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근대건축 산책] (10) 일제 수탈의 흔적, 일본군 전적지
태평양전쟁과 ‘결7호’작전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제국주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시작은 1909년 한반도를 식민지화하여 중국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를 만들고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통해 중국대륙의 식민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서구의 패권주의에 맞서기 위해 아시아가 하나 되어 대응해야 한다는 이른바 ‘대동아공영’ 정책논리를 내세우며 1941년 12월 미국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1942년 미드웨이해전을 기점으로 전세(戰勢)는 미국이 주도권을 잡게 되고 1945년8월 종전(終戰)까지 시종 일본군은 수세상황에서 방어를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본토방어를 위해 예상되는 미국의 진격통로 7곳을 선정하여 1945년 2월에 방어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즉 7개의 진격예상통로별로 ‘결1호’ ‘결2호’등으로 작전암호명을 붙여 방아계획을 수립했는데, 제주도의 경우는 일본 규슈(九州)지방으로 지정학적으로 볼 때 미군이 제주도를 전초기지화 할 가능성을 고려하여 ‘결7호’작전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7번째 진격예상통로였던 것이다.
미군은 1945년 4월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펼치게 되었고 같은 해 6월까지 미군1만5천명, 일본군 6만5천명, 주민 12만명이 희생되었다. 오키나와 격전에서 일본군이 수적(數的), 물적 측면에 있어서 미군에 비해 압도적인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격렬하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오키나와 전지역을 요새화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오키나와에서의 격전이 제주에서 벌여졌다면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생각만하여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제주도는 동북아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어서 군요충지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7호’작전계획이 수립된 제주도의 경우에도 오키나와와 같이 요새화화기 위한 방어진지 구축이 이루어졌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제주도에는 일본군들이 주둔하면서 건설한 많은 군사시설물들이 있으며, 알뜨르 비행장, 동굴진지 등은 일본군이 구축한 군사시설물중 잘 알려진 대표적인 수탈의 장소이다.
알뜨르비행장의 장대한 풍경속에 담겨진 아픔
기본적으로 제주도에서 구축된 일본군의 전적지(戰迹地)는 두 가지 성격으로 구분된다. 1944년 이전까지는 대륙진출을 위한 전초기지구축과 1944년 이후에는 ‘결7호’작전이 수립이 되면서 본격적인 방어진지 구축이다.
중·일 전쟁을 앞두고 일본은 중국과 일본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제주도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데 1926년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 1089 알뜨르지역에 비행장건설을 추진하게 된다. 아랫마을이라는 의미의 알뜨르 지역은 송악산과 모슬포 사이에 위치하여 북쪽으로는 산방산, 단산, 모슬포 등 여럿의 작은 오름(작은 기생화산)이 어우러지고 남쪽으로는 바다가 보이는 멋들어진 풍광이 있는 장소이지만 지형적 특성상 비행장으로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은 함대후방을 총괄하는 4대 해군기지(진수부,鎭守府)를 두었는데 그중의 하나인 규슈(九州)지방 나가사끼현(長崎県)의 사세보(佐世保) 진수부가 제주도는 관할하였다. 사세보(佐世保) 진수부 아래에 진해요항부를 두어 관리하였다. 알뜨르 비행장 건설을 위해 진해요항부의 시설부인 진해경비부가 공사에 관여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37년 완공될 무렵에는 20만평 규모의 주요 항공기지가 구축되었고 1937년 중국 난징공습을 위해 나가사키현(長崎県) 오무라(大村)해군항공기지를 출발한 폭격기의 중간기착지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이후 알뜨르 비행장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오무라(大村)해군항공기지를 알뜨르 비행장으로 이전하게 되어 비행장규모는 40만평으로 확장되었다. 이곳에 주둔하였던 군인들은 해군항공대 2500명과 25기의 전투기가 배치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자료에 의하면 알뜨르 비행장의 활주로 크기는 대략 폭 70m 길이 1400m인 것으로 파악된다. 남북으로 활주로가 조성되었는데 바람의 영향과 해안조건을 활용하여 이착륙상의 안전 확보, 그리고 섯알오름을 활용한 방공진지 구축 등 지형지물을 이용한 최적의 군사기지 구축계획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활주로는 항공상에서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어서 알뜨르 비행장의 규모 등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최고의 일제 군사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격납고 규모는 205.7㎡로서 폭 18.7m, 높이 3.6m 길이 11m이며, 1기를 격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당시의 비행기는 일본의 대표적인 전투비행기인 제로전투기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알뜨르 비행장 한곳에는 당시 사용되었던 비행기의 모형전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1944년 일제강점 말기 일본은 제주도를 군사 기지화하고 일본 본토의 방어기지로 계획하여 병력 7만을 제주에 상주시켰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1944년 10월에 알뜨르비행장을 66만평정도로 확대하기 위한 공사계획을 수립하여 사령실, 탄약고, 연료고 등 군사시설을 지하벙커에 옮기고 격납고 은폐를 위한 작업을 추진하게 된다.
시설관리에 관여하였던 진해요항부의 시설부 진해경비부가 파견됐지만 부족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제주도민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대정읍 지역의 주민들도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건설에 동원되어 갖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비행장을 건설하였던 당시에는 주변에 고사포대와 포 진지 4개를 설치하였고 주변 오름과 해안에도 수많은 굴을 파서 요새화하였다.
알뜨르 비행장은 주민의 생존터였던 것을 정상적인 보상 없이 몰수하여 주민을 동원하여 만든 식민지 지배의 전형적인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이후 원소유자에게 정상적인 매매 혹은 반환조치되지 않고 군소유로 이전되어, 현재는 공군 관리지역으로 비상 활주로로 사용되고 있으나 경작지로 활용되고 있는 상태이다. 현재 격납고는 총 20개소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남아있으며 등록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알뜨르 비행장을 비롯한 주변 일대지역은 일제식민지하의 수탈의 상징으로서 건축물이 가지는 의미뿐만 아니라, 격납고 및 비행장 주변이 태평양전쟁 때 일본이 결사항전을 위해 구축한 대규모 침탈의 장소라는 점, 그리고 인접한 지점에 4․3사건, 6․25사변 당시 제1훈련소의 흔적지가 있는 등 한국근대사의 아픈 상처들이 남아 있는 역사의 층(層)이 축척되어 있는 대표적인 근현대사의 장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김태일 제주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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