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지의 걸으멍 보멍 들으멍 (41) 일본 오사카에서 만난 용담 할망

퐁낭(팽나무) 그늘을 찾아 걸으며 할망 하르방을 만나야 할 여름, 나는 잠시 섬을 떠났다. 내가 다니던 일본의 한 대학에서 제주 할망 하르방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학생들의 인터뷰조사를 돕는다는 임무가 생겨서다.

향한 곳은 일본 시마네현(島根県) 오키군(隠岐郡)에 위치한 작은 섬 아마쵸(海士町). 오사카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려, 항구에서 고속선을 타고 다시 4시간을 가야 닿을 수 있는 머나먼 섬이다. 흥미롭게 이야기하자면, 일본의 섬 중에서 독도에 가장 가까운 섬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닷새간 머물며 우리 일행은 많은 ‘지이상, 바아상’(할망 하르방의 일본말)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스무 명 남짓 되는 젊은 대학생들과의 동행길이었다.

▲ 섬 할망의 웃는 모습은 제주도나 일본이나 한결같이 평화롭다. ⓒ정신지

섬의 아름다운 풍경과 평화로운 사람들의 모습에 즐거워하면서도 그들은 잔뜩 긴장해있다. 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해야만 졸업장을 얻을 수 있는 학생들이기에, 가방에 넣어 왔을 그들의 수영복은 한동안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그런 그들을 응원하고, 밤늦도록 녹음해 온 인터뷰를 글로 옮기고 있는 그들에게 ‘이제 그만 하고 자라’고 닦달하는 것이, 철없는 선배인 내 역할이었다.

그렇게 합숙하면서 학생들은 하루하루 배워갔다.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다가가 살며시 인사를 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법. 그들의 삶을 깨알같이 기록해나가며 서민의 역사를 써 나가는 법. 이십 대 초반의 오만가지 고민을 다 들고 섬을 찾은 학생들은 그곳에서 만난 섬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인해 많은 자신의 문제들을 치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취업난에 시달리고, 미래가 불안하기만 한 이십 대의 청춘들이다.

나 역시 그랬었다. 대한민국의 지긋지긋한 입시에 시달리며 대학 따위 절대 가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거늘, 우연한 계기에(?) 들어간 일본의 대학에서 나는 배웠다. 도서관에 박혀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일단 밖으로 나가서 ‘걷고, 보고, 듣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내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고향 제주도에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실습의 마지막 날, 학생들과 마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섬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과 청년들, 좋은 직장 때려치우고 섬으로 내려와 농부가 되고 어부가 된 젊은 육지(?) 이주민들, 이장님과 선생님들, 모두 모인 앞에서 학생들은 각자가 느끼고 배운 것을 발표해야 했다. 긴장해서인지 감동을 받아서인지 몇몇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는 그것이 어느 곳이든 진심으로 통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정신지

 

나 역시 그들 앞에서 제주 할망 하르방의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얻었는데, 보고 들은 적도 없는 제주의 슬픈 역사와 할망 하르방들의 이야기에 감수성 예민한 몇몇 소녀들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특히, 중국에서 유학 온 한 여학생이 발표를 마친 내게 와서, ‘전쟁에서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나서 듣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라고 말했을 때는, 온몸에 찌릿찌릿 전기가 흘렀다.

그렇게 한참, 서로 다른 섬의 할망 하르방 이야기가 남녀노소 국적을 불문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밤이었다. 보말과 소라를 상다리 꺾어지게 차려 맛있는 섬의 술을 마시며 다 함께 춤을 췄고, 나는 연회의 마지막 무대에서 모두를 위해 피아노를 치며 아리랑을 불렀다. 보잘것없는 노래솜씨이지만, 함께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몇몇 노인들의 모습이 감동적이던 그런 밤. 그곳이 일본이든 한국이든, 마음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는 진심으로 통하는 법이다.

외딴 섬에서 살아가는 깊이 있는 할망 하르방들의 삶에서 받은 감동이, 섬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용기가 되어주었다. 눈이 부시게 파란 하늘과 투명한 바다, 화산섬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가장 맛있는 쌀을 경작하는 초록빛 논이 펼쳐지는 아마쵸의 풍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섬의 풍경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던 것은 섬 사람들의 마음이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몸과 마음으로 기록하는 것에 성공한 학생들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작은 섬에서 커다란 배움을 얻고 무사히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 오사카, 코리아타운의 용담동 할망

잽싸게 오사카로 돌아왔다. 개인적인 용무로 잠시 일본에 와 있기는 하지만, 나의 본분은 ‘걸으멍, 보멍, 들으멍’ 제주의 할망 하르방을 만나는 것이 아니던가? 이 미치도록 즐거운 사명감을 배낭에 짊어진 채 내가 향한 곳은, 일본에서 가장 제주도 사람이 많이 산다는 오사카 츠루하시(鶴橋) 근방의 코리아타운이었다.

장시간의 버스여행을 마치고 도착한 오사카의 츠루하시에는 한글 간판이 빼곡하다. 김치를 비롯한 한국 음식을 파는 식료품 가게, 삼겹살 집, 미용실, 없는 게 없다. 한류 붐이 일어나고부터 부쩍 바빠진 츠루하시는 일본이 아니라 서울의 골목시장에 와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

▲ 이곳이 동문시장인지 츠루하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이곳에는 제주인 교포가 많이 모여 산다. 발 길 닿는 곳 마다 제주도다. ⓒ정신지

 

하지만 이를 어쩌나. 츠루하시를 가득 메운 한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너무나 바쁘다. 물건을 살 것이 아니면 다가가서 말을 걸 수도 없을 만큼 모두의 손과 발이 분주하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일하는 교포들에게 다가가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더욱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본에 일을 하러 와 있는 사람도 많으니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한참을 걸으며 시장을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갑자기 어깨에 힘이 쫙 빠진다. ‘이렇게 빡빡한 일정으로 할망 하르방을 만나겠다고 계획한 것부터가 잘못된 것일까?’, ‘저 많은 사람 중에 정말 제주도 사람이 있기는 있을까?’ 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기 시작한다. 배는 배대로 고프고, 목은 마르고, 날은 또 왜 그리 더운지 무거운 배낭 때문에 온몸이 땀범벅이다.

▲ 한류 붐이 생긴 후, 츠루하시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상인들 모두가 너무나 분주해서 말 붙일 틈이 없다. ⓒ정신지

결국, 나는 자포자기 상태로 눈앞에 보이는 음료수 가게로 들어갔다. 코리아타운답게 한여름의 노점상은 팥빙수를 팔고 있다. 상점 한구석에 앉아 시원한 레몬주스 한 잔에 목을 축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허리가 굽은 작은 체구의 할망 한 분이 주스를 사러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는 내 앞에 앉으셨다.

“여행 중인가?” 할망이 대뜸 일본말로 내게 말을 건다.
“그런 건 아니고....”
“아가씨 재일교포야? 근데 일본말을 잘하네?”
“아니 그게 아니고, 제가 한 십 여 년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해서 일본어를 하긴 하는데, 일본인이 아니고 제주도에서 온 한국 사람이에요.”
그러자 갑자기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서툰 한국말로 내게 말했다.

“어? 제주도? 내 고향은 제주시 용담 한두기야!”

하늘이 나를 도왔다고 자부한 순간이다. 역시 만남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순간 저절로 찾아온다. 늘 굳게 믿고 있는 그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며, ‘앗싸!’ 하고 입꼬리가 귀까지 늘어지던 순간이다.

“나는 오사카에서 나고 여기서 컸어. 올해 여든 여덟 살. 어머니가 전쟁 때 노동자로 와서 결혼하고 육 남매를 낳고 우릴 여기서 길렀지. 어머니는 해방 후에 제주도로 가서 돌아가셨어. 전쟁 때 일본에 와서 우리 어머니, 고생을 한 바가지 했어.”

할망은 제주도에서 왔다는 내가 반가우셨는지 한참 말씀을 이어가신다.

“나는 두 번 제주도에 다녀왔어. 어머니 오하카마이리(벌초의 일본말) 할 때랑 죽은 남편 묻으러 갔을 때. 제주도는 참 좋은 곳이야. 바다도, 산도, 세상에 그렇게 좋은 곳이 어딨어? 일본 천지를 가 봐도 그런 곳은 없어. 다시 가고 싶은데 몸이 아파서... 다리가 많이 아파서 이제 여기까지 나오는 것도 힘들어. 아마 다음번에는 내가 죽어서 돌아가겠지? 그래도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야.”

할망은 한국어와 일본어, 그리고 가끔 제주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이야기하신다.   그런 할망의 언어를 아무 거리낌 없이 알아듣고 있는 나 자신을 신기해하며, 나 역시 3개국 비빔밥 언어(?)로 그녀가 레몬 주스를 마시며 내뱉는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엄마는 아들을 하나, 딸을 다섯 낳았어. 모두 여기서 태어났지. 그때는 다들 돈이 없으니까 일본사람들이 시키는 일 하면서 너무 힘들게 살았어. 엄마는 매일 아침 세 시에 일어나서 집단 농장에 나갔어. 일본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두들겨 맞기도 하고, 얼마나 한국 사람을 못살게 굴던 때였는데. 그래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그 넓은 밭에서 작은 몸으로 밭일을 한 거야.

그것으로는 먹고살 길이 없어서 엄마는 일본인 집에 청소부로 다니기도 하고, 들판에서 고사리를 꺾어다가 장에서 팔기도 했어. 참 똑똑한 여자였거든. 일이란 일은 모조리 해내는 여장부 같은 사람이었고… 나더러 그렇게 살라고 하면 나는 절대 못해.

……엄마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었어. 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가끔 우리 집에 제주도 청년들이 와서는 ‘어머니, 밥 먹을 곳이 없어요. 밥 좀 주세요.’ 하면,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밥을 모조리 그 사람들에게 줬었어. 같은 고향 사람들과는 살아도 함께 죽어도 함께여야 한다 하시면서. 그러니까 늘 집에 사람들이 많이 왔었지.

아버지는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사람인데, 장남이라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공부를 많이 시켰어. 그러니까 우리도 죽으라고 한글 공부를 했지. 엄마 일 도와서 돈 벌어야하는데도 엄마만 일하고 자식들은 가정교사를 붙여가면서 한국말을 배웠어. 밥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의 자존심이라고 아버지는 늘 말했기 때문에. 그런 아버지랑 살아도 엄마는 불평 하나 안 하고 한평생을 순종했어. 지금 여자들은 절대 그렇게 못 하지! 다 도망가지! 하하하.”

10년 전, 할망의 남편이 병으로 돌아갔을 적에 그녀는 두 번째로 한국 땅을 밟았다고 한다. 첫 번째 귀향도 할망 어머니의 벌초 때문이었고, 그 후로 간 것도 남편의 유골을 서울의 납골당에 모시러 갔을 적이다. 그렇게 일본에서 사는 제주인들은 평생 조국과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뼈가 되어서야 이 땅에 돌아오고 있다.

오사카에서 제주까지는 비행기로 한 시간 반, 내게는 농담처럼 짧은 거리다. 하지만 할망 마음에 존재하는 고향은 실재보다 아주 먼 곳에 있나보다. 섣불리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가 꼭 헤아려야 할 그들과 우리의 거리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망은 말했다. 고향이 최고라고. 사람으로 태어나서 고향을 마음속에 가지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라고...

▲ 짧은 시간이었지만, 레몬 주스를 함께 마시며 고향이야기를 해 주신 할망.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라며! ⓒ정신지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재일교포 2세대이다. 할망의 장남이 벌써 일흔이 되었으니, 할망의 가족은 벌써 5대째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 남편, 자식, 고향 그리고 조국…. 두 시간 남짓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할망은 그것들에 관한 기억의 단편, 어쩌면 오로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특정한 기억만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할망 나이 올해 여든여덟이니 그럴 만도 하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기고 모조리 털어내는, 그렇게 할망은 훌훌 가벼워지는 작업을 하시는 중이다.

너무 오래 앉아 이야기했다며 할망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신다. 홀로 산지 벌써 10년이 넘었다는데, 할망은 무슨 연유에선지 레몬 주스를 두 잔 시키셨다. 그래 놓고는, “아이고 내 정신이 이래. 지금도 뭘 시킬 때는 꼭 두 개를 시킨다니까! 하나는 포장해줘.” 하며 웃으셨다.  짧은 만남이지만,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으니 할망이 말씀하시길, “늙은 노인 사진은 뭐하러 찍어? 오늘은 머리도 안 하고 부시시하게 왔는데…, 그래도 고향에서 온 사람 만나서 너무 행복해. 이런 날이 있어야 나도 ‘나에게는 돌아갈 제주도가 있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거든!”

그렇게 가게를 나서던 할망이 손을 흔들며 내게 “사랑해요!” 라고 말했을 때, 솔직히 나는 놀랐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할망 눈에 비춘 나는 타인이 아닌 ‘내고향 제주’였을 것이다. 그런 할망의 뒷모습을 향해 나 역시 크게 손을 흔들며 생각한다. 언젠가 할망이 고향 용담동으로 돌아오는 날, 그것이 슬픔이 아닌 기쁨이기를! 제주의 넓은 하늘과 용두암 푸른 앞바다가 환하고 즐겁게 할망을 맞이하기를!<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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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제주의소리> '걸으멍 보멍 들으멍'이란 코너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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