들의 쓸개, 간을 다 내주고 나서야 IMF의 출구를 나선다. 하지만, 이미 한국경제는 그들의 전략대로 미국 등 자본주의 종주국들의 놀이터가 된 이후였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들어선다. 국민의 정부에서 시작된 워싱턴 컨센서스의 신자유주의정책의 효과는 이제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노무현은 이를 적극적인 신자유주의 공세로 극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뜻대로 될 리 만무한 일인 것이다. 그 결과 그는 국민에게 고통을 배가하는, 더 나아가 국민은 없고 GDP의 통계수치만 남은 경제부국을 실현하려 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서 국민을 광우병의 위험에 내던지기도 하고, 한미FTA를 졸속으로 조기 성사시키려 했다가 자신의 정치적 기반마저 빼앗긴 채 정권마저 한나라당에 빼앗기고 퇴임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운의 대통령이 되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이명박을 만나게 된다.

▲ 한국판 대처리즘의 첫 풍경. 용산참사 현장 사진(진보넷 사진)

국민들은 IMF체제 이후 더욱 심화된 양극화현상을 소위 경제대통령이라고 불린 MB정부가 해결해 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MB야말로 어쩌면 한국의 대처, 한국의 레이건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황인종의 신자유주의 적자였다. 그는 대처와 레이건이 그랬듯이 ‘작은 정부 큰 시장’을 내걸었다. 그리고 좀 더 비약한다면, MB정책의 대부분은 대처와 비슷하며, 다른 것은 한국적 상황이라는 특수조건에 의한 것들뿐이라고도 할 만하다.

모든 것을 “다해 본” 대통령, ‘기업프렌들리’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나타난 이 건설업자 출신의 대통령에 의해 국토는 개벽 이래 최악의 난도질을 당하고, 22조라는 엄청난 비용을 자신의 출신계급인 토건계급(?)에 몰아줬다.

또한 가능한 알짜배기 국영기업들을 팔아치우려 애썼다.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폭압적인 탄압으로 맞섰다. 노동자계급에 대한 적대적인 탄압들, 용산참사, 명박산성과 광우병파동 그리고 한미FTA체결, 쌍용차노동자탄압, 언론방송장악, 부자 감세, 복지 예산 삭감, 해군기지 건설문제, 남북관계 단절과 한반도 위기의 심화,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탈 등등 이 지면에서 다 열거할 수 없는 MB식 대처리즘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그의 정책들은 사회안전망이 그 어느 나라보다 취약한 국민들에게는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표다. 양극화의 극단화를 더욱 밀어붙였던 그가 언젠가 장례식을 치르는 날이 왔을 때, 한국인들은 영국인들과 다른 선택을 할까?

▲ 명박산성. 다시 보기 힘들 이 기이한 풍경은 MB정부 최고의 이벤트였으며, 대를 넘겨 전할 한국의 풍경 중 하나다.

2012년 5월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이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서치뷰에 의뢰해 역대 전·현직 대통령 8명의 호감도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은 호감도에서 4위를 기록했다. 1위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할 경우 지지 의향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지지하지 않는다’라는 응답자가 76.4%로 ‘지지한다’(17.0%)라는 쪽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 이명박 대통령의 직무 평가에 대해서는 ‘잘못한다’라는 응답자가 64.6%로 ‘잘한다’(32.4%)를 두 배 이상 앞섰다.(위키 백과) 국민들은 멀리 가지 않아도 그를 실패한 대통령으로 판단하고 있다.

여기에 그의 집권으로 직접적 피해자가 된 국민들의 경우, 그의 국장을 찬성할까? 또는 그의 장례식을 최소한의 미덕으로 보내줄까? 그가 빼앗긴 10년이라고 규정했던 시기에 임기를 지낸 두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은 세계가 눈여겨 볼 정도의 많은 인파가 전국을 물결치게 했다. 하지만, 빼앗긴 10년을 새롭게 뜯어 고친 그의 장례식에도 그 많은 인파가 추도행렬에 동참할 것인가?

대처의 죽음은 절묘한 시기에 찾아왔다. 지난 30여 년 동안 그녀에게서 시작되었던 신자유주의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관철된 경제원리였다. 시장이 가장 합리적인 사회조직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문제를 시장에 넘겼다. 시장원리를 통해 균형이 만들어졌을 때 가장 뛰어난 사회적 조직을 이뤄낼 수 있다는 사회철학이 지배한 시기였다. 이 체제를 주도한 것이 대처와 레이건이었다. 그리고 한 세대 만에 그 정책들은 파탄 나고 말았다. 바로 그 믿었던 시장주의의 정점에 있던 금융시장에서 자본주의의 위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통제되지 않는 자본은 결국 지구촌 전체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아직도 그 피해는 가시지 않았다. 여전히 세계경제는 이 금융위기의 그늘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쉽지 않다. 오히려 경제학자들은 더 큰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 예견하고 있기도 하다.

▲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촛불의 대하. 이날 거리에 섰던 이들이 미래의 어느 날 MB 장례식의 다른 한쪽에 설 주체들이다.

영국 역시 30년 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는 모양이며, 그 당시 삶의 기반을 해체당한 사람들은 삶의 질이 완전히 바뀌어 여전히 벼랑 끝에 서 있다. 99%의 한 사람으로 말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영국 경제가 좀처럼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대처의 유산 때문일 수 있다.”라고 진단했다.

 

▲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제주의소리

그리고 2013년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대처의 게임이 작동하고 있다. 그녀의 죽음을 이국 노인의 자연사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1%를 위해 철권을 행사했던 마거릿 대처의 죽음 앞에서 말이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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