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 칼럼] 세분 모두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제주의 큰 어른 되길

1942년생, 올해 72세가 되는 동갑내기 우근민, 신구범, 김태환. 전 현직 도지사인 이들 간의 물고 물린 선거판 경쟁은 무협소설의 소재로도 흥미로울 듯싶다. 한편으론 김영삼(YS), 김대중(DJ), 김종필(JP) ‘3김(金)’ 씨가 주물렀던 시대의 한국 정치가 제주 버전(version)으로 각색된 듯하다.

현직에 있는 우근민 지사는 전두환 정부가 출범한 1980년 정부의 핵심 요직인 총무처 인사과장과 기획관리실장 등을 거쳐 1991년 노태우 정부 때 제27대 제주도지사로 임명된다. 연달아 28대 도지사로 연임된다. 민선자치시대가 열리면서 우 지사는 1998년 제32대 제주도지사로 당선되고 내리 제33대 도지사로 당선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다시 2010년 7월 제36대 도지사가 된다. 우 지사는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도지사만 다섯 번을 한 셈이 다.

신구범 전 지사는 노태우 정부 때 정부 요직의 하나인 농수산부 축정국장 등을 역임하다가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1993년 제29대 도지사로 임명된다. 민선시대가 막을 열었던 1995년 제1회 지방선거에서 우근민 후보와 치열한 접전 끝에 신승(辛勝)해 제31대 제주도지사를 지낸다. 그러니 신 지사도 도지사를 두 번한 것이다.

김태환 전 지사는 우(禹)와 신(愼)이 도지사를 놓고 대결을 하던 때에 제주시장에 당선된다. 우 지사가 선거법 위반으로 낙마하자 2004년 재보선에 출마해 당선, 제34대 제주도지사를 지낸다. 이어 2006년 제35대 도지사에 내리 당선된다. 김 지사도 두 번의 도지사 경험을 한 것이다.

이렇게 3지사가 각각 다섯 번, 두 번, 두 번을 도지사로 재임한 기간이 9차례에  총 23년이다. 그 이전의 정부 요직까지 포함하면 무려 30년이다. 흔히 한 세대(世代, generation)를 30년으로 보니까 이들 3인은 도지사로서 제주의 한 세대를 이끌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지금 제주사회에서는 ‘우 지사의 여섯 번째 준비설’, ‘신 ? 김 지사의 세 번째 고려설’ 등이 회자되고 심지어는 ‘리턴 매치’ 운운하고 있다. 그러니 공직사회나 일반 도민사회도 술렁거린다. ‘우 사단’ 이니 ‘신 사단’이니 ‘김 사단’이니 하는 끼리끼리의 패거리 짓기와 줄서기가 횡행할 조짐이다.

나는 이들 세 분의 전 현직 도지사를 모두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다. 나는 늘  세 분 모두가 제주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언제든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술 한 잔 나눌 수 있는 사이다. 그러니 비판이 쉽지 않을 수 있다. 한편으론 안타까운 마음도 금할 길이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사제지간이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과의 논쟁에서 항상 도전적이었다. 스승인 플라톤의 논리에 도발적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주변에서 스승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지 않느냐고 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애보다 진실이 우선한다”고 맞받아쳤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 전통은 이런 토양위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 분들이 제주의 원로이고 그들과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제주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제주의 존경 받는 원로로 남기를 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충정으로 헤아리기를 바란다.

오랫동안 도정을 이끌었던 세 분은 그 누구보다 많은 도정 운영의 경륜과 지략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니 지역사회를 위해서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고 미련도 남아 있을 것이다. 연임과 재도전을 권유하는 측근들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이 분들의 공(功)과 과(過)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한 세대를 이끌었던 이들은 이제 칠순이 넘은 나이다. 도지사로서 당대(當代)에 그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많은 일들을 해냈다. 그 역할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역사는 이 분들의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억할 것이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고 물러갈 때를 생각해야 할 때다.

진퇴를 논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는 이야기가 있다. 1960년대 말 베트남전에 반대하던 미국의 젊은이들의 반전운동이 민권운동과 뒤엉켜 미국 대학들이 소요 사태로 몸살을 앓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하버드대학의 급진과격 학생들이 대학을 점거하여 학교행정이 마비되었다. 당시 하버드대학 총장이던 퓨지(Nathan M. Pusey)는 교무위원회를 소집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회의는 ‘경찰을 부를 것인지 경찰을 부르지 말 것인지’를 놓고 대립했다.

미국에서는 대학 총장이 경찰을 부르지 않을 경우 경찰은 대학 캠퍼스에 한 발짝도 들어서지 못하는 게 전통이다. 퓨지 총장은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젊은 교수들은 경찰을 불러서 해결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퓨지 총장은 그러나 소신대로 경찰을 불러 캠퍼스를 점거한 학생들의 농성을 풀고 대학을 정상화시켰다. 그리고는 임기를 2년이나 남겨 놓고 있던 퓨지 총장은 이사회에 사표를 냈다. 주위에서 만류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시대는 이제 지났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대학을 떠났다.

나도 개인적으로 진퇴를 분명히 하고자 무던 애를 썼던 때가 있었다. 나는 제주대학교 제7대 총장에 취임하여 대학발전을 위한 의미 있는 많은 일들을 하려고 밤낮없이 뛰어 다녔다. 이 기간 동안 제주대학교가 도약할 수 있는 활주로를 어느 정도 튼튼하게 다졌다고 생각한다. 10년을 지루하게 끌어 온 교육대학과의 통합을 성사시켰고, 대부분이 사람들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로스쿨(Law School)로 잘 알려진 법학전문대학원도 유치했다. 지금의 제주대학교 부속병원 개원에 따른 고가의료장비 구입비 등 120억 원을 당해 연도에 정부예산으로 지원받아 제주대학병원을 개원시켰다. 대학발전기금도 300억 원 정도 유치하는 등 제주대학의 발전과제를 풀기 위해 내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교수 승진 규정을 서강대 수준으로 강화시켰고, 교수연구 업적 평가에 따라 성과급의 폭을 크게 차등화 시키는 등 일부 교수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총장직을 떠나기 직전 해인 2008년 말 기준 『중앙일보』가 전국 4년제 국공립·사립대학 평가에서 전년도 57위였던 제주대학은 34위를 기록하는 성과를 달성했다. 무려 23단계를 뛰어 넘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앙일보』는 당시 보도에서 최근 가장 수직 상승한 대학으로 제주대학을 꼽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는 대학 발전을 위한 나의 열정을 다시금 일깨웠다. 제주대학을 전국 명문 지방대학의 반석위에 올려놓겠다는 각오로 총장직 연임에 도전했다. 그러나 3차까지 간 결선투표에서 석패했다. 내가 지향했던  성과 중심의 리더쉽이 컨트리 크럽형·왜곡된 괸당 조직문화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선거낙선에 대해서 억울한 생각이 많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기자회견하는 당선자에게 찾아 가서 당선 축하도 해줬고 기자들에게 당선자를 잘 도와달라고 부탁도 했다. 그런데 당시 총장 당선자는 어떤 사정에서인지 취임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재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주변에서 ‘제주대학을 총장재임시절에 제창했던 제3창학의 목표인 전국 20위 이내 대학으로 올려놓기 위해서는 당신이 다시 한 번 총장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재선거 출마를 강력하게 권유해 왔다.

그러나 나는 재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대학 총장으로 나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연임을 위한 선거에 출마해서 평가를 받았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임명 받지 못한 당선자의 불행을 이용하여 내 일신의 목적을 도모하는 기회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불출마로 인해 나의 소명의식을 불사를 기회를 스스로 차단시킨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불출마에는 미련이 없다.

사실, 진퇴(進退)의 때를 찾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공명심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쯤이면 된 듯싶다가도 다시 생각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도지사의 경륜과 지략을 갖춘 분들이라면 필부(匹夫)와는 다른 사유(思惟)를 해야 한다. 진퇴의 묘를 살리는 것이다. 중국의 처세서 『후흑학』(厚黑學)은 ‘뻔뻔함’과 ‘음흉함’의 생존법을 가르치지만, 영웅호걸이 되는 법도 일러준다. 그것은 바로 ‘진퇴의 법칙’이다.

제주는 이제 새로운 세대에 의해 새로운 비전과 새로운 정치가 나와야 한다. 그런 꿈을 꾸는 후세에게 길을 열어주고, 기회를 주고, 용기를 북돋는 일이야 말로 전·현직 세 도지사가 해야 할 일이다. 미국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는 퇴임 후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지워주기’ 시민운동을 펼쳐 오히려 대통령으로 있을 때보다 퇴임 후에 그의 인기가 상종가를 치고 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이 세 분들이 제주도를 위해서 할 일은  너무 많다. 이제 도민들과 손을 맞잡고 한가로이 올레길을 걸으며 청소도 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봉사활동을 한다면 그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광경일까.

장강(長江)은 뒷물이 앞 물을 내치면서 흘러간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인간사의 순리다. 후진에게 자리를 내주고 미래를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것 또한 출마 결심 못지않게 고뇌에 찬 결단이며 아름다운 선택일 수 있다. 그것이 제주의 원로로 존경받는 길이다.

▲ 고충석 전 제주대 총장
좌고우면하는 자신과 주변의 만류를 뿌리쳐야 한다.
일도양단, 진퇴의 묘(妙)를 기대한다. 이 글을 맺으면서 젊은 날에 가끔 암송하곤  했던 이형기 시인의 ‘ 낙화’ 라는 시가 생각난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한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세분 모두가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제주의 큰 어른이 되시길 바란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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