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 그리하여 저는 오늘 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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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의 문학카페] 22 까뮈-그르니에 서한집

   

달이 뜨지 않는 밤은 습관처럼 시집을 읽는다. 시집 속에서도 달이, 별이 보이지 않는 밤은 편지를 읽는다. 누군가의 따뜻한 음성이 못내 그립기 때문이다. 천성 외로움을 타는 탓도 있겠지만 분명 지쳐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그럴 때 음악을 들으라고 하지만 아직 나는 말 없는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하기야 들리는 말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는데 하물며 말없는 말이야 오죽하랴. 

 까뮈-그르니에 서한집을 이틀 밤에 걸쳐 읽었다. 달도 뜨고 별도 보이는데, 마음엔 돌덩이가 들어앉았었나보다. 채한 듯 한기가 돌다가 열꽃이 피었다가, 며칠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잃었었다. 하지만 이제 돌 틈 사이로 시냇물 흐르는 소리 들린다. 나뭇잎같은 내 낯빛도 얼핏 스쳐지나간다. 작가도, 철학자도 아닌 인간 까뮈-그르니에가 주고받은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 덕분이다.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은 서른두 살의 그르니에와 열일곱 살의 카뮈가 사제지간으로 만나 약 30년간 나눈 편지모음이다. 까뮈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화영 교수가 번역해 내놓았다. 까뮈와 그르니에가 주고받은 편지는 235통, 까뮈가 일부 불사른 것도 있다고 하니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다. 만만치 않은 서신 교환이다. 물론 숫자로 말하지 못하는 소통과 정신적 교감은 그 무게를 헤아릴 수 없다. 편지를 읽다보면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라기 보다는 대등한 인간과 인간이 주고받은 내밀하고 진실한 신뢰와 애정의 소산물임을 알 수 있다. 참 존경스럽고 부러운 관계임에는 틀림없다.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은 편지이 내용은 집을 구해달라는 이야기에서부터 방금 쓴 작품을 보내면서 읽고 평해달라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 주제 또한 정치, 사랑, 부조리, 휴머니즘, 문학, 이상주의, 자본론, 여행, 유혹 등 넘나드는 폭이 자유롭다. 두 사람 다 글을 쓰고 철학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편지의 소재는 무궁무진하겠지만 그 대화의 형식 또한 이채롭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체는 서로 경어체에 가깝다. 그리고 대등하다. 어떤 날, 까뮈는 스승 그르니에에게 "나의 친구이신~"으로 편지를 시작한다. 스승 그르니에는 까뮈에게 주로 "친애하는~"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쓴다. 또한 문장에 묻어있는 존중과 존경의 마음, 그것은 누가 선생인지 제자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친애하는 까뮈,
 거의 하루 종일 어머니 곁에 붙어있는 바람에 답장이 늦었어요. 즉시 당신의 희곡을 다 읽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최고 수준이고 첫 버전으로 읽은『칼리굴라』보다 훨씬 낫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톤을 찾은 겁니다. 『오해』는 『이방인』과 마찬가지 의미에서 정말 알베르 까뮈의 것입니다. 주제는 아주 거대한 것이고 당신은 그 주제를 그것에 걸맞게, 그리고 동시에 절제하여 다루었어요. 그 절제가 바로 당신의 힘입니다."

 얼핏 스승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질질 짜는듯이 매번 제자 까뮈가 보내는 작품을 읽으면서 짜증이 날 법도 한데 그르니에의 답장은 언제나 성실하다. 예를 들면 이렇다.

 " 가장 성공적인 인물은 마르타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당신을 닮았고 당신을 거의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극은 그 인물을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고 그 인물에 의하여 의미를 얻고 있소. 내가 '거의'라고 한 것은 얀 또한 중요하고, 마르타가 마라라면 마리아는 비올렌인데 얀은 마리아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적절하게도 극 속에는 갈등과 동요가 있는 것입니다.
 악센트는 찌르는듯 비통합니다. 특별히 내 마음에 들었던 대목과 페이지에는 여백에 연필로 표시를 해봏았어요. 그러나 작품 전체가 내 마음에 들어요. 그렇지만 그 자체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어도 어쩐지 너무 웅변조이거나 극의 장면 자체보다는 오히려 책을 읽고 힌트를 얻은 것 같은 상징이 내포된 문장들에는 연필로 밑줄을 그어두었어요. (중략)

 이 얼마나 애정어리면서도 조심스러운 듯 날카로운 지적인가. 까뮈가 보낸 거의 모든 작품에 이처럼 친절한 평을 달고 있는 그르니에의 답신에 사뭇 고개가 숙여진다. 어쩌면 이런 그르니에이기에 까뮈는 그의 산문집 『섬에』이러한 눈부신 문장을 바쳤을 것이다.

 작품 속 책갈피...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적절한 시기에 스스로의 마음을 경도하고 스승을 얻고 그리하여 여러 해 여러 작품을 통하여 그 스승을 존경할 필요를 느꼈던 나 자신에게는 더 없이 좋은 행운이었다. 적어도 생애의 한 번은 저 열광에 찬 복종의 마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닌 게 아니라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지적사회가 자랑해마지않는 어정쩡한 진리들 중에는 저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원하는 저 흥분의 진리도 섞여 있다. 그 사회에서는 곧 우리들 자신 모두가 스승이고 노예가 되어 서로 죽이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러나 스승이라는 말은 다른 뜻도 지니고 있다. 그 의미로 인하여 스승과 제자는 오직 존경과 감사의 관계 속에 서로 마주 대하게 된다. 이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의 투쟁이 아니라 일단 시작하면 그 생명의 불이 꺼질 줄 모르며 서로 서로의 생애를 가득 채워줄 수 있는 대화인 것이다. 이 오랫동안에 걸친 교류는 예속이나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장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모방을 야기시킨다. 끝에 가서 제자가 스승을 떠나고 그의 독자적인 세계를 완성하게 될 때 실제 있어서 제자는 언제나 자신이 얻어가지기만 하였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지니면서 자신은 그 어느 것에도 보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스승은 흐믓해 한다. 이와 같이해서 여러 세대에 걸쳐 정신이 정신을 낳는 것이며 인간의 역사는 다행스럽게도 증오 못지 않게 찬미의 바탕 위에서도 건립되는 것이다 ····."

장 그르니에 『섬』에 쓴 까뮈의 서문 .

 서한집을 읽고 까뮈가 『섬』에 바친 서문을 다시 꺼내 읽으며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는 전율같은 것이 느껴진다. 스승과 제자 사이는 존경과 감사의 관계이며, 그 관계를 이끌어주는 건 생명있는 대화의 지속이다. 그리하여 결국 정신이 정신을 이으며 증오보다 찬미가 승리하는 역사가 이어지는 것이라고. 까뮈 자신은 스승 그르니에와 결국 그런 성공적인 관계를 이루었노라고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자랑이면 또 어쩌랴. 예속과 복종, 증오의 인간 본성을 스스로 극복해낸 아름다운 역사인 것을.

 5월 15일, 스승의 날이다. 별 의미 없이 다가오던 스승의 날이 어느 해부터인가 자꾸 되뇌어지게 된다. 철들어가는 탓이리라. 여기까지 내가 걸어오게 된 것은 어쩌면 나를 이끌어준 수많은 스승들이 있어서일 수 있다. 하지만 내 마음 안에서 진정 스승을 그려보고, 존경과 감사함을 진심으로 전해야겠다 생각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살다보니 어느날 문득, 산과 들이, 바람이 고맙구나 느끼는 것처럼 불현듯 찾아왔으니 그 마저도 감사할 일이지만 사실 부끄럽다. 감사함은 표현해야 상쇄되는 것이니 자주 뵙고 말씀도 들으려고 하나 가진 게 없으니 더 작아져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앞선다.

 가진 게 없다는 말은 스승이 가르침을 줄 때 나는 배움을 소홀히 하여 익히고 실천하는 게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부끄러울 수밖에. 하지만 까뮈의 말이 위로가 된다. "제자는 언제나 자신이 얻어가지기만 하였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지니면서 자신은 그 어느 것에도 보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스승은 흐믓해 한다."정말 그럴까?

 물론 그르니에는 흐뭇해했을 것이다. 제자가 노벨상도 타고, 유명한 작가가 되었으니, 늘 질문하고, 걱정하고, 함께하는 훌륭한 제자를 보며 어찌 흐뭇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까뮈는 아니지 않은가. 위로받으려고 떠올린 말이 오히려 자학을 부추긴다. 하지만 또 어떠랴.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모르고 있으니 더 가르쳐주십시오" 하고 스승에게 배짱있게 달려드는 도전은 오히려 새로운 관계의 단초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작은 지적에도 자기방어적 저항과 도피를 선택했던 부끄러운 제자의 모습으로부터 에프터 서비스를 강력하고 요구하는 당당한 제자로 돌아가보는 것은 어떨까. 인생의 새로운 국면이 펼쳐질 것만 같아 가슴 벅차오른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편지를 쓴다. 감사의 편지가 아니라 어제의 부끄러운 고백이며, 오늘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다짐이다. 그래서 다시 걸으며 나 자신 앞에 부끄럽지 않은 자유인이 돼보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편지다.

           

지상의 별꽃, 나의 스승 김종태 선생님께.


'반항하는 인간' 알베르 카뮈와 '따뜻한 회의주의자' 장 그르니에 서한집을 읽으면서 선생님을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이야말로 그르니에보다 더 따뜻한 회의주의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회의주의자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 제가 생각하는 선생님은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평소 보여주신 행동, 생각, 태도로 보아 인간의 의식은 주관적이며 상대적이기에 무엇이든 의심할 수 있으며 절대적 진리를 부정 혹은 궁극적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아니어도 괜찮구요. 제 요즘 모토가 ‘아니면 말고’입니다. 무례하더라도 용서하십시오. 건방떠는 거냐구요? 건방 떠는 겁니다. 이건 순전히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어법입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며칠 전 제게 ‘순응과 안온을 경계하라’는 지적, 많이 생각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까뮈의 표현대로라면 자발적 복종에의 노예가 되지말고 진정한 작가가 돼라는 뜻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지적이 있는 순간, 자기방어적 태도로 객기어린 반항과 자신을 던져버리는 식의 폭력성 발언이 있었습니다만 실은 나약함의 증거입니다. 지난해 초 선생님께서 발표하신 작품에 이런 싯귀가 있었습니다. .
“별빛과 달빛이 사라졌습니다. 의문과 탄식, 물음과 울음이 사라졌습니다. 햇빛 속에서, 불빛 속에서 2012년이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없이 서있는 i', 그래서 ‘헛꿈같은 힘없는 상징’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참 아프게 읽었던 싯귀입니다. 그 시를 읽고 저도 ‘i'처럼 멍하니 창 앞에 서있었더랬습니다. 눈 내리는 과수원 창가에 서 계셨던 선생님처럼요. ’차가운 거울 표면에 서있는 새‘처럼요...


선생님!.
‘i’가 뒤집어지면 ‘!’가 됩니다. 이건 언어적 유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 없는 상징’으로부터 ‘명징한 실재’가 되기 위해서는 의문과 탄식, 물음과 울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혹여하는 걱정으로 저를 질타하셨을 겁니다. 나태와 안일, 자만은 복종에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요. 시인으로서 복종은 노예의 삶이요, 치욕이라는 것을 압니다. 개인적으로는 치욕에 그칠지 몰라도 세계 앞에는 죽음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우겠지요.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파울첼란의 시처럼요..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그걸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참혹을 넘어 정말 섬뜩한 시입니다. 서커스 무대와 아우슈비츠가 오버랩되는 이 세계 앞에서 마른잎처럼 서서히 죽어가는 나를 봅니다. 공중에 무덤을 파다니요. 정신이 번쩍 납니다. 땅바닥에 발을 더욱 굳게 디뎌야겠습니다. .

사랑하는 선생님!.
선생님은 지상의 별꽃이십니다. 왜냐구요? 남의 신발 아래, 돌담 앞에, 개집 옆에, 무덤 뒤에 피어있으니까요. 세상사 상관 않는 척 하면서 남의 살림사 다 엿듣는 거 다 알고있습니다. 남들 말하기 전에 고개부터 끄덕이시잖아요. 새의 노래, 산의 울음, 돌의 침묵, 나무의 피, 모기의 영혼까지 그렇게 알아듣는 말이 많으니 그저 침묵할 수밖에요. 그러니 음악만이 유일한 친구겠지요. 선생님은 음악을 ‘보이지 않는 의미의 꽃, 말 없는 의미의 시’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서너시간 그 보이지 않는 꽃과 대화하는 선생님을 본적 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아무런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것에 절망하기도 했답니다. 의미 없는 것은 위로가 되지 않잖아요. 그런 제가 감히 위로가 되고 싶다 생각하다니...그것이야말로 건방떠는 일이라는 걸 이제 알았습니다.

선생님, 어떤 의미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다만 제가 정말 걱정되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선생님 뵐 때마다 자꾸 가슴 쓸어내리잖아요? 선생님께서는 담배때문이라고 하시지만 제가 보기엔 거대해진 가슴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 보시고, 말 없는 말까지 다 들으시면 가슴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내면의 확장이니, 삶과 죽음의 경계니 하는 말, 다 소용 없습니다. 가슴이 넘치면 어떻게 되나요? 그게 저는 제일 걱정입니다. 이제 이기적인 별꽃이 되셨으면 해요. 선생님은 그동안 별꽃같은 사랑을 누구에게든 공평히 나누어주셨으니 이젠 인세 받으면서 사셨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저도 이제 갚을 일만 남았습니다.

아, 선생님!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선생님의 나이는 딱 지금의 저만 하였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릴케를 가르쳐주셨지만 저는 하이네가 더 좋았습니다. "지금 이 세계가 추구하고 희망하는 것이 내 마음과는 아무 상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라고 말한 시인의 말이 더 현실감있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핑계삼아 강의실보다 진앙터에 앉아있는 날이 더 많았고, 밤새 공부하는 일은 없었지만 밤새 대자보 쓰는 일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교수님도 저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대학 축제 기간에 천막 주점 앞에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취한 모습으로 "강은미!"하고 크게 제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그 어떤 문학적 순간보다 짜릿하였습니다. 한 학기 독시 강의보다 더 짜릿한 전율감은 어둠 속에서 내 이름이 불리어지는 그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선생님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지상의 별꽃이 되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구요? 그건... 비밀입니다. 다음 이야기를 전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기다리고 기다리면...별볼일 없을 겁니다. (이건 순전히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어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역사는 계속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 저의 이름을 기억하고 제가 선생님의 정신을 기억하는 한 말입니다. 대신 무조건 건강하시기만을 빕니다. 걷기를 좋아하시는 선생님이시니 더러 안심은 됩니다만, 그래도 정말 건강하셔야 됩니다. 이쯤에서 콧방귀 뀌는 소리 들립니다. 알겠습니다. 저나 잘하겠습니다!.

말이 길어질수록 진실은 더욱 멀어질 것이니 이만 줄이고 물러가겠습니다. 나약함을 반항으로 전복하려했던 어제의 무례함에 용서를 빌며 이만 총총. 고맙습니다, 선생님.

2013년 5월 15일 제자 강은미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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