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주의 책놀이책 Q&A] (9) 슬픈 장면을 잘 못 견디는 아이 

# 에피소드9.

내가 낳은 아이지만 정말 속을 모르겠다.
『맹꽁이 서당』을 20번도 넘게 읽었으면서 민수는 30점을 주었다.
“ 민수야, 너 『맹꽁이 서당』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 싫어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림이 예쁘지 않고, 연결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민수에게 나름의 기준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의 취향은 물론, 예상과 자꾸만 엇나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민수에게 내가 100점으로 고른 책을 보여 주었더니 민수는 볼펜으로 찍찍 줄을 그으면서 푸념을 한다.
“ 『강아지똥』한테 왜 100점을 주는 거야? 난 이거 별로야! 『종이밥』은 또 왜 100점이야? 난 슬퍼서 재미없어!”
내가 높은 점수를 준 책은 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툴툴거리더니 일어나서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갔다. 나름대로 민수의 눈높이를 맞추려고
고민을 거듭해서 선정한 책들인데 민수의 반응을 보니 섭섭한 마음이 든다.

▲ 그림 김라연(blog.naver.com/gomgomHUG).

동화책의 비밀

동화책은 리얼리즘이 생명이다. “요정도 나오고 괴물도 나오는데 웬 리얼리즘?” 하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지만 ‘리얼리즘’은 한마디로 “이게 진짜 세상이고 진짜 인생”이라는 진실을 말해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동화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 왜곡된 부분이 무척 크다. 예컨대 ‘백설공주’ 같은 유명한 작품이 많이 담겨 있는 ‘그림 형제 동화책’의 경우 원작은 어린이에게 보여주기 무서울 정도로 잔인한 장면이나 슬픈 장면들이 많다. 그림 형제는 독일이 자랑하는 언어학자이자 사전편찬자였다.

형제는 독일의 정체성을 오롯이 모아내기 위해서 흘러 다니는 옛 이야기를 집대성해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 모음>을 편찬하였고, 아울러 독일어 사전을 편찬했다. 작품집에는 200여 개의 동화가 소개되었는데, 제목과 같이 어린이만을 위한 작품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읽는 것이 '동화'의 진면모다. 때문에 독일에서는 '동화읽기 방법론'이 크게 발달돼 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점이 크다. 요컨대 동화책을 읽는 아이들도 ‘세상 물정’을 알 만한 나이이기 때문에 현실의 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리얼’한 동화를 읽어주되 부모의 지도를 곁들이라는 취지다. 바로 이것이 동화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상을 돌아보자.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것, 예쁜 것’만 보여주려고 한다. 슬픈 감정과 기쁜 감정은 같은 곳에서 나오지만, 한 쪽 측면만 자극하는 동화를 지속적으로 읽으면 민수처럼 슬픈 이야기를 못 견뎌 하는 아이들이 많이 생기기도 한다. 어떤 이야기든 부모가 막을 권리는 없다. 다만 이야기의 의미가 잘 전달되기 위해서 지도와 설명을 통해서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 솔루션9.

“ 민수야, 엄마랑 100점 놀이하자!”
“ 저번에 했잖아?”
“ 엄마 소원인데? 이번에는 엄마가 할 거야. 민수는 듣기만 해.”
이렇게 말하면서 『종이밥』을 살짝 꺼냈다. 민수는 재미없는 책이라며 안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엄마의 소원이라니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100점 놀이를 이어가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 엄마가 『종이밥』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골라 볼게. 그걸 보고 민수가 점수를 매겨 주면 좋겠는데? 민수가 엄마를 채점하는 거야!”
“ 그럼, 100점짜리 하나만 고를 거야. 0점부터 100점까지 다 고르는 거 귀찮으니까.”
“ 그래, 민수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민수의 얼굴은 여전히 불만으로 가득했지만 어쨌든 놀이를 시작했으니까 만족하기로 했다. 내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민수의 표정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유난히 눈살을 찌푸렸는데 가만히 보니 슬픈 장면이 묘사되는 부근이었다. 어릴 때부터 민수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장가를 부를 때 ‘섬집 아이’는 부르지 말라고 하거나 아빠가 출근할 때에는 너무나 서럽게 울어서 난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민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페이지를 넘기다가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여동생을
절에 보내고 나서 오빠가 종이를 씹어 먹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 엄마, 난 이 책이 싫어. 너무 슬프잖아.”

이 그림은 나를 몇 번이나 울렸던 장면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그리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중 대부분을 포기하면서 살아야 했다. 『종이밥』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감동했는데, 민수가 이 책을 거부해서 내심 섭섭했다. 민수도 이 책을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왜 그러지 않는 걸까?

“ 엄마, 왜 아무 말도 안 해?”
“ 엄마도 꼬마일 때, 『종이밥』에 나오는 오빠처럼 힘들었어. 민수는 몰랐지? 엄마도 동생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동생이 친척 집에 간다고 하니까 너무 속상했었어. 민수도 동생이 밉지? 그래도 잘해 줘. 엄마처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 알았어. 태수가 미워도 귀엽기는 해. 엄마, 내가 100점 줄 게.”

나는 민수를 꼭 안아 주었다. 민수는 말없이 내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민수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서 시작한 책 놀이였고, 100점 놀이였지만 오히려 내 안에 있던 응어리가 많이 풀어진 기분이었다.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겠지만, 책 놀이를 통해 민수랑 앞으로 더 많은 추억을 쌓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그림 김라연(blog.naver.com/gomgomHUG).

진심으로 다가가기

진심은 통한다. 그것은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세 살, 다섯 살 두 아들을 기르고 있는 아빠인데, 첫째의 출산이 임박할 즈음 강원도 원주에서 동화 작가님을 만났는데, 그 분은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계셨다. 요령을 여쭤봤더니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도록” 읽어주는 게 좋다고 한다.

그때부터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려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 고민을 했다. 부모가 이야기에 몰입하고 마음을 다해 들려주면 등줄기에 땀은 아니더라도 아이 마음에 닿을 수는 있을 것이다. 민수 엄마는 민수가 슬픈 이야기를 못 견뎌 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슬픈 『종이밥』을 읽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민수에게 엄마의 진심이 전해졌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이 바로 휴머니즘의 힘이다.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예쁜 이야기, 즐겁게 끝나는 이야기만 골라주는 마음은 사실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다가가는 것이다.

머리로 다가가면 휴머니즘이 생기지 않는다. 아이에게 책을 골라줄 때는 이야기의 완성도 정도만 기준으로 삼아도 충분하다. 슬프거나 무서운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저 자극적이기만 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 가지 무척 중요한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방금 길가에서 마주친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다가갈 필요도 없지만 진심으로 다가갈 수도 없다. 하지만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은 다르다. 마음이 가기 전에 이미 몸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부모가 마음만 잘 먹으면 언제든지 아이에게 진심이 통할 수 있다. 부모의 진심을 확인한 아이는 거기서 커다란 사랑을 느끼게 된다. 당장은 그 느낌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때의 장면이 가슴속에 커다란 감동으로 남아 있게 된다. 아이는 이것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고 잊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게 진심의 힘이다.

모든 부모님이 진심으로 다가가는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겠지만, 굳이 한 가지 경험을 소개할까 한다. 2년 전 여름에 일본에서 네 살배기(지금은 여섯 살) 조카가 엄마와 우리 집에서 묵은 적이 있었다. 조카는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마다 울면서 엄마를 깨웠다. 필자도 조카 우는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어느 날 필자는 우는 조카를 안고 창가로 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마땅치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빌었다. ‘조카가 하루라도 편안하게 잠을 잤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창을 통해서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방금까지 울던 조카가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필자는 옆에 있는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주었다. 조카는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이 경험담이 아이와의 관계를 막막해 하는 부모님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미 부모와 자식 간의 깊은 사랑이 있기에 마음만 잘 쓰면 되는 것이다. 부모의 진심과 사랑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오승주 독서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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