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의 숨, 쉼] 결핍과 단절? 설문대할망 컴플렉스 다시보기

어렸을때 난 설문대할망을 삐죽이 할망이라 불렀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고작 명주 한 동이 부족하다고 다리를 안 놔줘?
나 같으면 '어유 고생했다'하면서 얼른 다리 놔 줄 텐데..
창조의 여신이라면서 그 정도 아량도 없어? 덩치만 크면 뭐해? 마음도 커야지."


좀 커서 제법 책도 읽고 세상살이도 알아나가면서 난 설문대할망을  다른 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래, 모든 이야기가 다 결핍과 모자람에서 시작되는 거야. 특히 신화나 옛이야기는 더욱 그렇지. 동서고금의 모든 얘기를 다 봐. 절정의 순간 이면에는 다 '딱 하나 부족한'이 있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제주도 같은 작은 땅에서 설문대할망 같은 거대한 창조의 여신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일까?

그 후 몇 년 간은 호기심 많은데다 배우고 익히기가 취미인 나도 설문대할망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왜? 살기 바빠서.

그러다 최근 다시 나의 탐구 병이 도졌다. 왜 설문대할망은 명주 한 동이 부족하다고 다리를 놔주지 않았을까. 혹시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요즘 우리 공주님이 열심히 시청하시는 여왕의 교실에서 마녀 선생님이 애들을 잘 지도하기 위해 일부러 악역을 맡은 것처럼..)
명주 100동을 다 채우지 못했다고 삐진 것도 아니고 단지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한 장치로 딱 한 동이 부족해서를 단순하게 끌어들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다시 한 번 나의 특기, 가랑비에 옷 젖듯 끊임없이 생각하니 나만의 결론이 나왔다.
설문대할망 이야기에서 부족한 명주 한 동은 우리의 자유의지였다는 것이다. 설문대 할망은 명주 한 동이 부족해서 다리를 놔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화룡점정 할 수 있는 기회를 준거라고. 제주도를 너무나 사랑한 설문대할망은 거대 여신답게 '순간의 이익'이 아니라 먼 앞날을 내다보고 우리에게 그 세계를 준비할 수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동기 부여'를 해주신 거라고.

이게 무슨 얘기냐고?
잘 생각해보자. 과거 제주도와 육지 사이에 놓인 바다는 단절과 결핍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요즘 내 생각에 제주도와 육지 사이에 놓인 바다는 보물을 잘 싸고 있는 예쁜 보자기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를 찾는 이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국적인 느낌이 좋아서'라는 것이다. 같은 대한민국이지만 수고스럽게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니 제주도가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것이다.
 
또 바다로 제주도를 잘 싸둘 수 있었기에 제주도는 다른 지역과는 다른 독특한 풍광 문화를 잘 지킬 수 있었다.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독특한 제주의 자연 풍광과 문화를 즐기기 위해 여기로 오고 있는가? 예를 들어 살기위해 바다 속에 뛰어들었던 해녀는 그 독특함으로 인해 많은 국내외 학자나 문화 예술인들이 주목하고 있는 캐릭터가 되고 있다.

또 요즘은 지도를 다시 보자는 이야기도 많이 거론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는 제주도가 아니라 세계로 나아가는 동북아시아의 중심 위치에 있는 것이라고.
이 말을 듣고 지도를 다시 보니 그렇다.

제주도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이 있고 더 밑으로 아시아는 아니지만 오세아니아 대륙이 있다. 그리고 더 가면 세계지도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니 앞으로 제주도가 뻗어나갈 세계는 넓고도 넓다.


정리해보면 설문대할망은 명주 한 동이 부족해서 다리를 안 놓아준 게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지혜로 우리가 스스로 성장해서 스스로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지켜봐주신 것이다.
여기서 실제 다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제주도 원주민'으로 사진 모델이나 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주인으로 문화 경제의 생산 주체가 되는 토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정말로 모든 사람들이 뜻을 모아 집중적으로, 강하게, 당장 진행해야 하는 일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과거의 시각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해서 현재를 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걸 생각해보자. 옛날 그렇게 갈망했던 것처럼 제주도와 육지 사이에 실제로 다리를 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에 대한 답에 힌트를 주는 신문기사가 있다.

"다리만 놔지면 모든 게 좋아질 줄 알았제. 살아보니께 불편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랑께"
섬마을이었던 전남 완도군 신지면 송곡리에 사는 김길수(63)씨는 육지와 연결되는 연륙교가 개통된 이후 생활이 얼마나 편리해졌느냐는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손사래 쳤다.
(중략)
연륙교 개통날 주민 3000여명이 덩실 덩실 어깨춤을 추면서(중략)
뭍 생활이 부럽지 않게 된 섬 주민들이 연륙교가 '보물다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연륙교 개통 이듬해부터 피서철마다 쓰레기와 주차대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중략)
연륙교 개통으로 반짝했던 골목상권과 여관, 식당가도 자동차에 잔뜩 먹을 거리를 싣고 왔다가 밤이면 인접한 도시 번화가로 빠져나가는 피서객이 많아지면서 시들해졌다.
(후략)
                                            세계일보 2013년 7월 6일 1면  한현묵 기자

 

길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 기사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이다
그런데 꼭 다리 놓기만 그럴까, 비슷한 다른 일도 많지 않나.
사실인지 모르지만 몇 년 전 이런 얘기가 돌았었다.
올레길이 각광받자 사람들이 걸을 때 편하라고 올레 길을 구획정리하고 포장도로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진지하게 논의됐었다고.
혹시 이런 우스갯소리가 실제로 논의되고 있는지, 혹은 벌써 제주 땅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두 눈 부릅뜨고 살펴봐야 한다.
이것은 과거의 시각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를 예측해서 현재를 잘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사실 내 능력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므로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좀 더 많이 고민하고 길을 찾아주었으면 좋겠다.
다만 내 생각을 말하라면 설문대할망을 보라는 것이다.
설문대할망이 거대 여신인 것은 우리가 큰 세계의 큰 주인이 되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 속 좁은 마음으로 우리끼리 아웅다웅 싸우지 말고 무턱대고 육지문화 외국문화를 부러워하지 말자.
또 설문대할망이 남겨준 명주 한 동을 우린 아주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미래 세계로 나아가는 중요한 열쇠다. 지난 세월 우리 조상들이 명주 99동을 잘 모았으니 이제 우리가 '자유의지'로 명주 한 동을 모아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나아간 세계는 또 역사가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 후손들이 또 새로운 명주 한 동을 모을 것이다.


지난달 초 아주 재미있게 본 강연이 있었다.
지난달 4일 오후 제주대학교 아라 뮤즈홀에서 한국산업술진흥원 주관으로 열린 테크플러스(tech+)제주에서 정진홍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기술, 욕망을 탐하라’를 주제로 강연을 펼친 것. 강연에서 정진홍 위원은 다가올 꿈의 사회는 상상력은 생산력이고 이 기반은 이야기의 힘이라 했다.

 "저급한 문화 상품을 팔지 말자. 상상력의 근육을 키우자. 저변에 깔린 이야기의 확대가 중요하다. 앞으로 세계는 셀 수 없는 경제로 간다. 이야기가 모든  중심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어떤 수익을 내느냐가 아니라 어떤 의지를 갖고 제주를 끌어 나가야 하느냐는 것이다."

정 위원의 조언을 곱씹어보며.. 설문대할망 신화의 완성을 꿈꾸었으면 좋겠다.
이야기라 하지 않은가.
제주도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는가.
그 이야기를 잘 다듬으면 그게 바로 미래로 가는 다리가 되는 것이다.

너무 더운 여름이다. 덥다고 하면 더 덥다.
이럴 때 한 낮 더위를 피하지 말고 당당하게 그 길을 걸어가자.
더위가 충분히 몸에 뱄으면 단숨에 찬물 샤워로 더위를 씻어내 버리자.
그래서 즐거워진 몸과 마음으로 가끔씩은 생각해보자.

우리가 준비해야 할 명주 한 동은 무엇인가.  

       
▲ 홍경희(바람섬). ⓒ제주의소리

글쓴이 바람섬은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바라건대 청춘 이후의 내 삶은 독서와 요가로 채워졌다고 말하고 싶다. 요즘은 아들 딸의 강력한 사춘기 에너지를 갱년기 에너지로 힘겹게 맞서며 하루하루살아가고 있다. 좋은 부모 만나 서울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고향에 돌아와 10년 언론사에서 일했다. 그 후 이제까지 제주교재사를 운영하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만)행복한 교육으로 가는 작은 다리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교재 교구를 판매하고 있다”

고 자신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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