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겨울 숲에서 새해를 꿈꾸다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돌아온 세월 돌아보니 삐뚤빼뚤 제 멋 대로 걸어온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걸어온 그 길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으니 살아온 길 추억으로 소중하게 간직하렵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요,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길 위에 편지를 쓰는 행위입니다.

   
정말 오랜만이군요.
폭설이 내린 후 그대는 사람들과는 아예 벽을 쌓고 지냈습니다. 그렇게 한 달쯤 되니까 슬슬 사람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나요? 오늘에서야 그 길을 활짝 열었네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 오늘도 그 길을 열어놓지 않았다면 몇 km 걸어서라도 이 곳에 오려고 작정을 하고 집을 나섰는데 순순히 그 길을 열어놓는 그대 덕분에 조금은 편안하게 그대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새해에는 남들이 걸어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하얀 꽃 피우던 으아리가 저보다 더 큰 하얀 눈에 놀랐는가요? 성성한 백발이 햇살을 가르며 비상하려는 새의 깃털처럼 빛납니다.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가지는 못할지라도 그 언젠가 바람 타고 비상하겠지요.

새해에는 살아생전 단 한번도 날아보지 못했던 하늘로 비상하고 싶습니다.

   
삶이란 이렇게 얽히며 사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실타래처럼 얽힌 것 같아도 끝내 줄기를 통해 땅의 기운을 받고 하늘의 기운을 받아 붉은 열매를 탐스럽게 담을 수 있는 것이 삶이겠지요. 간혹 삶이 꼬인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내가 지금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다시 한번 돌아볼 것입니다.

새해에는 작아도 예쁜 열매를 맺으며 살고 싶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기 전에는 앙상한 나목(裸木)과 하얀 눈만 보였습니다. 숲에서 가장 깊은 숲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계절은 역시 겨울입니다. 그렇게 숲에만 눈길을 빼앗기며 걷다 바라본 하늘은 참으로 청명했습니다. 그래요. 선 자리도 중요하지만 어디를 바라보는 가도 중요하겠지요. 천천히 걸어가며 땅도 보고, 하늘도 보고, 저 깊은 숲의 속내도 보니 몇 번 온 것만큼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새해에는 가끔씩 하늘도 바라보며 살고 싶습니다.

어디선가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손을 모아 귀에 대고 소리나는 곳을 찾았습니다. 멀리서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는가 보다 생각하며 그 소리를 따라 눈길을 걷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 지레 걱정을 하며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봅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작은 새가 나뭇가지를 쪼고 있었습니다. 눈길을 헤매지 않을 것이라도 안도의 한숨, 그리고 겨울 숲이 이렇게 적막한 것이구나 느끼게 됩니다.

새해에는 마음을 열어 작고 세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맨 처음에는 무슨 열매일까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닭똥냄새가 나는 '계뇨등'의 열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해안가, 그러니까 여기보다 따스한 곳에서 자란 것들은 열매가 포도송이처럼 많은데 이곳 한라산 자락에서 피어난 계뇨등은 열매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줄기들도 나선형으로 나뭇가지들을 잘 감고 올라갔습니다. 같은 것이지만 새로운 모습입니다. 고난의 상황들을 오히려 새롭게 바꿔 가는 자연을 봅니다.

새해에는 힘든 일들마다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계기로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하얀 눈과 벌거벗은 나무들 세상에서도 푸른 것들이 있습니다. 사철 푸르게 사는 것들이라도 겨울은 추울 것입니다. 춥다고 자기의 색깔을 놓지 않고, 온 세상이 백설이요 갈색 나목 뿐이라고 그들을 닮아가지 않습니다. 자기의 색깔, 초록빛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봄이 오면 그들보다 더 푸른 것들에게 자리를 내어줄지라도 자기의 색깔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새해에는 세상에 휩쓸려 가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색깔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바람에 꺾였겠지요.
저 눈이 온전히 녹아 땅에 닿기까지 그렇게 겨울을 나겠지요. 그렇게 겨울을 나면서도 그만의 향기를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때론 낙화하는 꽃들이 있어 실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낙엽이 있고, 낙엽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바람에 꺾이는 것들이 있어야 뿌리깊은 나무가 되는 것이겠지요.

새해에는 꺾여진 나뭇가지가 되는 일이라도 담담하게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눈 위에 떨어진 가을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있음으로 인해 더 아름다운 눈 세상입니다. 사람들 사는 곳에 이렇게 많은 눈이 왔다면 또 엄청난 재난이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 곳은 아무리 많은 눈이 와도 그저 평화롭습니다. 어떤 것들끼리 만나든 서로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 자연인가 봅니다.

새해에는 내가 있는 곳이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더 아름다워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한 참을 걸어 처음 걸었던 그 발자국 위에 섰습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나목들의 그림자만이 시간이 그만큼 흘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 겨울 숲에는 그림자만 변한 것일까요? 아니, 그 안에는 작은 가지들마다 꽃눈을 키우는 작은 혁명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단지 네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요.

새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혁명 같은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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