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4) 국무회의에서 4·3 강경진압작전 지시, 이승만

▲ 이승만 전 대통령.

- 이승만은  누구인가?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 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 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 놈의 미소하는 사진을/(……)/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였느니/ 썩은 놈의 사진이었느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 -김수영(金洙映)의 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1960년 4월 26일 이른 아침)

이승만은(李承萬,1875~1965)은 누구인가? 김수영 시인이 '살인자'라고 읊조린 이승만이 국민들의 마음에서 1인자가 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 아닐까? 누가 지적한 것처럼 이승만은 사이비 교주 인가?  애국자인가? 기회주의자인가? 이 나라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부(國父)인가?  민족분열의 원흉인가?  폭력배인가? '이승만'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이승만 하야와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시켜나가자, 이승만은 사퇴 성명서를 발표하고 경무대를 나와 이화장으로 가는 날 아침, 시인 김수영은 혁명의 감동을 읊조렸다. 그래서 시인은 1960년 4월 26일 이른 아침에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시를 썼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귀국 당시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정당 ·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두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모여든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미군정 역시 그의 지도력을 원했다.

그는 10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일이 많이 있다......”라고 하여 공산주의를 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일까? 초대 내각을 인선할 때 조봉암(曺奉岩)을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출신 전향자였던 조봉암의 발탁은 파경인사였으며, 이후 이승만은 조봉암등을 통해 농지개혁을 추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후 그의 행로는 너무 불투명하였으며, 결국 4·19로 권자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4·19 직후인 1960년 5월, 제주대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 고순화(高順華) 고시홍(高時弘) 박경구(朴卿久) 양기섭(梁基燮) 이문교(李文敎) 채만화(蔡萬華) 황대정(黃大定)은 호소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 중간지대로 피신한 제주섬 사람들, 어린이와 여성들이 태반이다.

“.......(중략)...... 4․3사건 당시 모든 야만적 행위는 자행됐었으나 모두 숨겨져 제주도민의 원한은 한없이 쌓여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에 과도정부는 전력을 기울여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동시 4․3사건 당시 양민을 학살하고 방화 등을 자행한 주동자와 졸도(卒徒)들을 엄정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민심수습의 완전한 효과는 거두지 못할 것이다. 과도정부가 신속 과감하게 4․3사건시 양민학살, 방화 등 모든 야만적 행위를 규명하여 도민의 유한(遺恨)을 풀어주지 않은 한 도민들의 보복감과 정부불신의 사상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중략)

......도민! 과도정부각료! 언론인들이여! 우리는 역사적인 커다란 교훈을 받을 시기에 처해 있다. 죄 없이 무참히 죽어간 수만 여 원혼들의 원을 풀어줄 때는 왔다. 유가족들의 설움과 슬픔을 위로해 드릴 때는 왔다. 이때에 4․3사건시 죄악상을 조사 규명하여 세상에 공포함으로써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음과 아울러 인간의 탈을 쓴 야수와 같은 행위로써 양민학살, 방화 등을 자행한 주동자와 졸도들을 고발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죄 없이 죽어간 원혼을 위령하고 슬픔과 억울함에 잠겨있는 유가족들을 심적으로나마 위로하여 민원이 없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건설하여 찬란한 제2공화국 건설에 미력이나마 헌신하고자 같은 뜻을 품은 7명의 동지들이 모여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라 이름졌으니 도민, 과도정부 각료, 언론인들에게 많은 협조 있기를 진심으로 호소한다.”

- 제주4·3 당시 어떤 역할을 했는가?

 

▲ 1952년 7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이 밴 플리트 대장과 함께 모슬포 제1훈련소를 방문 훈련상황을 시찰했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제주4·3 당시 어떤 역할을 했는가?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강경진압작전을 지시했다. 정부에서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에도 초토화의 책임은 당시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게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통수권자이며, 미군은 한국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또  다음 발언은 강경진압작전이 미국과의 교감 속에서 벌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주4·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낼 수 있다.”

이승만은 제주 4·3 당시 불법계엄령을 선포했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 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하였다. 

특히 이승만은 입산자 대부분이 ‘공산당 선전에 속거나 집이 불에 타 갈 곳이 없어 도로 산에 올라간 자’임에도 이들을 ‘폭도’라 하여 무차별 총살을 명령했다.

“1948년 10월 이래 이듬해 3월까지에 미제와 이승만 역도들의 매일 몇 시간, 개별적 집단적으로 감행한 동족 학살의 일대 살륙과 초토적인 방화, 모든 패륜적인 악덕에서 빚어낸 참극으로 제주도 인민들의 살상자 수효는 부지기수인 것이며, 부지기처한 시체들이 이름 없는 무덤을 이루고 있다.” -김봉현· 김민주의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서 발췌.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이 내세운 최대 이슈는 ‘반공’이었다. 당시 국회를 통과한 국가보안법도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특히 제주4·3 당시 악명 높은 서북청년회를 동원한 사실도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제주4·3 당시 군·경을 장악한 당사자는 누구인가? 물론 이승만과 미국이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의 승인 없이는 군사이동도 불가능했다. 당연히 제주4·3은 이승만과 미국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승만은 친일 경찰을 철저하게 활용했다.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 사건 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 노덕술, 이구범, 최운하 등은 일제 강점기부터 고문을 잘해서 출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 이승만은 친일파청산 주장은 공산당의 연관성이 긴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제주도 시찰담을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유재흥(劉載興) 대령이 지휘하는 3,100명 육군 장병의 용감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공산반도 2,800명 이상을 포로로 하였고 이로 인하여 제주도내 게릴라 부대 공격전은 종결을 보게 되었다. 제주읍 근교에 있는 포로로 된 소위 ‘산사람들’ 2,500명이 수용되어 있는 전재민 수용소에서 그들을 위로하는 한편 도민을 격려하였다.

도내 공산주의 지도자 김영환, 이덕구(李德九) 등은 아직 체포되지 않고 있는데 그들의 추종자들은 대개가 무장을 하지 않고 있으며 이들은 산중 바위 사이에 은신하고 있으나 육군은 이들을 포위하고 있으므로 소탕전은 근근 종료될 것으로 예측된다. 미국고문 윌터 T. 하버러 중좌와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씨는 대통령 부처(夫妻)의 도내 시찰시에 수행하였다.

동일 대통령은 미(2줄 누락)대사의 노력에 대하여 크게 감사하는 동시에 이 원조로 말미암아 한국의 일부분인 제주도민도 큰 혜택을 입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李)대통령 제주도서 귀환> 9일 오전 9시 김포비행장을 떠난 이 대통령은 제주도의 치안상황을 시찰하는 동시에 일선군경의 노고를 위로 격려하고 오후 6시 40분 공로로 무사히 귀환하였다.’ -조선중앙일보 1949년 4월 12일 기사(같은 기사 조선일보 49. 4. 12)

- 불법 계엄령 선포와 실태

 

▲ 중간지대로 피신한 제주섬 사람들, 어린이와 여성들이 태반이다.


“여수<국방군> 폭동 이래 미제와 이승만 역도들은 도내와 애국대열을 섬멸하기 위하여 갖은 악착스런 방법이 적용된 학살, 초토화, 강제소개, 축성, 전략촌 설치, 상금제 실시 등의 가공할 토벌작전과 계속적인 탄압군의 강화로 말미암아 인민들의 전투전선은 점차 축소되어 갔으며 그 활동은 중대한 위기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김봉현· 김민주의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서 발췌.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행정자치부 산하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는 대통령령 제31호. 대통령과 국무위원 전원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이 문서는 1948년 11월 17일자로 계엄을 선포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계엄 해제에 관한 문서는 ‘대통령령 제43호’로서 “제주도지구의 계엄은 단기 4281년 12월 31일로써 이를 해지한다”고 되어있다. 

제주 계엄령은 1948년 11월 17일 선포됐고, 12월 31일 해제될 때까지 한달 보름간 지속되었다.  미군사고문단장인 로버츠 준장은 1948년 12월 1일 국방부 참모총장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계엄령(martial law)에 관한 문서를 동봉한다. 이 문서가 귀하의 모든 지휘관들에 발표되어서 그들이 계엄령이 무엇인지, 언제 발표될 수 있는지, 누가 발표하는지, 그리고 그것의 영향이 무엇인지 숙지하도록 할 수 있다.”

그런데 계엄령 선포 당시 국내에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 계엄령의 구체적 내용을 한국군 수뇌부조차 몰랐다는 점이다.  미군이 보내준 문서를 통해 비로소 한국군이 계엄령의 내용을 알게 됐다는 점이다.

계엄법은 계엄 선포일은 물론이고 해제된 지 거의 1년이나 지난 후인 1949년 11월 24일에야 법률 제69호로 제정 공포됐다. 제주4·3  당시 제주도민 대량 학살의 법적 근거로 알려진 계엄령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된 것이다

- 이승만의 우익진영 강화

 

▲ 1948년 5월,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 주민들.

“또한 서북청년단원들은 담배, 엿, 양말, 비누 등의 수다한 대상(隊商)을 짜서 상인배로 가장하고, 거리와 부락들을 골고루 쏘다니면서 밀정을 도모하였고, 인민들에게는 사용도 못할 물품을 고가로 강요하였다. 만일 그가 거부할 경우에는 불쌍한 농민들을 무조건 빨갱이. 통비분자로 몰아치어 집단적인 약탈과 살해하는 일이 도처에서 매일과 같이 악랄하게 진행되었다.”-김봉현· 김민주의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서 발췌.

서북청년단원들은 “너의 남편과 자녀는 관에 잡혀 사형 직전에 있으니 10~50만원까지 내주면 석방시켜 준다.”는 감언이설로 도민들을 꾀었다. 금품을 사취 강탈했고, 총칼의 협박 공갈로써 부녀자들을 능욕하는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 3·1대회 전후의 활동가, 혐의자, 보석자, 민주인사들과 그의 가족들마저  이유 없이 마구 체포, 투옥, 학살을 공개적으로 자행했다.  

1946년 11월 30일 종로YMCA에서 서북청년단이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완전 타도하는 투쟁대열에 감연히 나설 것을 만천하에 선언한다!” ‘심상치 않을 피바람을 몰고 올‘ 선언을 하며 결성대회를 하는 자리에, 이승만은 비서 윤치영을 통해 화환을 보냈다. 이승만은 서청을 중요시했고,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청위원장이었던 문봉제(文鳳濟)는 다음과 같이 중언하고 있다.  "이승만은 우리들을 반갑게 맞으면서 이북 실정을 많이 묻고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격려하더군요. 태양처럼 우러러보던 거인이 30분 혹은 1시간씩이나 응대해주시니 감격할 수밖에요.“ 서청의 배후에는 군정경찰이 있었고, 행동의 철학은 이승만으로부터 나왔으며, 굳이 경찰을 행동의 배후라고 한다면 돈암장(*이승만을 말함)은 정신적인 배후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서청 단원들은 1947년 3·1사건 직후부터 제주에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는 북한 공산당 집단에 쫓겨 급히 도망쳐 나와 빈털터리가 많았다. 처음에는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7년 하반기부터는 경찰, 행정기관, 교육계에서 근무하는 단원들이 늘어났다. 서청 제주도본부가 정식으로 결성된 것은 1947년 11월 2일이다. 제주극장에서 제주도본부 결성대회를 열고 위원장에 장동춘(張東春)을 선출했다. 서청에 의한 테러도 자주 발생했다. 그들에게는 정규 봉급이 아예 없었다. 

이승만도 서청을 군인과 경찰로 전격 교체하는 일에 앞장섰다. 서청 위주로 경찰이 재편됐고, 군대에는 ‘서청중대’가 따로 편성됐다.  서청 단원들을 군에 편입시켜 이른바 ‘특별중대’를 만들었다. 계급장도 없는 ‘군인 아닌 군인’이었지만 9연대 헌병이나 장교들도 간섭하지 못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 

서청 단원의 제주 파견은 ‘4·3’발발 이후 늘어났다. 4·3사건이 나자마자 서청 단원 500명이 경찰전투대 요원으로 도착하였다. 서청 단원들에게 ‘제주도는 악몽의 섬’이었고, 제주도민의 입장에서는 ‘서청은 악몽의 그림자’였다. 그러나 실제의 상황은 이보다 더 험악했다.

서청 단원들은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서청 단원들이 투입되는 과정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개입했다. 그해 11월 중순께 제주경찰에 서청 단원 200명이 1차로 배속되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경찰로 급조됐다. 또 군인으로 이보다 훨씬 많은 대원들이 제주도에 내려 보내졌다. 200명의 서청 경찰대는 이른바 ‘2백 명 부대’로 불렸다.

이승만 정부에서 서청 대원들을 내려 보내면서 월급이나 보급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현지 조달하라는 것도 문제였다. 역시 서청출신 경찰관으로 ‘2백 명 부대’에 이어 제주에 왔던 박형요는 “일선 지서로 배치될 때, 홍순봉 경찰국장이 연설하기를 ‘현재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식량이나 월급을 보낼 수 없다. 가서 마을에서 얻어먹으며 진압하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중앙정부에서조차 이념문제를 흑백논리로 각인시킨 점이다. 즉 ‘제주도민들은 사상적으로 믿을 수 없다. 대부분이 빨갱이 물이 들었다. 그러기 때문에 사상이 건전한 서청이 이곳을 진압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입시킨 것이 사태를 더욱 유혈극으로 몰고 간 한 동인이 되었다.

이에 대해 서청 중앙본부의 문봉제 단장은 해명성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는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 달라고 하면 서북청년회를 파견했다”면서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다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제주도”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 아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1948년 11월 9일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 53)이 서청의 손에 고문치사 당한 사건도 서청의 위세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제주도 행정 2인자가 보급문제에 불만을 품은 서청들에게 희생된 것이었다. 특히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 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버려 끝내 절명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미국과 이승만에게 책임을 물어야 

▲ '선무귀순' 작전에 의해 하산한 제주도민들.

 ‘.........이(李)대통령은 작 12일 제주도 시찰과 국민조직 강화를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중략).........산에서 굴을 파고 군기를 사용하며 밤에 민간에 내려와서 살인방화로 식량을 강탈하는 비도 중에서 돌아와서 귀화한 공산분자가 남녀 합하여 2,800명에 달하였으나 아직도 겁이 나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수효가 몇 천명된다는데 가장 곤란한 것은 여러 촌락이 불에 타서 의지할 곳도 없고 먹고 입을 것이 없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중략).......이 사람들을 다 넓은 공청에 칸을 나눠서 거처시키며 하루 두 끼씩 밥을 먹이는데 반찬이 없음은 물론이오. 소금도 구하기 어려워서 맨밥을 먹여 지나게 한다는데 이와 빈대가 꾀어서  말할 수 없는 형편에 있으므로 DDT약을 보내서 청결시키려 하는 중이나 식물과 의복과 거처범절이 제일 급한 중이므로 내지에서 구제를 급히 하지 않으면 더 부지하기 어려운 형편이오. 그 중에서도 더욱 급한 것은 거처할 집을 마련해 줄 것인데 다행히 산에서 재목은 가져올 수 있으나 많은 재정을 요구하는 터이므로 복표 발행이 하루가 급한 것입니다......

(중략)...... 해안경비대와 우리 해군이 속행선과 순양대와 포격대를 강화해서 해외에서 잠입하는 무리를 다 토벌하여 밖에서 반동분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며 우리 공군이 해상과 산 위에서 주야 사탐하여 반역배들이 숨길 곳이 없게 만들 것이므로 정부 관리나 군경 중에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반공에 진력하는 지도자로서 주권을 가지게 할 것이며 국민회와 청년단과 부녀단을 정부후원기관으로 각 동리와 촌락에 절실히 세포조직을 완성하여 동일한 주의와 동일한 행동으로써 보호하며 연락해서 물샐 틈 없이 조직해 놓고 어떤 집 틈에서든지 타처 사람이 들어와서 하룻밤이라도 자게 될 때에는 24시간 이내로 최근 경찰관서에 보고해서 일일이 조사하므로 반란분자들이 자유 행동할 곳 없도록 만들 것입니다.............(중략)......”’- 조선중앙일보 1949년 4월 13일 기사((같은 기사 국도신문․동아일보․자유신문 49. 4. 13)

1948년 11월 중순께, 대규모의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됐다.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4‧3사건 전개과정에서 가장 참혹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됐고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불에 타는 등 글자 그대로 ‘초토화’ 됐다.

제주도민들은 과거의 ‘빨갱이의 섬’이란 낙인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왔다. 1948년 광란의 바람은 수많은 도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갔다. 하지만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불을 붙였다.
 그렇지만 일부 정치세력이 아직까지도 제주4·3을 ‘폭동’, ‘빨갱이’등으로 묘사하면서, ‘제주4·3위원회 폐지논란’, ‘교과서 왜곡’등의 예를 남기고 말았다. 역사를 ‘사실’로 접근하지 않고, ‘정치’로 해석하려는 몰이해가 여전히 제주도를 ‘반역의 섬’으로 규정지으려 하였다.

그렇지만 그 동안 제주도민들은 꿋꿋하게 버티면서 제주4·3의 해결을 기다려왔다. 지난 대선 당시 어느 후보가 ‘제주4·3완전해결’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제주4·3으로 최소 3만 명이 죽었다는 사실은 이제 공론이다. 당시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누가 시비를 걸어도 우리가 해야 할 책무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느냐 문제이다. 제주4·3은 언제 일어났는가?  제주4·3은 미군정 시대 일어났다. 제주4·3은 미군정 당시 일어난 사건이고, 학살이 진행될 당시 대한민국은 국가로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제주4·3 당시 군·경을 장악한 당사자는 누구인가? 물론 미국과 이승만이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의 승인 없이는 군사이동도 불가능했다. 당연히 제주4·3은 미국과 미군, 그리고 이승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 이승만 전 대통령.

미국하와이문화센터에서는 지난 해 11월 6일 섬 평화문화 콜로키움이 열렸다. 하와이 로스쿨 '정의를 통한 사회치유'팀과 제주대학교의 연구소가 공동으로 제주4·3에 대한 미국정부의 책임을 요구하여 사과를 받고 배상을 요구하는 일에 참여하기로 하여 그 시작을 알렸다는 점에서 평화문화교류의 새 장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에릭 야마모토(Eric Yamamoto) 하와이대 교수는  "미국 정부가 제주4·3의 제주도민의 대량 학살에 직접적으로 또한 상당한 정도 직접적으로 미국의 정부가 책임이 있음을 그간의 한국의 학자와 미국의 학자 그리고 자신의 연구로 명백하게 밝혀졌기 때문에 오바마 미국정부에 대하여 사과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시카고 대학 석좌교수도 “제주도 사람들에 대한 (배상이) 첫 번째 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대학살은) 2차대전 후 너무나 아름다운 제주 섬에서 자기결정권과 사회정의를 위해 싸운 제주도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미국정부의 능력을 중거한 첫 번째의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물론 미국과 함께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제주4·3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제주도와 기타 다른 영향을 받은 지역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탕작전은 훌륭하게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해안을 따라 더 많은 공산주의자들의 끊임없는 침투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속의 순찰함과 비행기, 우리 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수척의 주력함이 필요합니다. 이것들이 없이는 공산주의자들이 침입을 막고 쌀과 기타 상품의 밀수를 막기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공격을 격퇴시키기는데 있어 우리 군을 지원하는 것 뿐 아니라 정찰을 위해서도 비행기가 필요합니다.........

▲ 김관후 소설가. ⓒ제주의소리

(중략).........카우프만(Kaufman) 제독이 진해만의 우리 해군기지를 방문하도록 초청하려 하고 있으며 항공 방어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현재 퇴역한 훌륭한 미공군 관리를 초청하려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데 깊은 흥미를 가진 한 명의 육군 장교도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부디 이런 확신으로 우리에게 충고하고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매우 긴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보내는 사신(1949년 5월 22일)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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