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근대건축 산책] (12) 일제 치하, 식민 발판으로…제주의 공장들

근현대를 가로지르는 열쇳말 중 핵심은 산업화, 공업화, 도시화로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공업화’는 단연 근대화를 뒷받침하는 수단이다. 근대의 공업화는 가내수공업 형태로 운영해오던 소규모에서 근대에 접어들면서 대규모 공장의 모습을 띤다. 대량 생산으로 돈을 벌어들이고, 사람을 모여들게 하고, 도시를 키우는 양상은 동-서양 할 것 없이 마찬가지다. 1883년 인천 제물포를 개항하며 우리나라의 공업화에도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는데 이는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끈 상징인 동시에 우리 민족의 치욕과 굴욕을 드러내는 단면이기도 하다.

일제는 러일전쟁 전후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해 자국의 어민 이주 정책을 시행하며 조선으로의 이주를 장려했다. 제주에는 1870년대 일본 잠수기업자들이 들어와 공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대부분 풍부한 해산물을 원료로 취급하는 가공공장으로 주로 도내 주요항구와 가까운 지역이라는 입지 조건이 공통점이다.

특히 일본 자본가들은 특히 남서부와 북서부지역에 수산물 가공공장을 지었다. 성산포는 일본잠수기업자 본거지로 꼽히는데 1906년 일본인 이시하라 등이 한국물산주식회사를 설립해 요드 제조 공장을 운영했다. 모슬포도 일찍이 옹기, 전분공장, 통조림 공장 등의 산업벨트가 형성된 산업단지로 대정흥업 당면공장을 비롯해 모슬포 상공업의 중심상점이던 협창상회, 통조림공장인 대해식품 등이 있었다.  

1929년부터 벌어진 세계대공황에 서양 열강에 비해 취약했던 일본은 훨씬 더 휘청댔다. 이에 극복하려는 타계책으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자국의 독점자본에게 유리한 투자시장을 확보하는 한편 만주지방을 효율적으로 지배 수탈하기 위해 조선에 공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1920년대 후반 수력발전 개발 등 공업화의 기초작업을 진행한 가운데 일본 주요 재벌을 진출시켰다.

제주에는 1925년 설립된 제주전기주식회사 한 곳만이 성내에 전등 전력을 공급하고 있을 뿐 따로 동력용 전력은 수급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서귀포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결수난을 겪고 있어 골치를 앓았던 데다가 공업 자금을 융통할 금융도 성내 척식은행 지점과 금융조합 정도여서 공업이 발전하기는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 통조림 공장인 유창산업 내부에서 작업하는 광경을 찍은 1969년 사진이다. 유창산업은 제주시 삼도2동의 바닷가 즉 현재 매립지에 들어선 라마다호텔의 바로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국가기록원).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 발췌.

때문에 일본에서 건너온 일제 자본가들에 의한 공장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 중 가장 큰 곳이었던 한림읍 옹포리 다케나카(竹中) 통조림 제조소 제주분공장과 협재리의 오오타(太田) 통조림 공장 등이다.

조선총독부 촉탁인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가 1929년 간행한 ‘제주도생활상태조사’에 따르면 1926년 제주에는 양말, 갓 제조, 어패류나 축우를 원료로 하는 통조림 제조, 해조류를 원료로 하는 조제옥도 공업, 조개 단추 제조, 소주양조업 등의 공장이 생겨났다. 제주의 자원을 개발하려고 들어온 일본기업가의 투자와 토종 자본으로 세워진 곳들이다. 1929년 한 해 생산액이 5천원 이상인 곳을 세어보니 총 36곳이었는데 그 중 가장 많은 곳은 통조림 공장으로 총 9곳에 달했다.

당시 한림은 서귀포, 성산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도내 가장 큰 항구였다. 예부터 배가 드나들기 좋은 항구로 일제도 항구는 물론 경제적 교역항으로 충분한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뿐만 아니라 1912년 해안마을을 잇는 우회도로가 개설되면서 제주 북서부지역의 중심지로 떠오른 데다 1920년대 우체국(1923년)과 근대식 병원(1925년)이 차례로 들어서는 등 시가지 못지않은 형태를 띠게 됐다.

특히 다케나카 공장은 본점은 교토(京都)로 서울과 부산에 사무소를 둔 최고 규모의 공장이었다. 옹포의 공장은 다케나카 신타로(竹中 新太郞)가 1929년에 설립했으며 제주 말고도 나주, 마산, 청진, 울릉도 등에 공장을 세웠다.

이 통조림 공장은 어패류뿐 아니라 쇠고기, 완두콩, 고등어 등을 통조림으로 만들었다. 당시 다케나카 통조림 공장 1년 생산고는 제주지역 총 생산량의 1/4에 달하는 8655상자(12만755원)에 달했으며 생산품 일부는 오사카로 반출돼 군수품으로 팔렸다.

다케나카 통조림 공장은 도내에선 유일하게 발동기를 돌려 공장을 가동했을 정도로 여느 공장을 합친 것보다 뛰어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석유기관 19마력 3대, 증기기관 2대 등의 설비에 노동자수는 44명(일본인 8명)을 두고 운영됐다.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던 일제는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며 대놓고 야욕을 드러냈다. 조선은 물론 식민지 곳곳에서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해 전쟁에 쓰겠다는 속셈이었다. 같은해 중일전쟁을 치르고 일제는 제주에서 만들어진 공산품을 군수품으로 공출했다.

일제는 제주 섬을 전진기지로 삼아 쥐락펴락했는데 다케나카 공장도 이에 맞춰 군수공장으로 운영이 이뤄졌다. 여느 공장이 소라나 전복 정도나 취급하던 것고 달리 맛고도리, 어단야채볶음, 어단톳, 맛고등어, 어단, 오징어야채, 소라 등 가공해 군수품을 댔다.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자 공장의 움직임도 더욱 긴박해졌다. 1945년 6월 제주도 부근의 해역은 미 연합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제주 섬 주요 군사시설에 대한 미 공군의 폭격이 가해졌다. 4월 14일에는 일본 해군 함정 3척이 한림항 부근에서 미군 잠수함과 폭격기의 공격에 침몰됐다. 8·15 해방 후에는 일본인 창업주가 물러가고 한국인이 공장장에 취임했고 1950년부터는 대동식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4·3 당시에는 민간인들이 여러 달 동안 힘든 겨울을 났던 민간수용소였다.

이 기사는 진관훈 박사 '근대제주의 경제변동', 우에다 코이치로 '제주도의 경제', 정호승, 김남일 저 '분단의 경계를 허무는 두 자이니치의 망향가', 제주도 북제주군 발행 '북제주군지(2000)', 제주도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 보고서 등을 참고해 작성됐습니다. <제주의소리>

<김태연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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