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우 지사와의 결탁은 '패착'입니다"

'눈길을 걸을 때(踏雪夜中去)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不須胡亂行)
내가 걷는 발자국이(今日我行跡)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遂作後人程)'
                                                          (서산대사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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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일 소장님께,

어제 해괴망측한 소식을 듣고 내내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솔직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어차피 책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아 일찍 귀가하곤 9시 뉴스도 보지 않은 채 그냥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쉬 잠이 오지 않은 건 당연합니다. 뒤척이며 계속 소장님 생각을 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슬그머니 일어나 소장님의 기자회견 내용을 읽어봅니다. 무엇인가가 가슴을 조여옵니다. 피하고 싶어집니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다 다시 일어나 인터넷 신문을 뒤적이다 한숨을 쉽니다. 누웠다 일어났다를 몇 차례 반복하다가 지금 차분히 일어나 앉아 이 글을 씁니다.

소장님, 아니 예전엔 그냥 편하게 형님이라고도 불렀지요. 물론 지금은 4.3연구소 소장이 아니시니, 소장님이라 부르는 것도 어색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소장님과 함께 4.3 50주년 행사를 치르던 기억이 가슴 뿌듯하게 남아있기에 지금도 그냥 소장님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소장님, 저가 쓰는 이 글이 혹 소장님의 행보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분명 쓴 소리가 될 것이기에 조심스러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공개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사적으로 글을 전달할까 하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하게 충언을 드리는 게 옳다 싶어 이런 무례를 범합니다. 소장님을 존경했고, 여전히 소장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후배의 충심이니 부디 싫다 내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소장님이나 저나 모두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니 사관(史官)의 역할을 이해하실 겁니다.

새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합니다

소장님, 어제 분명 소장님 입으로 우지사의 입당에 '경의'를 표하셨는지요? 저는 지금도 그 말이 믿기질 않습니다. 이제 날이 밝으면 그건 오보라며 정정기사가 나오지 않을까 조바심 속에 기다려도 봅니다.

날이 밝아도 정정기사가 나오지 않으면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모른 척 넘어갈까요? 아닙니다. 그건 소장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구렁텅이에 빠진 소장님을 그냥 방치한 채 나몰라라 하는, 의리 없는 짓일 겁니다.
소장님, 우지사 입당이 소장님의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표몰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요? 그러니 당연하다고요?

하지만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소장님, 앞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나 소장님이나 모두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공부한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길이 옳은가를 잘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까? 역사는 단기적 승리를 비웃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궁극적 승리를 보여주었지요. 안 그렇습니까?

소장님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우근민 도지사의 삶은 도대체가 어울리질 않습니다. 소장님은 어둠 속의 한국사회에서 등불을 든 사람이지요. 그 어렵던 시절 4.3문제 해결을 위해 흘렸던 피눈물을 저는 기억합니다.

반면 우지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지사에 대해선 굳이 긴 이야길 하진 않겠습니다. 네티즌들이 쏟아내는 분노나 여성단체들의 반발을 조금만 생각해봐도 쉬 알 수 있을 겁니다. 시시콜콜 이야기하자면 내 입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열린 우리당을 '철새 도래지'라며 비웃는 글들이 많더군요. 글쎄 저는 그보단 '골동품 가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시대가 버린 그런 낡은 사고와 낡은 관행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걸 보면 그래요. 시대의 화두인 개혁과는 아주 정반대의 사람들 말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소장님. 유통기간이 지난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납니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낡은 관행을 부쉈기 때문입니다. 우린 그 힘을 믿어야 합니다. 현재 소장님에 대한 지지도가 상대 후보에 조금 못 미친다고 해서 아무 떡이나 덥석 물면 안 됩니다. 어렵더라도 새시대, 새희망의 흐름을 읽어야 합니다. 시민의 선거혁명은 낡은 정치에 대한 환멸, 그리고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청렴과 참신함을 보여줬을 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지사와의 결탁은 완전히 거꾸로 계산한 겁니다. 시대의 흐름을 놓친 거예요. 패착이란 말입니다. 새 것이 낡은 것을 밀어낼 겁니다. 역사가 증명하지 않습니까? 노무현의 당선을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탄핵 반대의 거대한 힘을 두 눈 뜨고 똑똑히 지켜 보고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계산이 안됩니까?

역사 앞에서

철없는 이야기라고요? 정치는 냉혹한 현실이라고요? 좋습니다, 소장님. 소장님의 셈법이 맞았다고 합시다. 그래서 지금 꾸는 꿈을 이뤘다고 합시다. 하지만 그게 소장님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겠습니까? 역사가 소장님의 행동을 옳았다고 평가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어려워도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역사는 소장님을 제대로 평가합니다.

소장님, 지금까지 소장님이 쌓아온 삶의 자취가 더렵혀질까 봐 두렵습니다. 그렇게 훌륭하게 살아오고서 말년에 험한 꼴을 당하시는 게 아닌가 무척이나 걱정됩니다. 좋은 평가로 영원히 사람들 기억 속에 남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요.

그러고 보니, 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2년 전이었나요? 주변에서 소장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많다고, 그러니 이젠 정계로 진출하셔야 한다고 바람(?)을 넣었지요. 그런데 그 결과가 이렇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차라리 고고한 학자로, 시민운동가로 남으시라고 권유할 것을.

물론 저는 참여가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했기에 적극 권유했던 겁니다. 진흙탕에서 몸 하나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여기에까지 이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에게도 책임이 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소장님을 위해 충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탄핵 반대를 위해서라면 어떤 세력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니요? 어쩌다가 거기까지 가셨습니까? 정형근이도 불러올까요? 전두환이나 노태우도 표에 도움이 된다면 꼬셔올까요?

우지사 입장에서야 똥줄이 탔을 겁니다. 대법원 판결도 앞에 두고 있겠다, 그러니 여당에 보험가입을 해야겠지요. 우지사야 원래 그런 사람 아닙니까? 하지만 소장님이 뭐가 아쉬워서 우지사의 입당에 '경의'를 표한다 말입니까?

소장님, 저가 괜히 격해졌네요. 용서하십시오. 걱정돼서 이러는 겁니다. 소장님의 그 아름다운 인생에 더러운 오물이 씌워질까봐 이러는 겁니다.
날이 밝나 봅니다. 창 밖이 제법 환해졌어요. 어쨌거나 지긋지긋한 선거, 빨리 끝났으면 합니다. 그래서 옛날 그 모습 그대로의 소장님을 뵙길 바랍니다. 아니 그 땐 그냥 예전처럼 '형님'하며 만나야겠지요.


소장님, 건강과 행운을 빌겠습니다. 우린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이기에 마지막으로 '역사 앞에서'라는 시 하나를 읽어드리며 글을 맺겠습니다.
.......

'역사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다 죽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처음이 나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이 처음을 결정한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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