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의 숨, 쉼] 21세기형 제주 여성을 생각하며

난 제주여성으로 거의 반백년을 살아왔다.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주변에 바닷물처럼 모래알처럼 많은 제주여성 가운데 한명이었다.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제주도에서 유학 온 여학생‘ 으로 조금 주목받긴 했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제주 여성이라는 특별한 자각이 친구들은 물론이고 나조차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고향에 돌아와 일간지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야 ‘강한 제주 여성’ 과 만날 수 있었다.  ‘제주 여성은 강하다’는 명제에 아무도 딴죽을 걸 수 없었다. 신문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면 가릴 것 없이 모든 기사에서 제주 여성이 언급되기만 하면 자동으로 ‘강한 ’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여러 역사 문화유산 속에서 강한 제주 여성을 증명해줄 여러 자료들이 제시됐고, 또 새로운 자료를 찾는 일들이 빨라졌다. 쇠를 먹는 불가사리처럼 제주 사회의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얻은 강한 제주여성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 강요배 화백이 그린 '자청비'. <제주의소리DB>

그 즈음 난 자청비를 만났다. 추석 특집 기사를 쓰기위한 자료를 찾다 만난 자청비는 내겐 엄청난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제주 여성의 원형'
스스로 청해 태어났다는 뜻을 가진 이름처럼 자기 의지가 강한  자청비는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헤쳐 나가 여러 과정을 거쳐 농경신으로 좌정한다.
자청비는 사랑하는 문도령을 만나기 위해 남장하는 파격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의 여신이고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삶의 문제들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지혜의 여신이다. 당시 나는 완벽하고 멋진 자청비를 '강한 제주여성의 원형'으로 생각했다. 강한 제주여성이란 말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미덕과 원칙들이 다 녹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살아갈수록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강한 제주여성이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나름 확고하게 뜻을 세우고 한 길로 정진하는 삶을 살고자 했으나 (자청비 처럼) 생각처럼 삶은 만만하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본 나의 삶은 비루해보였고 (자청비 처럼) 사랑과 지혜가 어우러진 삶을 살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문득 문득 빠져들곤 했다.

나는 나의 길을 열심히 가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가다보니 삶의 길은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었다. 지구촌을 살아가는 사람들 수만큼이나 많은 조건, 환경, 구조들이 얽혀 있었다. ‘굳센 의지로 산이 있으면 넘어서 가고, 바다 깊으면 건너서 가지’가 아니었다. '어떻게 넘는가'가 중요하고 때론 빙 돌아가는 게 더 나을 수 있는 것이  삶이었다. 혼란스러웠고 화가 났다. 두렵기도 했다. 늘 내가 못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괴감에서 나를 구해준건 제주 할망들의 보석 같은 한마디였다.

"살당 보민 살아진다"

그래, 살다보면 살 수 있는 거야. 앞이 까마득하고 두렵지만 삶에 정답은 없어. 잘못된 모든 상황이 내 책임만은 아니야. 빛나고 멋지지 않더라도 나는 매순간 최선을 다했어. 그러니 난 행복해도 돼.

‘살당 보민 살아진다'라는 치유와 위로의 도움으로 나는 내 삶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던 '강한 제주 여성'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던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혹시 강한 제주여성은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에 대한 극약 처방이 아니었을까?
척박한 섬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급박했던 시절, 많은 것을 잘 참아낸 여성들에게 선물로 ‘강한 여성’이란 찬사를 준 건 아닐까 ?
똑같이 힘든 시대를 견뎌내야 하는데도 왜 강한 제주남성이란 말은 없는 걸까.
강한 여성이 아니라 상황이 그래서 강한 여성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강한 여성의 모범 사례로 기록된 분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어떤 답이 나올까.
왜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제주 여성 앞에 강한이란 수식어가 붙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 찾기는 나에겐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왜 그런 것을 고민 하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나도 이해가 안가니까. 왜 이런 걸 고민해야 하는지.)

자청비보다 주목받지 못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제주신화 캐릭터 중에 '허웅아기'가 있다. 허웅아기는 살림을 아주 잘해서 그 소문이 염라대왕에게까지 들어간다. 염라대왕은 차사에게 허웅아기를 데려 오라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기 싫은 허웅아기는 가족에게 도움을 부탁하지만 부모도 할아버지도 거절한다. 다만 언니만 이렇게 대답한다.
"애고 불쌍한 내 동생아/열두 폭 치마 한 벌 뿐이로구나/이것으로 걸어보아라"
언니가 인정을 걸어준 덕으로 허웅아기는 차사와 협상을 해 낮에는 저승에서 일하고 밤에는 집으로 와 아이를 돌본다. (이후 이야기나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의미가 궁금하면 더 자료를 찾아보시라. 여기서 그 얘기를 하기엔 너무 길다.) 

<진성기/ 제주민속연구소 신화와 전설 허웅아기 편에서>

여기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허웅아기가 협상을 하는 것이다. 허웅아기는 힘을 가진 차사와 정면승부하기 보다 협상을 시도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래서 언니의 도움을 얻는다. 언니의 열두 폭 치마가 상황을 완전히 돌려놓진 못했지만 적어도 차사와의 대화를 여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허웅아기는 차사에게 충분히 자신이 없으면 아이들이 제대로 크기 어려운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해 낮에는 저승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조건을 얻는데 성공한다.

허웅아기가 협상을 하는 것에서 난 유연한 지혜의 덕목을 본다. 승부가 분명한 대결에서 굳은 의지 하나로 승부수를 두기보다 대화와 설득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 그것이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서 더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면 앞으로 다가올 세계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오랜 시간 당연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순식간에 변해가는 세계다. 우리는 이미 그 변화를 조금씩 맛보고 있다.

그래서 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제주여성 앞에 붙일 수식어를 우리가 다시 찾아 나가면 어떨까?
정신없이 휙휙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어쩌면 더 유용한 덕목은 무조건 '강한'이란 수식어보다 지혜 유연함 행복.. 뭐 이런 것들이 아닐까.
강한 여성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하고 있으니 그에 맞는 다른 덕목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 프레다 미리클리스 세계BPW 회장의 2013 제주포럼 기조강연 장면. <제주의소리DB>

지난달 말에 열린 제주포럼의 주요 발표자인 프레다 미리클리스(Freda Miriklis) 세계전문직여성연맹(BPW) 회장은 끊임없이 세 가지를 얘기했다.

해녀 김만덕 제주 여신.

지지난 일요일 나는 비자림을 걸으면서 프레다회장과 잠깐이나마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난 제주 BPW 회원이다)를 가졌는데 그때 알았다. 프레다 회장이 진심으로 해녀 김만덕 제주여신에게 깊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그러면 우리는 그녀에게 어떤 내용을 전달해주어야 할까?
여전히 강인한 제주여성을 얘기해야 하는가.
이번 기회에 우리가 제주여성의 원형을 잘 정리해 끊임없이 정보를 주면 '세계연맹'이라는 조직의 힘을 통해 순식간에 제주여성을 알려나갈 수 있지 않을까.

정리해보면  제주여성은 강할 수도 있지만 강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이제는 강한 제주 여성을 의무가 아닌 선택의 문제로 풀어주자.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할 제주 여성의 원형과 덕목을 고민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내가 이 칼럼을 통해 숱하게 밝힌 것처럼 난 학자도 언론인도 아니다. 다만 살아가는 일에 남들보다 조금 관심이 많은 정도. 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아직도 고민하는 부족한 사람이다.  그러나 단 하나 자신 있는 것은 고민에 대한 진정성이다. 난 진정성을 갖고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 바람섬(홍경희). ⓒ제주의소리

제주 여성의 원형, 제주 여성의 덕목을 변화하는 세계에 발맞춰 다시 고민하고 정리해보자는 것, 이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혹시 누군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바람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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