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의 뉴욕통신] 그러나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한다.

황우석 박사 신드롬 뒤에는 우리 한민족의 최대 약점인 소위 '냄비근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지난 11월 22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를 읽고, "난자 제공자 이슈가 줄기세포 연구를 지연시키다"란 글을 [제주의 소리]에 올리면서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이나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과학자들에게는 항상 두개의 커다란 산을 넘어야 한다: 그 하나는 '양심'이고 또 하나는 '윤리규정'인 것이다. 실험을 준비하고 시행하고 그 결과를 보고할 때 윤리규정을 반드시 지켜야 함을 물론 양심적인 보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우석 교수팀은 바로 이 넘어야 할 태산 두개에서 그 어느 하나도 넘지 못하고 좌절된 셈이다. 아마도 그가 괴로워했던 것은 바로 이 두가지 점에서 떳떳할 수 없었던 결과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으리라.

나도 최근에 '마지막 소명'으로 알고 선뜻 받아 들였던 직책을 그만 두었다. '빨리빨리'라는 성과위주의 압력이 나를 견딜 수 없는 지경으로 몰고 갔다. 나의 건강상태는 이런 스트레스를 견딜 수도 없었지만, 내 양심상 또한 허락하질 않았다.

만약 그 일이 나에게 물질적인 매혹을 가지고 다가왔다면, 나도 내 건강이 악화되든지 '양심의 가책'을 받든지 상관하지 않고 견뎌 보려는 유혹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나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물러났다.

나는 학생들에게 심리학 개론을 가르치면서 이런 우문을 던지곤 했다. 수도승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소위 탁상공론을 벌렸다. (1)소는 윗니만 있다; (2) 소는 아랫니만 있다; (3) 소는 위아랫니 모두 있다.

아침 식탁에 둘러앉자 마자 벌어진 탁상공론이 저녁식탁이 끝날 무렵때까지도 결론을 내지 못했다. 시중을 들던 사환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답답한 나머지 의견을 냈다.

제가 저 목장에 있는 소를 끌고 오겠습니다. "쇠아가리를 벌려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수도승들은 극구 반대했다. 그 어느 누구도 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맞다, 정답은 '쇠아가리를 벌려 보는 수'다.

황우석 교수팀은 예의 수도승들처럼 '실기'를 하고 말았다. 제3의 검증을 거쳤더라면 '의혹'이 증폭되지 않고 또 '신드롬'도 쉬 사그러지고 '열병'을 앓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과학적 실험 결과는 '반복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 중 강점이요 또 한 핵심이다. 누구나가 황우석 박사가 한 동일 방법으로 동일 재료를 가지고 반복하면 동일 결과가 나와야 한다.

한국인들은 '비결' 또는 '비법'을 믿고 숭상한다. 한방이 발전하지 못하는 가장 큰 흠집은 바로 비결 또는 비법 처방 때문이다. 그 비결 또는 비법을 보유한 자만이 그것을 간직하고 시행하고 다른 여타의 사람들은 시행할 수가 없고 그 비슷하게 시행한다고 해도 동일 결과가 나오지 않는데 있다.

만약에 비결 또는 비법이 있다면 특허를 획득하고 공개를 한다. 그 비법을 사용하는 연구자들은 특허권자에게 로열티를 지불하게 되어 있다.

다시 한 번 더 상기하고 넘어가자, 커다란 두 개의 산을 넘어야 한다: 윤리규정 준수와 양심적인 보고이다.

지금 황교수가 당하는 양심적 가책은 자칫하면 그 목숨을 대가로 치룰려고 할 지도 모른다. 교수는 명예를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명예가 땅에 떨어질 때 목숨을 잃는 것과 같다. 자살하거나 자해하거나 하는 위험이 뒤 따른다. 굶어 죽을 수도 있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시달린다. 치명적이다.

주변 측근들은 이점에 유의해서 그를 우선 돌보고 구해내야 한다. 그가 국민을 우롱하고 세계인들을 경악으로 몰아세운 '죄'는 나중에 물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그의 연구업적을 통해서 갚을 수도 있고 두고 두고 통회하는 맘으로 갚을 수도 있다. 먼저 감성을 가진 인간으로 되돌아 와야 한다. 그게 바로 양심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죽음은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못한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