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경제 희망찾기(2)] 들꽃농장 대표 오영덕
마음 비우고 성실 담아낸 ‘항아리콩나물’

▲ 들꽃농장 오영덕 대표는 마음을 비우는 대신 콩나물을 담아내고 있다.
지속적인 경기침체, 나아지지 않는 주머니 사정,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만은 없는 일. 그러나 이것저것 해봐도 뜻대로 되지 않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다. 모두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바로 지금 필요한 것이 ‘생각을 바꾸는 일.’
다른 시각으로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는 세상, 그 세상에서 살기 위해 문명의 이기를 훌훌 털어버리고 무작정 ‘촌’으로 이사, 어설픈 농사일과 수차례의 실패 끝에 지금의 ‘항아리콩나물’을 개발해 성공한 들꽃농장 오영덕 사장(40).

# 생각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

“생각을 달리하니 모든 게 새로웠다”는 오 사장은 젊은 나이에 제주만의 특색을 살린 ‘항아리 콩나물’이라는 브랜드로 성공의 초석을 다져나가고 있는 젊은 농사꾼이다. 기자가 오 사장을 만나기 위해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금악리 이시돌목장 일대의 그야말로 ‘촌구석’이었다. ‘소나 키우는 목장지대에 무슨 항아리콩나물을 키운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곳에서 성공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을까?’ 찾아가면서 생긴 의문이었다.

들꽃농장 대표 오영덕씨. 우리나라 나이로 마흔 살. 일찍 성공의 똬리를 틀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도심에서나 볼 것 같은, 농사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잘 생긴 얼굴이 기자를 맞이했다.

▲ 들꽃농장에서 생산되는 '항아리콩나물'.
오 사장은 서귀포시 예래동 출신으로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1994년 제주시내에서 논술학원을 차려 그럭저럭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을 정도로 지냈다. 이후 이어도정보문화센터에 1년 정도 다니면서 많은 정보와 맞닥뜨린 오 사장은 1996년 생태기행을 주 전공으로 하는 서울소재 모 여행사의 제주지사를 차리는 기회를 가지게 됐다.
1997년 마침 당시 신구범 도지사가 추진했던 중국여행사 초청 팸투어를 계기로 중국인관광객 유치에 나서보았으나 호텔의 무반응과 생태기행에 따른 관광업계의 인프라 등 각종 기반시설이 갖춰지지 않아 여행사는 오래가질 못했다. 그 때가 1997년.
오 사장은 이후 정의구현사제단의 취재 협조를 바탕으로 자신의 전공을 살려 ‘외로운 저항’이라는 실명소설까지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오 사장의 마음을 붙잡는 것은 없었다. 학원도 그렇고 여행사도 그렇고, 소설 쓰는 것도 그랬다.

문득 오 사장은 결혼 전 강원도에서 1년 정도 살았던 기억을 떠 올렸다. 한 초등학생이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30분, 다시 버스 기다리길 1시간, 그런 다음 아무렇지 않게 버스 타고 가는 모습이었다. 이 초등학생의 모습은 바로 생활의 일부로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 생각하기 마련이다. 마음먹기 달렸다. 세상사는 거 아무것도 아니다”

이 같은 생각전환은 오 사장으로 하여금 “시골에 가서 자립 생활을 하고 싶다. 문명의 도움 없이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이 생각은 더욱 발전하여 1997년 말 아는 사람의 도움을 얻어 지금의 한경면 금악리 산골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시내생활과의 인연을 끝낸 셈이다.

▲ 부인 임미경씨.
# 발로 뛰며 머리 쥐어짜 만든 항아리콩나물

오 사장은 금악리로 이사 온 1998년부터 콩 농사를 시작했다. 무농약 유기농 콩 재배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수확량이 거의 없는데다 5000평에 콩을 심어도 평당 100만 원의 소득을 올릴 수 없었다. 오 사장은 “처음엔 종자비도 없었고 수확해도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다 쌀과 부식 사먹기도 힘들었다”고 회상한다.
이럴 즈음 지인들이 1999년 제주생활협동조합을 창립했다. 오 사장은 자연스럽게 제주생협에 나가게 됐고 그 곳에서 몇몇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우연히 콩나물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제주생협 부이사장이던 김상근목사와 얘기하던 중 김 목사의 어머니가 항아리에서 콩나물을 키웠다면서 당시 근처에 콩나물 공장이 있었지만 김 목사의 어머니가 생산해 낸 항아리콩나물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루에 콩나물을 키웠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항아리에 키웠다는 얘기는 그때까지 못 들어 봤다.”

바로 이거다. 오 사장의 머리를 뒤흔든 항아리콩나물 얘기가 지금의 오 사장을 성공의 문턱으로 이끈 매개체였다. “좋다. 이왕 할 거면 무자본, 무농약으로 콩나물을 차별화시키자. 분명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고 오 사장은 마음을 다잡았다.

오 사장은 김 목사의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나 김 목사의 어머니로부터 들은 얘기는 “다시 해보니 안 되더라. 이유는 모르겠다, 해도 안 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말뿐이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아무것도 안 된다” 하는 생각에 “옛날에는 잘 됐는데 지금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한 해답을 찾아 사방팔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오 사장은 전국 콩나물 공장을 찾아 현장 답사를 벌였다. 모든 공장들은 첨단 기계식으로 콩나물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 사장의 머리에는 항아리콩나물 외엔 아무 것도 들어오질 않았다. 결국 직접 해보기로 했다.

“죄 없는 항아리를 참 많이도 깨뜨렸다. 드릴로 뚫어도 안 되고 못과 망치 등 항아리를 뚫을 수 있는 도구라면 뭐든지 사용했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실험 끝에 결국 옹기 밑바닥에 3개의 구멍을 뚫는 데 성공했다. 그 기쁨, 하늘을 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항아리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돼 있는 항아리 특성상 볼록 부분에 있는 콩나물이 제대로 물을 먹지 못하는 단점이 도출됐다. 이는 항아리 구멍크기에 맞춰 한꺼번에 물을 항아리에 채우는 방법으로 해결해냈다. 여기에다 네 시간에 한 번씩 항아리에 물주는 시간 때문에 잠을 못자는 경우도 허다했다. 심신이 피로가 오 사장을 짓눌렀다. 그러나 오 사장은 부인의 내조와 주변사람들의 도움 등 갖은 노력 끝에 항아리콩나물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 사업개념 아닌 품질과 성실로 접근

문제는 판로였다. 오 사장은 우선 제주생협에다 검은 비닐봉지에 400g의 콩나물을 담아 납품했다. 초창기 판로는 바로 제주생협이었다.

“사업개념으로 접근하면 딴 생각이 들 것 같아 처음부터 농사개념으로 판로개척을 해 나갔다. 일단 먹거리이니까 좋아야 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무농약 콩나물을 항아리에서 생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판로문제에 대한 이론적인 기본틀은 알고 있었다.”

오 사장은 이를 바탕으로 마트를 찾았다. “무농약으로 항아리에서 만들었으니 마트에서 알아서 팔아주십시오. 가격도 마트에서 다 아는 것인 만큼 알아서 주십시오” 하고 덤벼들었지만 “세상에 이런 사람 처음 봤다”는 게 마트 주인들의 한결같은 답변이었다.

진심어린 모습으로 다가선 결과 마트에서도 좋은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 사장의 끈질긴 농사개념 접근방법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어려움도 있었다. 두부시장의 10분의 1을 장악하고 있는 콩나물공장과 대기업인 풀무원과의 경쟁이었다. 두부공장에선 콩나물을 안 받으면 두부를 안 준다는 식으로 마트를 협박했고 대기업 브랜드인 풀무원을 이길 만한 자체 브랜드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항아리가 새겨진 ‘좋은아침 콩나물’이라는 브랜드로 납품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항아리콩나물’ 없느냐고 마트에 얘기를 했고 ‘항아리콩나물’이 가장 맛있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었다.”

바로 '항아리콩나물‘이라는 브랜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계기였다.

# 대체에너지 개발 등 숙제 산적

이제 항아리콩나물은 친환경급식을 통한 학교 납품과 농협하나로클럽, 이마트 등 주요 마트에 들어간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월 매출 20~30만원, 한해 100만 원 정도에 그쳤으나 다음해부터 매출이 급신장하였다.
현재 들꽃농장에는 100여 평의 항아리콩나물 재배소에 150개통(통당 콩나물 100kg)의 콩나물이 익어가고 있다. 한 달에 평균 15t, 1년이면 200t가량의 항아리콩나물이 도내 곳곳에 납품된다. 초창기 부인 임미경씨(35)와 했던 항아리콩나물공장은 이제 정규직 4명을 포함해 8명으로 늘어났다. 이젠 세 자녀도 이곳 환경에 익숙해져 오히려 도심이 이상할 정도란다.

“문제는 수월찮게 들어가는 난방비와 상수도 요금이다. 전기를 대체할 수 있는 벽난방을 비롯한 대체에너지 개발과 한번 사용한 상수도를 다시 사용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콩나물 하나만 보고 하다 보니 큰 수익은 얻지 못했지만 신뢰성을 크게 높였다는 장점도 있지만 경제성으로 따져볼 때 효율이 떨어지는 단점도 잇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욕심내지 않고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항아리콩나물을 생산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이제 오 사장에게 경제적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오 사장은 미래에 대비, 인근 4000평에 야생 녹차밭을 가꾸고 있다. 내년에는 4·3소개마을인 ‘솔도’로 이사, 그곳에서 수제 차 가공에 전력을 기울이겠다는 오 사장. 그의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의지, 친환경농업으로의 새로운 사고 전환 등 지금보다 더 나은 농업의 미래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오 사장의 미래가 지금의 터전 위에 설계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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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경제가 아직도 회생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제주발전연구원은 '제주민생경제 희망찾기 프로젝트'로 도내 각 삶의 현장에서 나름대로 경영철학과 노하우를 가지고 피땀어린 노력에 의해 성공을 일궈가는 성공사례를 발표하고, 이를 한 권의 책으로 소개했습니다. 제주의 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의 협조를 얻어 도내 자영엽자, 소상공인들의 성공스토리를 연재합니다. 가슴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바로 도민 여러분이 제주의 희망입니다.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연재를 허락해 준 제주발전연구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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