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멍 보멍 들으멍](36) 두루봉이 하르방에게 또 한 수 배우다

 “참 많은 사람이 죽엉 갈 때여….”
그림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하르방이 말씀하신다. 일제강점기와 4.3사건, 그리고 대한민국 현대사의 잊히지 않는 수많은 사건을 경험하며 살아오신 그에게는 울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기억들이 참 많다. 연거푸 한숨을 쉬기도 하고,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며, 그는 슬픔을 토해낸다. 얼마나 많은 기억의 조각들이 그의 작은 머리를 메우고 있는 것일까? 솔직히 나에게는 알 길이 없다. 그저 내가 아는 것은 하르방이 삶의 마지막 문턱을 넘고 있는 그 길 위에 이 모든 것들을 쓰고 그리고 계시다는 사실 뿐이다.

‘슬프니까 그리지. 삶이 즐겁기만 했더라면 그리지도 쓰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그도 그런 것이, 그가 한 장의 화선지에 빼곡히 담아내는 이야기 속에는 늘 죽음과 삶, 슬픔과 기쁨이 공존한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버럭 화가 나기도 하다가 불쑥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기쁘고 즐거운 그림만 그린다면 슬픈 기억도 적잖이 치유될 터인데, 하르방은 그 모든 것들을 한 장에 그려 담고는, 그걸 보며 ‘아, 아프다.’ 하신다. 내가 두루봉이 하르방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며칠 전 나는, 그가 초등학교 입학식의 기억을 그린 그림을 보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귀신 모신 신전 운반’이라고 이름 붙여진 작품인데, 내용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호기심 왕성하고 장난기가 많던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대화하는 내내 그와 나는 깔깔대며 웃었다.

▲ 귀신 모신 신전 운반   70여년 전 조수초등학교 입학식날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전해받은 신전을 집까지 운반하는 사건을 기록한 하르방의 그림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1933년에 태어나신 두루봉이 하르방은 일곱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때는 일제강점기, 선생님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교장선생은 아주 무섭고 못된 사람이었다.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양 선생들을 부려 먹고, 제주의 꼬마들을 일본인으로 만들 생각으로 모든 것을 일본식으로 다 바꾸어 버렸다. 멋모르는 꼬마들은, 선생이 시키는 대로 이름을 바꾸어야 했고,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무서운 사람은 아방도 어멍도 아닌 일본의 신, 즉 천황이라고 세뇌 당했다. 하르방이 말했다.

“일본에 가면, 신전이라는 게 있어. 카미다나(神棚)’렌 행(라고 하는). 그 앞에서 손을 모으고 박수 세 번 치고 기도 하는 거. 지금도 신사참배를 할 적에 그렇게 해. 나는 일곱 살에 소학교에 입학 해신디(했는데), 입학식 때 일이야. 학생덜을(학생들을) 일 학년부터 육 학년까지 다 일렬로 딱 세워가지고, 신전 앞에 세와 놘(세워 놓았어). 그 앞에서 세 번 손뼉을 치고 천황을 위해 기도하라고 시키고, 학생덜신디(학생들에게) 작은 신전을 하나씩 나눠 줜. 경행(그래서), 신전을 하나씩 받앙(받아서) 집에 가져간.
그때, 나는 그디(거기에) 귀신이 들어있는 걸로 믿었으니까 잘도(너무) 무서왔주(무서웠어). 그걸 이렇게 머리에 이고 집꺼정(집까지) 가야 하는데, 도중에 절대로 신전을 쳐다보면 안 돼. 머리 밑으로 내려놔도 벌 받는다고 선생이 말 허난 게(말을 하니까 말이야)! 경행, 머리 위에 그걸 이고 가는데 그때는 신발도 어성이네(없어서) 맨발로 다녔주. 집에까지 가는 길이 비탈길 자갈밭인디(밭인데), 어이고, 되~게 못 견뎌. 누나도 고치(같이) 이서신디(있었는데), 들어주지도 안허여(않았어). 게난(그러니) 나가 맨발로 그걸 머리에 이고, 벌 받을까 무서왕(무서워서) 정직하게 걸어완 게(걸어왔지). 허허허.”

▲ "이렇게 머리에 신전을 이고 집까지 걸어왔어"라고 말하는 두루봉이 하르방. 말씀하시면서도 옛기억에 웃음이 난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 초등학교 입학식날 신전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던 모습을 그린 그림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그렇게 그는 신전을 머리에 이고 맨발로 비탈길을 걸었다. 하르방 보다 다섯 살이 많은 누나와 함께 걸었으나 그녀도 무서웠는지, 아니면 귀찮았는지, 굽이굽이 3킬로미터나 되는 비탈길을 걸으면서도 누나는 한 번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발톱이 부러지고 발바닥이 따끔거렸지만, 귀신이 들어있는 줄로 알았던 신전에 온갖 정신이 팔려 꼬마는 힘겹게 집까지 걸어왔다.

“그래서, 집에 도착행이네(해서) 선생이 말한 대로 신전을 아버지 방 궤짝 위에 올려놓고, 박수를 세 번 쳤지. 겐디(그런데), 나가 장난이 좀 심허여(심해). 그걸 무심히 바라보당이네(바라보다가), ‘요쌰! 이 귀신을 내가 죽여불켜(죽어버리겠어)!’하는 생각이 든 거라. 하하하. 솔짜기(살짝) 슬슬 걸엉(걸어서) 마당에 나왔주. 겡, 부엌에 들어강(가서) 큰 칼하고 호미를 가져왕이네(가져와서는) 궤짝 옆에 탁 갔다 놨어. 귀신이 나오면 그걸로 콕 찍어불젠(찔러 버리려고). 하하하. 겐디 아맹(아무리) 기다려도 귀신이 안 나와. 막 궁금행이네(너무 궁금해서) 다음 날 그걸 ‘딱’ 깨쳥이네(깨부숴서) 안을 봐신디, 아무것도 어신 거 아니라? 귀신이랑 말앙(귀신은 무슨)! 허허헛.”

   
▲ 마쓰무라 선생으로부터 신전을 건네받는 일곱살 소년의 두려움은 상자 안에 있다고 생각한 신도 신이지만 무거우면 어찌할꼬하는 순수함이 더 커보인다. .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 하르방의 상상력은 이처럼 때로는 통쾌하고 후련하기까지 하다. 신전 속에서 귀신이 나올 때 큰 칼로 때리겠다던 용감한 일곱살 소년의 기억이나, 하르방의 출중한 그림 솜씨나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최근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역사도발과 각료들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를 통렬하게 비판하듯 가슴까지 후련해진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 하르방이 귀신 보다 무서워 한다는 할망(사진 왼쪽). 빨리 병원가자고 하르방을 재촉하시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 사진 오른쪽은 박장대소하고 있는 하르방의 딸.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그렇게 한참을 웃으며 이야기하는데 할망이 들어오셨다. 두 분이 함께 병원에 가려고 채비를 하고 기다리시는데, 하르방이 이야기 삼매경에 빠진 것을 보고는 버럭 화가 나신 것이다.
“허이고!! 차 대기허연(하고) 기다렴신디(기다리는데), 제게 나옵써(빨리 나와요), 쫌!”
“아니, 오 분만 더 이시크라(있을 거야).”
“이놈의 영감! 허이고, 오 분만 주맹기(주머니) 클러노민(풀어두면), 한도 끝도 어서(없지). 빨리 와 빨리! 병원에서 사람이 지돌렴수게(기다리잖아요)! 갔다 왕(와서) 나 밭이 강(밭에 가서) 일 할 거난(거니까), 시간 어서(없어). 제게 그릅써(빨리 가요), 쫌!!”
“아니, 이제 끝났댄 허난 게(끝났다니까). 딱 오 분!”
“아이고 촘말로게(정말로)!! 제게 나와 제게(빨리 나와, 빨리)!!!”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와, 옆에 있던 하르방의 따님이 웃음을 참지 못해 자지러졌다. 할망의 성화에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아쉽게 일어서는 하르방. 그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귀신도 그 누구도 아닌 ‘할망’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할망을 따라나서는 그의 어깨가 축 처진다. 시무룩한 얼굴로 나가려다가 잠시 뒤돌아서 씩 웃으며 내게 말씀하셨다. “이따가 또 와서 이야기 해줄게 이!”
그리고는 총총걸음으로 할망 뒤를 쫓아 나가시는 하르방.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나이 드신 어른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귀신보다 더 큰 칼을 찾아와서 귀신이 나오면 칼로 때려야지!’ 하며 신단 앞에서 두근두근 귀신을 기다렸을 일곱 살 꼬마의 모습과 나를 보며 씩 웃으시는 하르방의 현재의 모습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며, 그는 어른이 되면 큰 말을 타고 만주로 가서 일본군과 싸우는 군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중학생이 되니 4.3사건이 터졌고, 해방된 땅에서도 사람들은 부당하고 억울하게 죽어 갔다. ‘스스로 싸울 힘을 기르자’, ‘정의로워지자’, ‘열심히 내 땅에 농사를 짓자’, 하며 단순하게 농민으로 살아오신 하르방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세상은 점점 이해할 수 없이 더 잔혹해 졌고 더 부조리해져 갔다. 1960년대가 시작되고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을 보고 크게 화가 났고, 70~80년대에는 제주도의 땅이 농민의 손에서 권력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후로도 수없이 가진 것 없는 자가 약탈당하고, 죄도 없이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아온 그이다. 이 모든 시대의 변화를 겪으며 하르방은 늘 불끈했고, 곧장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러다 보니 무시무시한 곳에 잡혀가 열 번도 넘게 죽다가 살아나는 일도 겪었다. 단지 그가 너무나 옳고, 곧고, 정의로웠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말이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말한 두루봉이 하르방이지만, 사실 그는 나 같은 젊은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어른이다. 그런 그와의 만남을 가슴 설레는 기쁨으로 생각하면서도, 솔직히 내게는 그의 아프고 화가 났던 기억을 들추어낼 용기가 아직 없는 것일까? 그저 소심하게 하르방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 재미있는 이야기만 연거푸 묻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의도적으로 그의 즐거운 기억만 끄집어내려 노력을 해도,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슬프고 화났던 기억은 꼬리처럼 그를 졸졸 따라다닌다. 
 
슬픔과 기쁨이 나란히 공존하는 그의 화선지 속 이야기는, 언젠가 한라산을 오르며 정상 근처에서 내려다봤던 이 섬의 모습을 꼭 빼닮았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수십 개의 오름들을 유유히 품고 있는 제주의 능선처럼, 사람이 크면 그 안에 모든 것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산이 커서 그 한편에 터를 빌어 살아올 수 있었던 우리이거늘, 가끔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산의 작은 일부라는 사실을 잊는다. 하르방은 입버릇처럼 ‘인간은 시건방지면 안 되어’ 라는 말씀을 하시곤 하는데, 아마도 그 말이 정답이 아닌가 싶다. 어느 때 부턴가 우리가 너무 시건방지게 살다 보니 큰 그림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잔가지를 혹독히 잘라버린 커다란 기둥을 ‘역사’라 여기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르방의 많고 많은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토박이 제주 농민 두루봉이 하르방에게 오늘도 또 한 수 배운다.

▲ 하르방의 작품, ‘학교에서 집까지 귀신 모신 신전 운반’을 함께 보며 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 치매를 앓고 있는 팔순 노인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두루봉이 하르방의 기억력과 그림 솜씨는 경이롭고 유쾌하다. 초등학교 입학식날 교실로 향한 행렬에서 자신의 위치나 교실 짝꿍의 이름까지 꼼꼼하게 기록한 하르방의 그림은 담벼락에 아무렇게나 그려놓은 낙서 같지만 역사와 철학이 담겼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 하르방이 기억하는 초등학교 입학식은 마쓰무라 선생이 집에 가서 모셔 놓으라는 카미다나(神棚) 신전에서 시작된다. 신전운반에 얽힌 마쓰무라 선생의 훈시 내용을 하르방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사진=정신지  ⓒ 제주의소리

 마쓰무라 선생의 훈시가 끝난 후,
 귀가 시 가미다나를 모시고 가야 한다.
 집에 가면 벽장이나 통 궤 위에 올려놓고 절대 귀중히 한다.
 ‘젯다이 다이지니 스루고토다!’(절대 소중히 해야 한다)
 땅에 떨어뜨리면 ‘바찌오 아타룬다(벌을 받는다)’
 이 신전 속에는 ‘카미사마가 오루까라(신이 계시니까)’

마쓰무라 선생이 건네 준 신전은 아주 가벼웠다.
그러나 선생님 말은 엄했다.
신전을 모시고 집에 도착하여 일정 장소에 모실 때까지,
가는 도중 신전을 땅에 떨어뜨리거나,
눈높이보다 밑으로 내려서 들고 가면 안 된다는 엄명이다.

마구간에 와서 말을 바라보며 말 코등을 긁어주면
말이 조아서 크르릉 콧소리를 한다.
잠깐 귀신이 앉아있는 가벼운 상자가 한없이 궁금하다.

내일 학교에 다녀오면,
귀신이 들어있는 상자를 열어 볼 것이다.
귀신이 나올 때 칼로 때려야지.
어대서 귀신보다 더 큰 칼을 찾을 것인가?
내일은 귀신을 꼭 볼 것이다.

-<청수 아리랑 시리즈 제 1호>(2010) “나도 똥소로기처럼 날고 싶다”에서 발췌-<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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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매주 한차례 <제주의소리>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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