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근대건축 산책] (14) 제주4·3 관련유적과 그 의미 上

#. 들어가며
제주의 1940년대부터 50년대는 혼란의 시기였으며 동시에 근대화로 가는 변혁의 시기였다. 제주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4․3사건으로 인하여 소개령이 내려진 소실된 중산간 마을을 비롯하여 관련 유적이 제주도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4․3연구소를 중심으로 유적발굴과 함께 관련 자료들이 정리되기도 하였으나 65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 유적 및 건조물들은 차츰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경우회의 화해로 4․3유족회의 현충일 충혼묘지 참배 등이 이루어지면서 오랜 이념적 갈등을 미래사회를 위한 새로운 변화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제주사회의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4․3사건이 남긴 관련 흔적들은 평화교육의 자원뿐만 아니라 다크투어리즘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의미 있는 근대문화자원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는 제주도와 제주4․3연구소가 발간한 <4․3사건 유적Ⅰ․Ⅱ>보고서를 토대로 유적의 분포상의 특징을 살펴보고 아울러 4․3사건 발생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근대유적중의 하나인 전략촌(일명 4․3성)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4․3사건과 관련된 주요 유적분포현황
 <제주4․3유적 종합정비 및 유해 발굴 기본계획>에 따르면 행정구역별 4․3사건과 관련하여 조사된 행정구역별 마을수 전체 162개 마을 중에 120개 마을이 조사되었고(표1), 유적자원들을 잃어버린 마을, 성, 은신처, 학살터, 주둔지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표2).

 

▲ 조사 마을수(인용=제주4․3유적 종합정비 및 유해발굴 기본계획).

 

▲ 유적의 분포현황(인용=제주4․3유적 종합정비 및 유해발굴 기본계획).

3. 4․3사건 관련유적의 분포 및 근대자원 활용의 역사적 의미

 제주도와 제주4․3연구소가 발간한 <4․3사건 유적Ⅰ(제주시,북제주군)>, <4․3사건 유적Ⅱ(서귀포시,남제주군)>보고서 자료를 활용하여 관련유적의 분포를 살펴본 결과 산남과 산북에 걸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4․3사건이 특정지역에 한정되어 집중적으로 사건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제주도 전지역에 걸쳐 다양하고 복잡하게 사건이 발생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4․3사건 유적 전체분포현황.

 

각 항목 중 잃어버린 마을, 성, 은신처, 학살터, 그리고 주둔지 등 주요 유적에 대한 설명과 분포현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잃어버린 마을
조사보고서에서는 잃어버린 마을에 대한 범위는 1948년 11월 이후, 중산간 마을이 토벌대에 의해 전소된 후 현재까지 복구되지 않은 마을로 정의 하고 있다. 분포 현황을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제주시를 중심으로 산북에 분포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중산간의 깊은 지역보다는 200m에 인접한 지역의 마을들이 집중적으로 소개령에 의해 주민들이 소개되고 마을이 소실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토벌대에 의해 무장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효율적인 무장대의 토벌을 위한 것이로 보인다.

1960년대 들어 5․16군사정부는 4․3사건으로 불에 타 사라진 마을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정책적으로 4․3원주민 주민복귀사업을 추진한다. 중산간 일대에 개척사업이나 5․16도로건설 등 다양한 개발사업도 추진하게 된다.

▲ 토벌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산간 주민모습(인용=별자치도(2009),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도서출판 각)

 

▲ 잃어버린 영남리 옛터(인용=제주특별자치도(2009),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도서출판 각)

 

▲ 토벌대에 의한 전소된 잃어버린마을 분포.

(2)성(城)
1948년 12월 이후 무장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을주민을 동원하여 마을주변을 따라 성(城)을 축조하였는데 아직까지 현존하는 성(城)을 의미하며 4․3성(城)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전략촌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城)의 분포를 보면, 애월읍과 한림읍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이들 지역에 무장대의 마을습격이 비교적 빈번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그에 따른 충돌과 희생이 많았으리라고 추측된다.

▲ 무장대 침입을 막기 위해 구축한 성(城)분포.

(3)은신처 및 희생터, 주둔지
4․3사건 발생 기간 동안 주민들은 토벌대와 무장대의 사이 놓인 불안한 상태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주민들은 토벌대와 무장대에 쫓겨 동굴과 산속에 피신해야만 했다. 은신처의 분포를 보면, 전반적으로 중산간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경향이다. 특히  동쪽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앞서 언급하였던 성(城)의 분포 경향이 중산간지역이면서도 비교적 서쪽에 집중하고 있는 것과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은신과 방어하기 위해  축성을 하였던 서쪽과는 달리 이에 충분한 은신처를 확보하지 못하였던 동쪽은 지형적으로 오름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고 동굴과 같은 공간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은신이 많았으리라 추측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92년 4월2일 발굴된 4․3사건관련의 11구 유골과 유품들이 발굴된 다랑쉬오름의 동굴이다. 동굴내부에서 발굴된 유골의 상태와 유품들을 통해 당시의 긴박함과 어려웠던 은신생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 은신처의 분포.
▲ 다랑쉬 오름의 동굴에서 은신처 내부평면. (인용=(사)제주민예총4․3사업단(1999), 다랑쉬굴의 슬픈노래·도서출판 각)
▲ 은신처로 사용하였던 다랑쉬 오름의 동굴내부에서 발굴된 무쇠솥. 오랫동안 은신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취사도구를 중빈한 것으로 추측된다.(인용=(사)제주민예총4․3사업단(1999), 다랑쉬굴의 슬픈노래·도서출판 각)

반면 토벌대와 무장대에 의해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희생된 장소는 산남과 산북에 걸쳐 고르게 분포하고 있는데 특히 서쪽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고 해안지역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흥미 있는 것은 군인, 경찰 혹은 서북청년단 등이 주둔하였던 지역의 분포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주둔지에 인접한 마을의 주민들이 많은 희생이 되었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희생터와 주둔지의 분포.
▲ 제주농업학교에 주둔한 보병 제2연대(인용=제주특별자치도(2009),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도서출판 각)

실제로 1948년 12월29일 제주 주둔군이 제9연대에서 대전에 주둔하였던 제2연대로 바귀게 되었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강경진압에 나서게 되는데 특히 폭도로 찍힌 지역에는 무조건 사살하는 작전을 펼치면서 북촌주민 집단학살사건 등이 발생했다. /김태일 제주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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