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근대건축 산책] (16) 전란기의 제주와 주거 上

혼란의 시기인 동시에 근대화로 이행해 가는 변혁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제주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잊힌 시간의 공백기였는지 모른다.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으로 수많은 피난민이 제주로 몰려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제주에 대한 중앙정부의 관심과 지원정책이 추진되었다.

미약하나마 그 연장선상에서 4․3사건의 해결하려는 실마리를 찾으려던 것 같다. 사회변화 속에 초가와 와가의 전통주거양식과는 다른 새로운 주거양식이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한국전쟁의 피난민을 위한 주택과 한국전쟁 이후 복구를 위한 후생주택, 그리고 4․3사건 발발당시 소개령에 의해 피난생활을 하던 중산간지역의 원주민 복귀주택이다.

민간부분에서는 대한주택공사가 주택공급수단으로 검토하다가 여러 가지 문제점 때문에 공급하지 않았던 삼안식 주택(콘센트 막사형식의 주거양식)이 제주지역에서는 이시돌목장을 중심으로 활용됐다. 그 배경에는 빠른 시일 내에 건축할 수 있다는 장점과 콘크리트를 사용한 근대식주택이라는 인식과 절대적으로 부족한 당시의 제주지역 주택사정과 잘 결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새로운 주거양식으로 건축되었던 주택들은 대부분 정부의 정책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주택이었다. 주택의 형태와 재료들은 현대적인 주택이었으나 평면구조를 보면 나름대로 제주의 실정에 맞게 건축된 것들이었다.

이들 주택들은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보편적인 주거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사회적인 요구와 필요에 의해 축조된 주거양식이며 한국근대사와 아울러 제주근대사와 직결되어 있는 문화재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측면임과 동시에 우리네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생활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평가해야 할 근대문화자원이다.

한국전쟁의 전란기에 등장한 피난민주택과 후생주택, 4․3 원주민 복귀주택, 그리고 삼안식 주택을 중심으로 건축적 특징과 아울러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 전란기의 주거변화

1) 피난민주택

1950년에 발발한 6․25사변으로 전쟁의 위험이 비교적 적었던 제주에 많은 피난민이 유입되었다. 이들은 제주항, 성산항, 한림항을 통하여 제주에 들어와 각 지역으로 흩어져 피난생활을 시작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피난민을 위한 ‘난민귀농정착사업’이 1955년도부터 1959년까지 약 5년 동안 실시되었다. 이 사업은 단순히 전쟁으로 인한 피난민뿐만 아니라 4․3사건 등으로 인한 이재민을 포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가 계획하고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형태로 추진되었다.

▲ 제주도로 몰려온 피난민촌의 모습. (출처=제주시, 제주시정30년사)

피난민들의 정착을 위해 우선 주택을 제공하였는데, 지역상황에 따라 도시형과 농촌형으로 건축됐으나 이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번영로가 확장되기 이전에는 도로주변을 따라 봉개동 일대에 일부 피난민주택들이 양호한 상태로 잘 보전되어 있었으나도로가 확장되면서 거의 철거된 상태이다. 제주근대사의 단면을 잘 보여주었던 근대건축이 철거되어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 철거이전에 봉개동 일대에 분포했던 피난민주택 위치(봉개동 1543-2대,1543-3대, 1545-3전 표시)

필자가 봉개동 일대의 피난민주택의 형태와 내부공간을 조사한 결과 도시형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들 피난민주택은 하나의 건축물에 2세대가 거주하는 형태이지만 합벽을 중심으로 돌담으로 외부와 경계를 구분한 독특한 형태의 주택이다. 각 세대별 별도의 출입구를 가지고 있으며 화장실은 외부에 두었다. 또한, 각 세대는 독립된 마당과 우영 밭을 가지고 있는 등 외부 공간은 기본적으로 제주의 전통적인 주거공간을 답습하면서도 주택내부공간과 지붕형태, 마감재료 등에 있어서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현대적인 주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 1주택2가구형태의 피난민주택의 외관 (제주시 봉개동 소재).

 

▲ 피난민주택의 평면(제주시 봉개동 소재)

2) 후생주택(재건주택)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정부는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파괴된 주거환경을 재건하고, 또한 피난민들의 증가에 따른 심각한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주택건설에 총력을 기울였다.

주택건설을 포함한 전후 복구에는 미국과 UN의 원조가 큰 힘이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해방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실시되어왔는데 미군정이 끝나고 이승만 정권이 성립되면서, 미국의 원조는 장기적인 원조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국전쟁을 계기로 E.C.A에서 S.E.C원조로 바뀌어 1953년까지 지원되었다. 또한, 전쟁 중의 긴급구호물자제공 및 전후복구를 위해, UN이름하에 CRIK원조, UNKRA원조 등이 제공되었다. 휴정협정 후에 실시되었던 미국의 원조는 FOA원조, ICA원조, AID원조, PL480원조 등으로 다양하게 지원되었다. 전후복구를 위해 미국의 주도로 원조된 재료들은 콘크리트블록, 프리캐스트콘크리트 등 이었다.

그 당시 주택건설은 지금의 행정자치부에 해당하는 사회부가 주관하였는데, UNKRA(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의 원조를 받아 경인지역을 비롯하여 전국 각도에 후생주택을 건설하였다. 이때 지어진 후생주택은 소위 재건주택(再建住宅)으로도 불렸다. 제주도에서도 몰려온 피난민을 위해 후생주택을 건설하였다.

이와 같은 근대적인 주택의 제공은 당시 집 없이 유랑생활을 하여야 했던 피난민들이나 4․3 이재민들로서는 새로운 희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물자난이 심각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주택건설에 따른 잡음도 많았던 것 같다. 1954년 3월28일 제주신보 관련기사를 보면(그림5), 건축자재는 지방 구호위원회에서 배급하였는데, 피난민에 대한 건축자재 배급에 있어서 2만원의 보증금과 지방유지의 보증을 요구하는 등 피난민들로서는 불가능한 조건이어서 많은 불만이 있었으며, 대부분 유지들이 입주하였다고 한다. 이는 실제로 후생주택을 건축하고 현재까지 살고 있는 입주자의 증언과도 일치하고 있다.

▲ 후생주택관련 제주신보 관련기사(제주신보 1954년 3월28일 기사)

제주도에 건설된 후생주택은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신문기사 등의 기록으로 보아, ICA원조에 약 20호 정도의 주택이 일정한 부지를 구획하여 집단적으로 건설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제주도에 남아있는 후생주택은 몇 채 되지 않으나, 제주시 삼도1동에 남아있는 후생주택의 배치를 보면, 제주도의 전통적인 배치방식과 달리, 일정한 토지를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해, 집단적으로 지어졌다. 부지를 실측한 결과, 1가구가 건설되도록 구획된 부지의 면적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략 254-275㎡ 정도였다. 대한주택공사의 자료에 의하면 주택의 규모는 9평 규모가 건설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삼도1동에 남아 있는 후생주택을 조사한 결과 9평과 18평 2종류가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 후생주택의 배치도  및 외관 (제주시 삼도1동 소재)

18평의 평면은 마루를 중심으로 방(3개)과 부엌(1개), 다용도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화장실을 주택내부에 두고, 또한 화장실을 거쳐 욕실로 들어가는 상당히 서구식 평면구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장실이 재래식이어서 냄새가 나고 제주실정에 적합하지 않아 평면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른 용도로 변경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구조는 흙을 구워 만든 블록을 쌓아 벽체를 구성하고 그 위에 회 바름으로 마감하였다.

▲ 후생주택의 평면(18평)

3) 4․3 원주민 복귀주택

4․3사건 당시 소개령에 의해 해안마을 혹은 4․3성(혹은 전략촌)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던 주민들은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원주지로 복귀하지 못하고 임시거처에서 생활하거나 부분적으로 마을에 입주하곤 하다가, 1960년이 들어서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혁명정부도 지역현안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4․3사건 해결이었다. 이전까지는 일부 산사람들의 소탕 등의 이유로 원주민 복귀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일부에서는 건축자재의 제공이나 일부개조에 의한 입주형태의 복귀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원주지 복귀 사업’을 실시하여 4․3사건으로 재화를 만난 중산간 지대 산재부락 주민들에게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추진하였다. 옛 농토에 집을 지어주고 당분간의 생활비까지 지원하는 등 소개령에 의한 장기간의 물적 심적 피해를 보상했다.

당시 1962년 4월4일자 제주신보기사를 보면 혁명정부하의 현역군인출신 김영관 지사가 천호(千戶)를 대상으로 원주지 복귀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그림9) 실제로 1962년 11월13일 저지리 명이동에서 12세대 43명의 입주식이 거행되었고 행사에는 혁명정부의 귀빈이 참석하였다는 기사를 통해 혁명정부의 적극적인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 5∙16군사정부 이후 수립된 1960년대 제주개발계획 관련 신문삽화를 통해 43이재민 정착개간사업 등 적극적인 개발사업구상을 엿볼수 있다.(제주신보 1963년 1월 4일 기사).
▲ 김영관 지사의 주례회견에서 밝힌 천호(千戶)4․3 원주지 복귀사업관련 기사(출처:제주신보 1962년4월4일기사)
▲ 저지리 명이동에서 거행된 4․3원주지 복귀 입주식. (출처:제주신보 1962년11월13일기사). 혁명정부의 귀빈을 모셔서 입주식을 거행했다는 기사가 혁명정부의 적극적인 의지를 반영하고 있음 보여준다.
▲ 4․3 원주민 복귀 입주식. “오늘의 이 기쁨 혁명…”이라는 문구가 보이고 집집마다 태극기와 만국기가 장식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짐착할 수 있는 사진이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2009)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도서출판각)

1962년 4월4일 김영관 지사가 주례회견을 통해 밝힌 천호(千戶)복귀사업이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에 몇 호를 건설하였는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의 신문기사를 토대로 1차 사업에서의 주택 건설지 분포를 작성해보니 산북의 중산간 지역에 집중되었다. 2차 사업에서도 800세대 건설의 분배에 있어서도 제주시 190호, 북제주군 320호, 남제주군 290호가 배정된 것으로 보아 상당수가 산북 지역에 집중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4․3 원주민 복귀주택의 건설지 분포. (당시의 관련 신문기사 자료를 근거로 작성한 것.)

당시의 지원내용을 보면, 식량뿐만 아니라, 주택, 개간농지, 가축, 농사자금까지 지원하였다. 주택의 경우는 1호당 2만5000원(제2차 사업에서는 4만원)을 지원하였는데, 그 당시 도민 1인당 소득이 3만658원(1965년 기준)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지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을 두고 ‘한라산 횡단도로 포장공사’와 더불어 혁명정부가 보여준 2대 영단이라고 까지 표현하였다.

▲ 원주민 복귀주택의 외관. (제주시 봉개동 소재) 4․3 원주민 복귀주택의 평면(오른쪽).

당시 신문에 게재된 입주식 사진의 주택형태와 비교해 볼 때, 봉개동 등 일부지역의 4․3 원주민 복귀주택은 거의 원형으로 판단되는데, 외부는 제주의 현무암으로 벽을 쌓고 목구조 양식의 트러스에 함석지붕이었으나, 현재는 함석지붕 위에 슬레이트로 지붕 개량되어 있으며, 내부 공간은 마루를 중심으로 방과 부엌이 구성된 형태로서 기본적으로 제주 전통주거형식인 초가의 평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주택의 규모는 보통 9~12평으로 되어있다. /김태일 제주대 건축학부 교수

이번 연재는 필자가 2005년에 발간한 '제주건축의 맥'의 원고내용을 기초로 글과 사진을 새롭게 정리한 것입니다. 下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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