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삼별초 항쟁의 최후의 보루였던 제주 항파두성의 축조 기술이 740여년 만에 베일을 벗었다. 

제주시에 따르면 항파두리 항몽유적(사적 제396호) 내성지 발굴 조사 결과 내성지에서 5동 이상의 건물지가 확인된 데 이어 건물지 내외부에서 갑옷과 와전류, 청자류, 철기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항파두성 내성의 위치와 건물 규모, 유물 등을 확인하기 위해 제주시는 (재)제주고고학연구소에 용역을 의뢰해 용역비 4억3200만원을 들여 이번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항파두리는 고려 원종 12년(1271년) 여몽연합군에 대항하던 삼별초군이 완도에서 제주도로 입도하면서 군사력을 재정비하는 시기에 축성한 방어용 성(城)이다.
 
3년 후인 고려원종 14년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성은 함락됐다. 이후 근대까지 방치되다가 1978년 6월 재정비후 일부 복원에 나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약 6000m 길이는 남동과 북서쪽으로 가장 긴쪽이 약 1458m이다. 남서와 북동으로는 가장 짧은쪽이 664m로 타원형이다.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눠져 있다.

▲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내성지 발굴 현장. ⓒ제주의소리

이번 조사 결과 항파두성 내성지가 삼별초의 이전 항전지인 진도 용장성의 건물지와 비슷한 건축방식으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됐다.

입지 조건에서는 두 곳이 차이가 나지만 모든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진도 용장성 내성지 건물지군과 유사하다.

건물지의 기단과 초석을 할석재를 썼다는 점이나 배수로의 형식, 다듬은 석재로 아궁이의 뒷벽을 시설한 점에서 용장성 건물지에서 나타나는 형식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연구소는 “강화도 고려 중성과 진도 용장성의 축성기술도 비슷한 점을 띠고 있어 삼별초 내 건축기술자 공병부대가 항파두성 내성지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내성지 발굴 현장. ⓒ제주의소리

청자류와 철기류, 청동류 등 출토된 유물 또한 강화나 진도에서 출토됐던 유물과 거의 동일하다. 연구소는 삼별초의 이동과 함께 항파두성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고내촌(高內村), 만(卍) 새겨진 명문기와도 소수 출토됐다. 고려 충렬왕 26년(1300) 기록에서 확인되는 16현촌 중 하나인 고내촌(고내현) 기와의 출처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확보됐다.

제주시는 순차적인 내성지 발굴조사로 축성방법과 구조, 규모 등 구체적인 기초 복원자료를 확보해 체계적인 내성의 보존․정비방향을 세우고 강화도․진도․제주도의 삼별초 유적간 성곽구조 및 축조방법을 비교 고찰하는 학술적 토대를 마련한다

한편, 제주시는 11일 오후3시 발굴조사에 대한 자문회의 발굴현장과 항몽유적지 휴게소에서 개최한다. <제주의소리>

<김태연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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