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위원회,15일 전체회의에서 보고서 확정·의결

제주도민의 한(恨)으로 응어리져 왔던 4.3의 진실이 마침내 정부에 의해 55년만에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고건 국무총리)는 15일 오후5시 정부종합청사에서 4.3위원회 8차 전체회의를 열고 4.3진상조사보고서를 최종 확정했다.

4.3 진상조사보고서는 지난7일 검토소위원회에서 수정안 심의를 통과한 직후부터 자유시민연대, 성우회 등 극우단체와 일보 보수언론에서 전체위원회가 열리는 15일 오전까지 집요한 방해공작을 시도, 한때 또다시 확정이 연기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감돌기도 했으나 이날 전체회의에서 1시간 30분간의 치열한 공방 끝에 오후6시 30분 최종 확정됐다.

오후 5시 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리자 당초 우려했던 대로 군·경을 비롯한 우익세력에서 제대로 된 논리도 갖추지 못한 채 보고서 확정을 유예시키기 위한 지연작전을 펼쳤다.

특히 우익을 대표하는 군 출신인 한광덕 전 국방대학원장, 이황우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 유재갑 경기대학교 통일안보복지전문대학원장 등이 지금까지 제출됐던 각종 자료들을 새로운 자료라고 우기며 회의진행을 의도적으로 방해해 위원들 간에 고함이 오고가기도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일방적인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위원회직을 사퇴하겠다"며 아예 협박조로 나오는 등 시종일관 이날 회의를 무력화시키려 했다.

이들이 이처럼 지연작전을 펼치자 강금실 법무부 장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김삼웅 전 대한매일 주필, 김정기 전 서원대학교 총장, 신용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그리고 박원순 조사보고서 작성기획단장 등이 고건 총리에게 정상적으로 회의를 진행시켜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특히 강금실 법무부 장관은 고건 총리를 향해 "지난번 회의때에서 이 같은 문제로 논란을 벌여 6개월 동안 유예하지 않았느냐"며 "계속 이처럼 지연작전을 펴는 것에 대해 법무부 장관으로 용납할 수 없다. 만장일치 합의가 안되면 표결로라도 하자"고 강력히 요구, 결국 고건 총리가 우익세력들의 지연작전을 물리치고 원안통과 방망이를 두들김으로써 회의시작 1시간 30분만에 마침내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다.

▲15일 열린 4.3위원회 전체회의(연합)

과거역사에 대한 최조의 정부 진상보고서

이날 최종 확정된 4.3진상조사보고서는 4.3특별법에 의해 작성된, 과거 사건에 대한 최초의 정부 진상조사보고서이자, 4.3사건 발생 55년만에 정부 차원에서 조사된 '4.3 종합보고서'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4.3진상조사보고서는 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피해 등을 종합적으로 다뤘으며, 인권침해 규명에 역점을 둬 4.3당시 발생한 대규모 인명 학살이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경종을 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대규모 인명 희생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 귀결됐다는 점에서 역사적 평가를 받은 만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날 확정된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의 4.3에 대해 다름과 같이 성격을 규명하고 있다.

▲제주 4.3항쟁 (1948.4.)(월간 사회와 사상, 1988년 12월호, 중간 사진) 제주도 4.3사건으로 강제 소개된 어린이와 부녀들, 노인들

이승만 "가혹하게 탄압하라"지시...미군정,"초토화작전은 성공한 작전" 평가

"미군정기에 제주도에서 시작된 제주4.3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으며, 집단 살상에 관한 책임은 당시 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군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명시, 4.3사건의 최종 책임자로 이승만 대통령과 그 배후인 미국을 지목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그 근거로 "이승만 1948년 11월 계엄령을 선포했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고 지시, 미군은 미군정 하에서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사령관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고,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한미군사협정에 의해 제주진압작전에 관여했는가 하면,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시켰던 9연대의 작전을 '성공한 작전'으로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4.3은 3,1절 발포사건과 남로당 5.10반대 단독투쟁 등 복합요인

4,3의 발발원인에 대해 진상조사보고서는 "발발 원인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제주사회에 긴장상황에 조성되고, 남로당 제주도당이 이러한 긴장상황을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보고서는 "이 과정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가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까지 살해한 점은 분명한 과오이다. 그리고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가 1948년 8월 해주대회에 참석, 인민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판단된다"며 남로당 제주도당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음을 지적했다.

4.3희생자 25,000~30,000명 추정…86.1%가 군경에 의해 희생

진상조사보고서는 4.3의 피해에 대해 "194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 진압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하였다. 강경 진압작전으로 많은 인명이 희생됐고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다.

9연대에 이어 제주도에 들어온 2년대도 제대로 된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즉결처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주민 집단총살 사건인 '북촌사건'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마을 주민 400명 가량이 2년대 군인들에 의해 총살당한 사건이다."라며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다양한 자료와 증언 등으로 제시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4.3당시 희생자는 "여러 자료와 인구변동 통계 등을 감안, 4..3사건 인명 피해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14,028명)의 가해별 통계는 토벌대 78.1%, 무장대 12.6%, 공란(空欄) 9%이나, 가해 표시를 하지 않은 공란을 제외해서 토벌대와 무장대에게 희생된 비율만 산출하면 86.1%와 13.9%로 대비돼 무장대에 의한 희생도 분명히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나 희생자 전체의 86.1%가 토벌대에 의해 희생됐다는 사실은 그 당시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참한 학살이 진행됐음을 여실히 입증했다.

4.3은 문명사회의 기본원칙이 무시된 중대한 인권유린

보고서는 또한 연좌제 문제도 지적했다. 보고서는 "연좌제에 의한 피해도 극심하였다.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4·3사건 때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희생자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활동을 제약받았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마지막으로 "1948년 제주섬에서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국제협약 같은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기본 원칙이 무시되었고, 특히 국가 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 살상 등 중대한 인권유린과 과오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4,3위원회는 이날 회의를 통해 "4.3진상조사보고서가 4.3특별법의 목적에 따라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어 작성되었고, 사건의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는 차후 새로운 사료나 증거나 나타나면 보완할 수 있다"는 내용을 보고서 서문에 넣기로 했다.

4.3위원회는 이날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됨에 따라 이를 근거로 7개항의 '대정부 건의안'을 마련, 관계부처에 이첨해 본격적으로 후속조치를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

대정부 7개 건의안 채택...후속조치 본격화

4.3위원회가 이날 정부에 공식 건의한 '대정부 건의안'은 ▲4.3피해와 관련해 제주도민과 사건 피해자에 대해 사과할 것 ▲정부 차원의 4.3사건 추모기념일을 제정할 것 ▲4.3진상조사보고서를 평화와 인권교육 자료로 활용할 것 ▲'4.3평화공원' 조성에 대해 정부가 적극 지원할 것 ▲생활이 어려운 유족에 대해 생계비를 지원할 것 ▲집단 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사업을 지원할 것 ▲진상규명 및 기념사업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할 것 등을 담고 있다.

수정의견 376건 중 33건 수정·첨삭

한편 4.3위원회는 지난 3월29일 7차 전체회의에서 '6개월 이내에 새로운 자료 및 증언이 나오면 수정할 수 있다'는 단서르 잘아 진상조사보고서를 조건부 의결한 후 지난 9월29일까지 20군데 기관·개인으로부터 376건의 수정의견이 접수, 지금까지 4차례 검토소위원 회의를 거쳐 모두 33건을 수정·첨삭했다고 밝혔다.

수정·첨삭된 내용은

▲ 1948년 11월 계엄령 선포 당시의 법령에는 국회 통고를 의무화하는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의무 조항으로 표현한 내용을 삭제.
▲ 국방경비법은 민간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데도, 이를 적용할 수 없다고 표현한 내용을 삭제.
▲ 1950년 한국전쟁 직후 미 대사관은 제주에서 무장대가 활동을 재개했다는 보고를 받자 시찰팀을 파견해 대책을 마련했다는 내용을 추가.
▲ 제2연대 선발대의 제주 도착 날짜를 수정하고, 2연대가 제주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날짜를 추가.
▲ 백조일손 희생자 시신 수습 날짜 수정
▲ [진상조사보고서 요약]을 [진상조사보고서 결론]으로 수정 등이다.

4.3위원회는 향후 계획으로 서문·화보·부록(4·3일지, 참고문헌, 특별법령, 찾아보기) 등을 보완해 11월말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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