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지의 걸으멍 보멍 들으멍 (42) 한 눈으로 걷고 온 마음으로 살아온 할망

먹을 것이 없어 나무에 열매라도 열리면 모두가 다투어가며 그것을 따먹던 시절, 할망은 아홉 살의 꼬마였다. 나무에 오르려다 발을 헛디뎌 떨어진 꼬마는 눈에 나뭇가지가 박혀 의식을 잃을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어멍은 친척과 함께 꼬마를 업고 하룻밤 반나절을 꼬박 걸어 제주시에 있는 병원까지 달려갔으나 이미 너무 늦었다. 제대로 된 약도 없고 먹을 것도 없던 시절, 제주도에서 가장 용하다는 병원도 꼬마의 눈을 되살릴 의료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괜찮다, 괜찮다. 그래도 한쪽 눈이 있지 않으냐.’ 어멍은 딸을 달랬다. 하지만 아방은 병원에서 돌아온 어멍과 어린 딸을 보며 버럭 화를 냈다. “눈도 뵈지(보이지) 않는 지집아이(계집아이), 확 죽게 내 불지 무사 봉강와서(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왜 데려왔어)!” 하고 소리를 지르며 상처투성이인 꼬마의 작은 몸을 밭에 내동댕이쳤다. 어멍은 꼬마를 끌어 앉고 밭에 주저앉아 오열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는 너무 놀라서 울지도 못했다. 딸이 눈을 잃은 슬픔에 어멍도 아방도 넋을 놓고 만 것이다.

그렇게 할망의 외눈 인생이 시작된 1948년은 공교롭게도 제주도인 전체의 넋을 놓게 한 몹쓸 4.3사건이 시작되던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모든 기억의 시작을 짧고 굵게 마무리 지으며 할망은 이처럼 말했다. “아이고 겨난(그러니까), 결국 보리불래(보리수 열매)는 한 알도 먹어보지 못행이네(못하고) 이추룩 되부러시니(이렇게 되어버렸네)…허허허.”

지난겨울 동백꽃이 필 무렵, 우연히 길을 가다가 할망을 만났었다. 새로 생긴 버스 정류소도 있는데, 낡은 구식 정류장에 홀로 앉아 할망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육지에 가서 자식들과 설명절을 지내고 올 것이라며 설레어하시던 모습이 나를 한참 기분 좋게 해주었다. 조용한 말투로 존댓말을 써가며 할망은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들려주었더랬다.

“내 눈이 이추룩(이렇게) 멀지 안 해시민(않았으면) 이디로(여기로) 시집오지는 안했을건디(않았을 텐데), 열아홉 날 적에 마을 어른이 중매를 서서 멀리 한경면에서 이디까지 시집을 왔어요. 20년 전에 돌아가신 남편은 양쪽 눈이 어신 사름인디(없는 사람인데)…게난(그러니까) 일도 못 하고, 한 짝이라도  눈이 이신(있는) 나가(내가) 조식들(자식) 낳앙 기르멍(낳아서 기르면서) 어떵어떵 살아온 거마씨(그럭저럭 살아온 거지요)...이제는 다 욕앙(자라서) 시집 장게가곡(장가가고) 살암시난(살고 있으니) 나는 이디 혼자 이추룩(이렇게) 살아도 막(무척) 행복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던 표정과 말투, 할망의 모든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어두운 이야기 같으면서도 밝고, 슬픈 것 같은데 웃고 있는 할망에게 나는 순식간에 푹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제발 버스가 늦게 오기를!’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했지만, 이야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버스는 도착했고 할망은 종종걸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그 짧은 만남이 너무나 아쉬워 그 후 몇 번인가 다시 할망의 마을을 찾았으나 매번 허탕을 쳤었다. 그렇게 봄, 여름이 지나 가을이 왔고, 또 다른 명절인 추석이 코앞에 와 있다.

▲ 할망의 마을엔 가을이 한창이다. 새로 산 중고 스쿠터를 타고 부릉부릉 달리는 길, 멈추어 서는 곳 마다 정겨운 풍경이 펼쳐진다. ⓒ정신지

하지만 만날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만나게 되는 법이라지 않던가? 얼마 전 큰 맘 먹고 장만한 중고 스쿠터를 타고 무작정 집을 나섰었다. 지도도 없고 계획도 없이 시골 길을 마음 가는 대로 달렸다. 버스를 타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고, 언젠가 와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 작은 올렛길들을 기웃거리며 달렸다. 작정하고 누군가를 만나러 찾아온 것은 아니었으나, 나의 직감은 오랜만에 그 할망이 사시는 마을로 나를 인도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할망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 따위는 없었다. 그저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길을 따라 달리는 것이 행복했을 따름이다.

마을 주변에는 4.3사건을 계기로 사라져버린 동네 터가 있었다. 이제는 집 한 채 없는 허허벌판이지만, 4.3사건이 일어나기 전 그곳에는 집들이 있었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단다. 밭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퐁낭(팽나무)과, 밭담이 되어버린 올렛담이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그런 가을 풍경들을 무심히 바라다본다. 그렇게 쭉 아무것도 없는 벌판을 달리다가 마을 올렛길 안으로 들어섰는데, 마침 핸드카트를 끌고 집으로 들어가려는 할망 한 분을 만났다. 자세히 보니 내가 그토록 다시 뵙고 싶어 했던 그 할망이 아닌가!
 
하지만 할망이 나를 기억할 리는 없다. 한참 자기소개를 하고서야 할망은 “아 그때 만난 그 아가씨로구나!” 하며 나를 기억해 내셨고, 할망 집 마루에 둘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허탕을 치는 날이 많은 것처럼 나에겐 믿기지 않으리만큼 운이 좋은 날도 많다. 기쁘고 또 기쁜 가을날이다.

▲ 할망의 마을엔 가을이 한창이다. 새로 산 중고 스쿠터를 타고 부릉부릉 달리는 길, 멈추어 서는 곳 마다 정겨운 풍경이 펼쳐진다. ⓒ정신지

혼자 사는 할망의 조촐한 살림이 쓸쓸해 보이지 않는 것은, 벽에 걸린 수많은 자식 손주 사진 때문일까? 아니면 마당 한편에 널려있던 빨간 가을 고추며 주렁주렁 열린 물외와 호박, 그리고 예쁘게 핀 봉선화꽃 덕분일까? 말수도 없고 체구도 조그마한 일흔셋의 할망의 일상은 참 행복해 보인다. 그 행복이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인지, 나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하지만 할망과 마주 앉아, 그이의 지난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내 마음은 아프기도 하고 찌릿 거리기도 했다.

4.3사건이 제주를 휩쓸고, 한국전쟁이 나라를 뒤엎는 동안 할망은 꼬마에서 소녀로 성장했다. 이유 없이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도망 다니는 것을 할망은 똑똑히 보았다. 눈 한쪽 없는 것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장애를 가진 이들은 언제나 어둠 속의 또 다른 어둠에 갇혀 지내야 했다. 아방은 남 보기 부끄럽다며 소녀를 늘 방 안에 가두어 놓았고, 열다섯이 되던 해에는 시집이나 가라며 장애를 가진 남자들을 집으로 맞아들였다.
 
“허이고, 나신디 결혼허래(나하고 결혼하러) 오는 사람들은 완전 다 불구자라. 간질 다리, 말 모로기(청각장애인), 그런 사람들 아니면 키 안 큰 사람들. 그거 배리난(그걸 보고 있자니), ‘아이고~, 어릴 적에 죽어불 걸 살아졌구나(죽어버릴 것을 살아버렸구나)!’ 싶엉 이네(싶었지)… 겐디(그런데) 이제 호끔 욕아가난(조금 성장하니까), 집에 있지 안혀고(않고) 몰래 나왕(나와서) 또래 아이들이영 낭 폴랜(나무를 팔러) 모슬포에 낭장시(나무장사)를 가서(갔어). 그 땐 어른이고 뭐고 다 낭 폴래 갔주게. 겡(그래서), 낭 판 돈은 어멍 주고 호끔씩 그추룩(그렇게) 밖으로 내댕기당(나다니다가), 시집 안 가캔(가겠다고) 돌아나 부렀주게(달아나버렸어). 하하하.”

그러던 어느 날, 장에서 나무를 팔다가 배를 타고 멀리 이북에서 서울을 거쳐 제주도로 피난을 왔다는 한 가족과 만난다. 할망 나이 열 여섯이 되던 해의 일이다.

“그땐 모슬포에 피난민이 와글와글. 어떤 여자가 낭 사래 왕이네(나무 사러 와서는) 우리 어멍신디(에게), ‘야이 우리 줍서(이 아이 저희 주세요)’ 앵 고란(라고 말을 했어). 데려강(데려가서) 자기네 집에서 일 부리캔(시키겠다고). 나가 야무짐직 허댄(야무져 보인다면서). 그 가족은 이북에서 부산으로 왕이네(와서) 처음에는 남원쪽더래 강(남원읍 쪽으로 가서) 빙빙 돌당이네(돌다가) 모슬포로 넘어 온 거라. 금덩이 요만치한(요만한) 거를 폴앙이네 장사를 시작행(시작해서) 돈을 무쟈게 벌었주게(많이 벌었지).”

▲ 마당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할망의 낫. 저것들을 손에 쥐고 한 평생 땅을 일구고 가족을 일구어 왔다. ⓒ정신지

그들은 소녀에게 집안일을 해 줄 일꾼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고, 소녀는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 집에 살며 집안일을 하고, 아기들을 돌보았으며 때로 장사를 돕기도 했다. 당시 모슬포에 와 있던 군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피난민 가족은, 돈도 있었거니와 지식인 가족이었다. 큰아들은 서울에서 대통령이 나왔다(고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배재학당에 다니고 있었고 큰딸은 이화 여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할망은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저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일하고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제법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말도 않고 집안 식구들이 그들의 가게에서 이것저것 외상을 해버린 결과, 소녀가 받아야 할 일년치의 임금은 모조리 빚이 되어 버렸다. 결국, 한 푼도 못 받고 일 년 치 일을 한 대가로 가족들의 외상값을 갚아야 했지만, 그것조차 소녀를 화나게 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는 집 밖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아이고, 일행(해서) 돈이라도 받아시민(받았다면) 뭐하지만, 게도(그래도) 나가 고생행(고생해서) 큰 오라방이 장게라도 가시난(장가라도 갔으니) 그걸로 됐주.” 미소를 머금은 채 할망은 지난 날을 회상했다.

그이가 열일곱 될 즈음, 모슬포에 상주하던 군인들은 하나 둘 제주를 떠나 육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군인을 상대로 장사하던 집이니 군인을 따라 제주를 떠나야 했다.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던 소녀에게 그들은 자신들을 따라 서울로 가자고 권했지만 할망은 그것을 거절해야 했다.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자신감이 있었더라면 무작정 따라나섰을 것이었거늘. 자신과 같은 장애인은 서울에 가면 금방 죽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어멍을 두고 떠나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제주를 떠나며 상인 가족은 소녀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사소한 집안 살림이며 놋그릇에 수저며 이불까지…. 시집갈 적에 쓰라며 귀중한 물건들을 죄다 주고 제주를 떠났다. 하지만 자신의 결혼상대는 분명 자신보다 심한 장애를 가진 남자일 것이라 단정하고 있던 소녀에게는 시집가서 이 물건들을 써야겠다는 설렘도 바람도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결혼 따위 하지 않고 지금처럼 살고 싶었다. 나무를 팔고, 남의 집에서 일을 하며, 무엇을 해서라도 자신의 힘으로 그냥 혼자 살고 싶었다. 그래서 때마침 결혼을 앞두고 있던 친척에게 받은 물건을 모조리 줘버렸다.


그리고 이 년이 지났다. 여차저차 살다 보니 가난이 지겨워졌고, 중매를 선 이웃 아주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지금의 마을로 시집을 왔다. 상대는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어두운 세 살 위의 청년이었다.

“시집을 오랑 보난(와서 보니) 서방은 좋은 사람이라. 게도(그래도) 눈이 멀엉 일을 못 허난(못 하니) 호끔 속상했주게(조금 섭섭했지) 처음에는. 구들 하나 정지(부엌) 하나 이신(있는) 호끌락한(작은) 집, 나도 4.3 때 소개(피난) 갔을 때에는 그 정도 한 집에서 살았지만은, 놈들(남들) 다 새집 지엉 살암신디(짓고 사는데) 우리는 그 추룩한(그런) 헌 집에서 둘이 살기 시작해서. ‘어떵 살아질건고(어떻게 살아나가지)?’ 하당보난(하다 보니) 아기를 낳은 거라. 우리 큰 딸.”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새로운 환경에서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면서 삶은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닌 ‘살아 내어야 할’ 무언가로 바뀌고 있었다.   

▲ 곧 있으면 고향을 찾아 올 자식손주 생각에 할망 얼굴에는 내내 홍조가 돈다. 할망은 이제 더욱 행복하실 일만 남았다. ⓒ정신지

“우리 서방님은 눈은 멀어도 잘도 착한 사람이어나서(이었어). 일을 못 허난(못 하니까) 나(내)가 놈의 집에 강, 밭병작 곡식 병작도 허고 했주만은, 아기들이 호끔 커 가난(가니까) 밭일도 도와주고. 시키지도 안했주만, 그 호끌락한(조그마한) 아기들이 뱅애기마냥(병아리처럼) 어멍 쫓아다니멍 열심히 일을 도와라(도와줬어).”

자식 이야기를 하며 할망 입가에는 환하게 웃음이 맴돌았다. 힘들게 일하는 어멍과 거동이 불편한 아방 밑에서 자란 자식들은 누구 하나 삐뚤어지지 않고 곧바로 자랐다. 먹을 것이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학교에 못 가는 아이는 못 가는 대로 불평하지 않았으며 늘 서로를 도왔다. 어멍과 아방이 서로에게 보인 꾸밈없는 삶의 자세를 보고 자란 자식들이니 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할망은 구태여 자식자랑도 하지 않는다. 그저 부지런히 살았다고 이야기할 뿐, 자랑할 것이 태산 같을 자식들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 것은 진작 그이 자신이 아니다. 할망과 한참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아들 결혼식의 청첩장을 돌리러 할망 집을 찾은 이웃집 하르방이, 할망을 대신해 이 집의 자식들이 얼마나 공부를 잘했고 사회적으로 성공을 했는지, 얼마나 효자와 효녀이고 얼마나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고 있는지를 무려 한 시간 남짓 말씀하고 가셨다. 남의 자식 자랑을 그토록 즐겁고 정열적으로 늘어놓으시던 옆집 하르방을 보며, 또다시 나는 할망의 행복을 가늠할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알맞은 모양으로 태어난다던데, 할망의 모습이 꼭 그렇다. 남들 보다 하나가 부족했지만, 가지고 태어난 모든 것을 주고 또 주며 살아오신 할망은, 이제 받을 일만 남으신 게다. 자식자랑까지 대신해 주시는 이웃까지 지닌 할망이니, 이보다 어찌 더 행복할 수 있겠는가?

▲ 집을 나서는데 당신이 드실 사탕까지 모조리 내 주머니에 넣어주시던 할망. 여지껏 먹은 사탕중에 가장 달콤하고 감동적인 맛이다. ⓒ정신지

곧 있으면 다가올 추석엔 자식들이 고향을 찾는다. 이제 할망이 반찬거리를 싸 들고 명절 때 마다 육지를 향하지 않아도 된다. 올해부터는 다리가 불편하신 어머니를 위해 육지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교사로 일하고, 좋은 회사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아들딸 손자 손녀가 우르르 찾아와 할망에게 행복을 주고 갈 것이다.

그 설렘 때문일까, 할망 얼굴에 끊임없이 홍조가 돈다. 여름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훈훈한 행복을 전해 주신 할망 덕분에 이번 가을은 왠지 좋은 예감으로 시작이 된 기분이다. 길을 나서기만 해도 만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에 행복은 들꽃처럼 피어있다. 두 눈이 멀쩡한 우리가 그 행복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이야 말로 장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설령 눈이 불편한 사람일지언정, 마음으로 그 행복을 볼 수 있는 힘과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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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는 ?

   

이 여자, 택시 기사들과 대화 나누길 즐기는 ‘수다쟁이’다. ‘역마살’도 단단히 타고났다. 거기에다 ‘촌스러움’까지 좋아하는 독특하고 야무진 여자다. 그녀의 이름은 정신지(32). 파주·부산 출신의 부모님 아래 서울서 태어나 여섯 살에 제주로 이민(?) 왔지만 스무살에 다시 서울로 나갔다가 일본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이라는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동안 세계 17개국의 섬·지방·대도시를 떠돌며 사람과 집단, 그 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지난 봄, 일본의 국립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12년간의 지구촌 유목 생활을 마치고, 태어난 곳은 아니되, 자신을 성숙하게 키워준 ‘진짜 고향’ 제주로 지난 봄 돌아와 부모님이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제주의소리> '걸으멍 보멍 들으멍'이란 코너를 통해 제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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