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10)건국준비위원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조몽구

- 일본으로 건너가 항일운동

   

조몽구(趙夢九, 1908~1973)는 표선면 성읍리에서 태어나 정의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공립제1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다. 정의공립보통학교 은사 김문준(金文準)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두 사람은 일본으로 건너가 1929년 8월 25일 신간회 오사카지회 확대간부회의에서 김문준은 검사위원장으로 조몽구는 간사후보로 선임되었으며, 12월 14일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 대표자 회의가 극비리 오사카에서 개최될 무렵 두 사람은 오사카 조선노동조합 대표로 참석,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약칭 ‘전협’)에 가맹하기도 하였다. 전협은 일본공산당의 외곽 지원단체로 일본공산당은 조선·대만의 독립을 중요 강령으로 삼고 있었다.  

1930년 제주출신 민족주의자들이 ‘우리는 우리 배로’라는 자주운항 운동이 추진될 때  조몽구는 문창래(文昌來)· 김달준(金達俊)과 협력하면서 동아통항조합(東亞通航組合)을 결성하여 운영하던 중 일본의 간계와 방해로 실패했다. 또 그해 1월 26일 오사카에서 조몽구의 노동운동 세력은 일본의 사회주의자 가다가와(北天葉)의 세력과 합쳐 제국주의 노선에 대응하면서 오사카 지방선거투쟁동맹을 조직하였다. 그 후 제국주의 노선에 대응하면서 전국산업별 노동조합 오사카지부협의회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해 5월초 ‘소비에트 러시아를 수호하라’, 또 ‘중국혁명을 수호하라’, ‘일본공산당 만세’ 등의 표어와 전협화학노조오사카 선전물 지방 뉴스란에 ‘전쟁과 노동자’란 팜플릿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일본공산당 기관지 ‘전쟁과 노동자’를 배포한 관계로 체포되어 1933년 7월 18일 오사카공소원(控訴院)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일본이 패전한 이후 사회주의운동에 기여한 인사들을 위해 오사카성[大阪城] 공원에 현창대판사회운동지전사(顯彰大阪社會運動之戰士)라는 비가 세워졌는데, 이 비에 김문준·조몽구도 일본인과 함께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일본에서도 평가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김문준의 항일활동

   

김문준(金文準, 1893∼1936)은 조천 출신이다. 조천은 많은 유림학자가 배출되고, 조정에서 파견되는 유배자들의 출입이 빈번한 곳이다. 어느 마을보다도 먼저 어려운 정치상황을 체험했으며, 거기에서 강인한 기질과 성품을 배웠다. 그 결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먼저 생각하는 기질이 형성되었다. 일제에 항거하는 불굴의 독립정신은, 그 당시 조천에는 일본인들이 발붙일 곳이 없었다는 사살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 중 가장 큰 사건은 1919년 조천만세운동이다.

김문준은 1915년 12월 조선총독부 농림학부 재학시절 「農夫歌」를 지어 교지에 발표한다. 가사 형식을 빌어서 농민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농촌계몽․ 농민계몽의 성격이 간한 작품이다.  1935년 「民衆時報」를 창간하여, 오사카에 있는 조선인을 지원하며 민중운동·민족운동의 기관지로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다.

한시도 잘 지어 『朝天誌』에서는 ‘文章超風 憂國之士’라고 그를 북돋우고 있다. 그는 독립운동가로도 이름을 날린 진보적 인사이다.  특히 호를 ‘목우(牧牛)’라고, ‘남쇠’라는 재래식 공구로서 이는 문지방을 파는 기구이다. 남쇠가 되어 독립이란 문이 여닫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특히 1918년 4월 정의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재임하면서 그 마을 성읍 출신 조몽구를 만나게 된다. 1927년 7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본 조선노동총연맹 산하의 오사카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과 동맹 오사카 노동조합 북부지방 상임집행위원이 되었다.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상가로서 결국 재일조선인노동총염맹 전국재표자회의에서 조몽구와 함께 중앙집행위원이 된다.

결국 김문준은 오사카 고무공장노조의 스트라이크를 배후에서 조종하였다는 이유로 구속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투옥 중에는 조몽구가 전협화학노조오사카지부 책임자가 되어 조직을 인수하였다.

1936년 5월 26일 김문준이 사망하자 조선인 일본인의 노동계가 합동으로 시신을 유리관에 안치, 오사카시 노동장으로 엄수되면서 시가행진을 감행하였다. 화장한 후 고향 제주도로 운구하기로 하고, 죽암(竹岩) 고순흠(高順欽)이 비문을 쓰고, 김광추(金光秋)가 운구위원이 되어 조천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으로 약칭)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1945년 8월 16일 정오 휘문중학교에서의 여운형의 연설을 통한 건준 발족과 지방조직 결성 호소연설은  신정부 수립에 대한 정책 발표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제주도(濟州島) 건준은 9월 10일 결성되었다. 읍·면 대표들이 제주농업학교 강당에 모여 건준 조직을 출범시킨 것이었다. 이날 임원진 구성도 있었는데, 위원장에 오대진(吳大進·대정면), 부위원장에 최남식(崔南植·제주읍), 총무부장에 김정노(金正魯·제주읍), 치안부장에 김한정(金漢貞·중문면), 산업부장에 김용해(金容海·애월면)가 선출되었다. 또 집행위원으로 김시택(金時澤·조천면) 김필원(金弼遠·조천면) 김임길(金壬吉·대정면) 이원옥(李元玉·대정면) 조몽구(趙夢九·표선면) 현호경(玄好景·성산면) 문도배(文道培·구좌면) 등 10여 명이 선임되었다. 주로 40~50대의 장년층으로 항일운동 경험자들이 많았다.
 
그 후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윈회로 변모하면서 초기 활동은 치안활동에 주력했다. 인민위원회가 행정기구를 표방했지만, 미군정에서 이를 인정치 않았기 때문이다. 행정기관을 인수하지는 못했지만 실질적인 내용 면에서는 읍·면사무소의 인적 구성 등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여기에도 군정업무를 맡은 제59군정중대의 묵인이 있었다.
 
군정당국은 1945년 말 인민위원회 치안대 간부들을 소집해 치안유지에 협조해 달라는 요청하였다. 인민위원회 산하에는 청년동맹·부녀회·소비조합 등이 있었는데, 치안대의 활동은 주로 청년동맹 제주도위원회 간부들이 맡아보았다. 해방 직후 제주에서 최초로 결성된 정당조직은 조선공산당(이하 ‘조공’으로 약칭) 전남도당 제주도(島)위원회였다. 1945년 10월 초 제주읍 한 민가에서 일제시대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던 20여 명이 참석, 결성했다는 것이다.

당시 제주도의 유일한 좌파정당 조공 제주도위원회는 1946년 11월 23일 중앙에서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등 3개 좌파 정당의 통합으로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으로 약칭)이 결성되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제주의 경우는 당시 조공만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로 명칭의 변화과정만 거쳤다. 조공 제주도위원회 임원들이 1946년 12월 조천 김유환(金瑬煥) 집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남로당 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위원장은 일제시대 사회주의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조천의 안세훈(安世勳)이 맡았다. 주요 활동가로는 김유환, 김은환(金誾煥), 문도배(文道培), 현호경(玄好景), 조몽구(趙夢九), 오대진(吳大進), 김한정(金漢貞), 이신호(李辛祜), 이운방(李運芳), 김용해(金容海), 김정노(金正魯), 김택수(金澤銖), 문재진(文在珍), 부병훈(夫秉勳), 송태삼(宋泰三), 이도백(李道伯) 등을 꼽을 수 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1947년 3·1절 기념집회를 배후에서 주도하게 되는데 이 무렵에는 전도의 당원수가 3천여명 가량으로 늘어났다. 

- 로고스회, 민전참여 놓고 설전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난 젊은이들은 어떤 꿈을 간직했을까? 해방이란 환희 속에 일본에서 대학이나 전문학교를 다녔던 학병출신들은 귀향한 본도 최고 지성인들이다. 해방공간에서 이들이 끼친 영향은 4·3으로 이어지는 부정적인 면과 한편으로는 당시 문맹사회를 일깨운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당시 산북 ‘제주-성내’에서 활동한 하나의 그룹이 바로 로고스 모임이다. 일제강점기 도일한 제주출신 학생들이 해방 후에 귀국하여 새로운 조국에 헌신하려고 뭉친 모임을 처음 ‘로고스회’이다. 

이들은 정식으로 1946년 3월 로고스(Logos)모임을 창설했다. 로고스란 그리스 철학에서 언어를 매체로 이성 또는 그 이성의 작용을 말한다. 회원은 강순현(姜淳現, 납읍), 김봉현(金奉鉉, 금악), 김성만(金聖萬, 금성), 김인호(金仁灝, 남원면 신흥), 문국주(文國柱, 도두), 문태오(文泰午, 도두), 양명률(梁明律, 노형), 양세민(梁世民, 청수), 이경수(李慶守, 인성), 현평효(玄平孝, 봉성) 등이었다.  

이들은 중등학교의 설립을 첫 목표로 뭉쳤다. ‘학술강습회’로 출범하여 초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국어와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 당시 제주농업학교만이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이어서 강습회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래서 ‘제주제일중학원’으로 인가를 받아 운영하였다. 

얼마 후 오현단의 제주농업학교의 구교사로 옮겨 오현중(五賢中)학교라 개칭, 일제시대 전라남도 도의원을 역임한 황순하(黃舜河, 조천)를 설득시켜 자금을 마련해 운영해 갔다. 이 무렵 반탁과 찬탁으로 로고스회원들은 이념논쟁으로 불붙었다. 당시 조몽구는 오현중 교사였다.

이어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民戰)이 조직되고 로고스 회원들은 의견이 양분되었다. 민전에 적극 동조하자는 정치지향적인 인사와 그렇지 않은 비정치적 인사들이다. 3·1시위로 대표 양명률을 따르는 우파와, 문화부장 김봉현을 따르는 좌파의 주도로 전도의 파업을 단행, 행정력이 마비되는 극한상황으로 치달았다. 회원들은 일부 미군정의 체포령에 맞서고 일부는 밀항으로 도일, 또 일부는 교육계로 나가거나 공직에 참여했다. 

민전의장단으로 남로당 제주도위원장 안세훈, 승려 이일선(李一鮮), 제주중 교장 현경호(玄景昊) 등 3명이 추대되었다. 또 부의장으로는 김택수·김용해·김상훈(金相勳)·오창흔(吳昶昕) 등 4명이 선출되었다. 민전 결성식에서는 명예의장으로 스탈린·박헌영·김일성(金日成)·허헌·김원봉(金元鳳)·유영준(劉英俊)이 추대되었다. 결성식에 박경훈 지사가 참석, 축사를 하였다. 경찰고문관 패트릿지와 강인수(姜仁秀) 제주감찰청장도 참석, 강연을 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준비중이었던 제주도(濟州島)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결성대회는 지난 23일 상오 11시부터 도내 읍면 대의원, 각 사회단체 대표 등 315명, 방청객 200여명의 참석으로 초만원인 가운데.......중략)...... 친일파 민족반역자 규정에 대하여 조몽구(趙夢九)씨로부터 본 도민에 있어는 일제시대의 주구들이 어느 정도 자백하고 있으나 신판 반역자가 출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악질 중 악질은 일제에 아부하던 자가 또다시 일제시대와 같이 권세를 부려보려는 야욕 아래서 인민위원회에 가담함으로써 인민에 아부하려다가 탄압이 심함을 보니 슬그머니 빠져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기회주의자이다. 이러한 부류는 소위 명사란 자가 그러하다. 또다시 사실무근한 폭동계획 운운의 모략적 밀고를 당국에 하고 더구나 모종 배경으로써 의식적으로 반동하고 또한 모리행위를 자행하여 동포를 착취하는 자 등을 지적한 바 있었고 악질통역에 언급하여 양심적인 행동을 희망한다는 요청의 의(意)를 표하였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반동하여 오던 자에게 대해서는 엄격한 자기비판 아래 반성하는 자는 민전으로써 포옹할 용의를 가지고 있다는 등 대략 여상과 같은 설명이 있었다.....(중략)...’-제주신보 1947년 2월 26일 기사

‘약 2주일간에 걸쳐 제주도를 시찰한 서울지방심리원 부장 심판관 양원일(梁元一)씨는 제주도 소요의 원인과 그 대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략).....좌익은 이러한 정세 하에서 도민의 사소한 불만 불평을 신속히 포착하고 단선단정 반대를 구호로 도민을 선동하고 도민을 조직화해 상부조직의 지령 하에 사건을 폭발시켰던 것이다. 남로당의 현세로 보면 제주도는 전남도당부하의 조직체로서 위원장 김유환(金瑬煥), 부위원장에 조몽구(趙夢九) 조직부장에 김달삼(金達三)이 중심되어 수백명의 남로당원과 민애청원들로 구성된 친위대가 주동되어 있는 것이다.......(중략).....’-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 17일(같은 기사 조선일보․현대일보 48. 6. 17)

- 4·3발발 과정에서 조몽구 역할

‘약 2주일간에 걸쳐 제주도를 시찰한 서울지방심리원 부장 심판관 양원일(梁元一)씨는 제주도 소요의 원인과 그 대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번 제주도 소요의 원인으로서는 (1)해방후 그 세력이 강대하였고 사실상 정부 행세를 하여왔던 인민위원회를 도민들이 너무나 과대히 평가하였다는 점. (2)경찰이 가혹한 행동을 함으로써 민심을 잃었다는 점. (3)청년단원들이 경찰에 협력하는 반면 경찰 이상의 경찰권을 행사하고 혹독한 짓을 함으로써 도민의 원망을 샀다는 점. (4)중국 일본 등지와의 밀무역 기지가 되는 관계상 정치에는 등한하고 모리에만 열중하였기 때문에 관공리는 일반도민으로부터 멸시를 당하여 왔다는 점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좌익은 이러한 정세 하에서 도민의 사소한 불만 불평을 신속히 포착하고 단선단정 반대를 구호로 도민을 선동하고 도민을 조직화해 상부조직의 지령 하에 사건을 폭발시켰던 것이다. 남로당의 현세로 보면 제주도는 전남도당부하의 조직체로서 위원장 김유환(金瑬煥), 부위원장에 조몽구(趙夢九) 조직부장에 김달삼(金達三)이 중심되어 수백명의 남로당원과 민애청원들로 구성된 친위대가 주동되어 있는 것이다. 금번 사태에 대한 대책으로서는 제주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미국인측에선 제주도의 실정을 잘 파악하고 경찰의 압박을 완화시키는 동시에 군경간의 마찰을 제지하도록 하고 경비대를 좀더 효과적으로 이용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제주도내의 관공리를 재편성하는 동시에 경찰로서는 민심을 자극하는 행동을 삼가야 할 뿐만 아니라 민심수습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여하간 금번 사태를 신속한 기간내에 진압하지 못하면 건국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초를 위시한 여러가지 해산물의 채취 불능으로 인한 수억원의 손실이 있을 것은 물론 하곡수확 불능으로 인한 도민의 식량난은 미구에 또 다른 민요(民擾)를 발생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 17일(같은 기사 조선일보․현대일보 48. 6. 17)

1948년 2월 이후 미군정과 좌파간에 치열한 대립국면이 표출됐다. ‘앉아서 죽느냐’ 아니면 ‘일어나 싸우느냐’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됐다. 무장봉기 논의 과정에서도 지도부 내에서조차 시기상조론과 강행론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명분론과 위기설을 앞세운 강경파가 당 조직을 장악하게 됐다. 강경파의 대표적 인물은 김달삼이며, 온건파의 대표적 인물은 조몽구였다. 

결국 ‘4·3’발발 직전에는 제주도당 지도부 핵심세력이 젊고 급진적인 신진세력으로 교체되었다. 무장투쟁이 결정된 다음에는 김달삼은 유격대 조직을 총괄하는 군사부 책임을 맡게 된다. 나이 어린 김달삼이 이처럼 부상한 데에는 남로당 중앙위원이자 선전부장이었던 장인 강문석(姜文錫)의 후광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제주도당 내부에서 무장투쟁이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신촌회의에서였다. 참석자는 조몽구, 이종우, 강대석, 김달삼, 나(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 19명이다. 이덕구는 없었다.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김달삼이 앞장선 것은 그의 성격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경파와 신중파가 갈렸다. 조몽구는 “우린 가진 것도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당시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김달삼은 20대의 나이이지만 조직부장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 인민위원회 활동과 월북

‘30만 도민의 기억도 새로운 본도 4·3사건을 전후하여 북한괴뢰의 지령 아래 소박한 도민을 기만 선동하여 살인 방화 약탈 파괴 등 천인공노할 갖은 만행을 감행하던 남로당 제주도 괴수 조몽구는 객년 9월 월남(越南) 부산 등지에서 배회 중임을 탐지한 본도 경찰국 사찰진에 검거되었음은 기보한 바이나 그 후 경찰에서 취조를 끝마치고 1건 서류와 함께 본도 육군 특무대(CIC)에 이첩 동 특무대에서는 그동안 엄밀한 특수조사를 거듭하여 오던 바 이번 상부 명령에 의하여 특무부대 본부로 압송되었다고 한다. 탐문한 바에 의하면 근근 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 최고형에 처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이로 수많은 죄악의 발자취를 남긴 남로당 본도 최고지도책은 조명단석(祚命旦夕)의 한라산 잔비의 단말마의 아우성과 더불어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이에 관하여 본도 특무대장 허세선(許世善) 소령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사건 취급에 있어서 왜 이러한 도민의 원흉을 조속 처단치 않는가 하여 일반의 의혹과 여론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로서 결코 그 여론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차종건의 특수성에 비추어 신중한 취급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최후 처리 여하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할 수 없으나 여하간 도민 소원에 어그러지지 않는 결과가 있을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여사한 공산 극악분자는 물론 이 나라를 해롭히는 여하한 도배에 대해서라도 추호의 용납도 허용치 않는 것이 우리의 공통된 신조일 것이다.”’-제주신보 1952년 5월 1일

조국이 해방되자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면서 조몽구는 조선공산당 제주도당부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제주4·3 당시 소장파의 무장봉기로 유혈혁명에 맞서 무혈혁명을 주장, 과격파에 밀리자 몰래 섬을 탈출하였다.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는 제주도 인민유격대 간부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도당부> 책임/ 안요검 조몽구 김유환 강기찬 김용관  △<도당 군사부> 책임/ 김달삼 김대진 이덕구 △총무부/ 이좌구 김두봉 △조직부/ 이종우 고칠종 김민생 김양근/ △농민부/김완배  △ 경리부/현복유△선전부/김은한 김석환 △청년부/강대석 △보급부/김귀환 △정보부/김대진 △부인부/고진희

조몽구는 1948년 8월 북한으로 잠입,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였다. 결국 북한의 실상에 실망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남하하여 부산에 은신 중 1951년 9월 30일 제주경찰서의 경찰관에 의해 체포되었다. 8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 성읍으로 돌아와 보니, 토벌대에 의해 표선백사장에서 아내 한정임(韓貞任)과 어린 아들 딸 남철(南哲), 남운(南運), 남련(南蓮), 남근(南根) 등이 표선리 바닷가에서 총을 맞아 이승에는 없었다. 1971년 새로 부인 현두진(玄斗珍)을 만나 향화(香火)를 피워 제향 때는 하나의 양푼에 메를 올려 수저를 꽂았다. 그는 철저히 일본에게 당하고. 또 남쪽에서 버림받고 북쪽에서 소외된 상태에서 세상사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않고 지내더니 1973년 15일 사망, 영주산에 조상된 성읍공동묘지 1호로 장례가 치러졌다.

- 오성찬의 중편소설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

   

‘그의 이름이 다시 기록에 나타난 것은 4년 후의 겨울, 부산에서였다. 남로당 제주지구 거물 주명구 부산에서 체포. 그때의 신문을 뒤져보니까 지방신문은 그 쾌거를 사회면의 머리기사로 대대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공백기의 4년을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두더지 노릇을 했다는 말인가. 의문은 관심을 불렀다. 아, 그는 참 베일 속의 사람이다. 그가 이 사건의 초기에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오성찬의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에서

‘인물이었지요. 키는 작달막했으나 남자다웠어요. 원래 지주 집안 출신으로 일본서 학교 다닐 때부터 파업선동에 명수였답니다. 그때부터 요시찰인물이었지요.’ -오성찬의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에서

오성찬(吳成贊, 1940~2012)은 제주가 낳은 작가이다. 1969년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별을 따려는 사람들」로 당선, 등단한 그는 한때 신문기자로도 활동했고, 민속자연사박물관 민속연구관을 지내기도 했지만 평생을 펜과 원고지와 함께한 작가였다.  조몽구를 모델로 한 중편소설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를 『실천문학』에 발표하였다. 

제주4·3으로부터 한국전쟁을 거쳐나가는 메카시즘의 미친 돌개바람 속에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생존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그러나 결코 자신의 인간선언을 포기하지 않았던 실제의 공산주의자 주명구. 오성찬은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를 통해  이데올로기 전쟁의 참혹한 피해상을 뜨겁게 조명하고 있다. 

향토사학자 양충식이 문화재전문위원 자격으로 영주리를 찾아 옛 비석을 일제조사하면서 주명구의 삶과 맞닥뜨리는 이야기다. 소설은 촘촘한 취재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등장인물은 실제 작가가 남로당제주도당 거물급 간부였던 조몽구에 얽힌 증언을 채록하는 과정에서 만난 이들이다.  

▲ 작가 오성찬.

3·1 사건 당시 제주섬의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조직책이었던 주명구. 소설은 그를 평화노선을 지향하는 비둘기파로 금을 긋는다. 무력혁명이 승산이 없다고 봤고, 4·3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했다. 주명구는 재판을 받고 옥살이를 한 뒤 영주리로 돌아온다. 꿩을 키우고 사탕수수를 심으며 말년을 보내지만 평탄치 않았다. '폭도'라는 낙인이 따라 다닌다. 소설은 몇몇 마을 사람들이 거리돌림을 하며 주명구에게 가했던 뭇매를 굿의 사설처럼 풀어놓는다.

“옵서. 우리 이 마을을 떠낭 살게. 어디 가민 이만이사 못 삽니까? 목젖 부위에 피멍이 들고 광대뼈가 스친 사내는 머리에도 온통 지푸라기 투성이였다. 사내가 그 지푸라기 투성이의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대답했다. 안되메. 난 이디가 좋은 걸. 곧은 인중의 선, 야무지게 다문 입술, 아직도 사내에게서 그것들은 흩어져 있지 않았다. 어디 가 봐도 마찬가지라. 어디 가민 우릴 반길 줄 알고. 허긴 이만 죄갚음도 약과지”--오성찬의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에서

관광객들이 누비는 성읍민속마을의 안길에 주명구의 그림자가 비친다. 힘 좋은 사내가 그를 바닥에 패대기친다. 여자가 울며불며 말려보지만 소용없다. 그래도 그는 떠날 수 없다. '북한엘 가보니까 우리가 애써 만들어놓으려고 했던 공산주의자는 아니데…'라는 주명구의 고백은 그가 왜 굳이 영주리로 돌아왔는지 짐작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주명구는 허연 눈물을 쏟아낸다.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허공 속에 흩어졌고 이데올로기 싸움에 죄없는 사람들만 씻어내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제주4·3의 광풍 속에 아내와 4남매를 처참하게 잃은 조몽구는 후손이 없다. 영주산 공설묘지 첫 머리에 놓인 그의 무덤은 친척들이 돌봤다. 2006년 9월, 조몽구는 성읍공동묘지를 떠났다. 성산읍에 가족묘지가 조성되면서 그곳으로 이장됐다. 

 

 

▲ 성읍공설묘지 첫 머리에 묻혔던 조몽구의 무덤은 다른 곳으로 이장됐다. 그 자리엔 억새가 피어났다.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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