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24) ‘공신정’과 제주측후소 신축 上

 

▲ 제주성 북성의 전경 제주성의 북성 성곽 위로 공신정이 보이고 성의 수구인 홍예문 그리고 산지천 하류 전경이 펼쳐진 사진으로, 구한말인 1900년대 초에 제주를 방문했던 선교사가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성의 성곽과 여장의 모습이 이때까지도 그대로 살아 있다. (사진: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특별자치도 간)

최근 중앙감리교회가 이전하면서 철거공사에 들어갔다. 그 자리에 제주지방기상청의 신관을 건축할 예정이라고 한다. 제주지방기상청은 1923년 제주성지 위에 측후소를 개설한 이래 올해로 90년째를 맞고 있다. 제주기상청은 현 건물지와 연결된 일도1동 1186번지 등 11필지 6636㎡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 3275㎡ 규모의 청사를 신축하기로 하고, 올해 안에 착공해 내년 10월 준공할 계획이라고 한다.

제주기상청 일대는 선조 25년(1592) 이경록 목사가 건립한 ‘결승정(決勝亭)’과 북성 경관 최고의 정자였던 ‘공신정’(拱辰亭, 효종 8년(1653) 이원진 목사가 북수구 위에 설치한 초루(譙樓)였던 ‘공신루(정)’를, 순조 32년(1832) 이예연 목사가 현재의 감리교회터로 이전하였으며, 일제가 제주신사를 짓기 위해 1928년에 헐어버렸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인 1923년부터 제주기상청의 전신인 제주측후소가 제주성의 동북치성의 성벽 위에 설치되고, 그 후 제주시 도시개발 과정에서 주변에 건물들이 들어서고 도로가 개설되면서 성곽은 점차 훼손되어 대부분 멸실되고, 제주측후소의 계단으로 이용되던 성벽 일부만 남아있다.

 

▲ 제주지방기상청 신관 조감도.

보도를 통해 알려진 신관은 규모가 꽤 되는 건축물로, 바닥면적이 250여 평에 이르는 대형건축물이다. 지상 3층 규모의 대형건축물이 제주구도심 경내에서 가장 높은 지대 위에 들어서게 되는데, 매우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건축물의 외경뿐만 아니라, 이 자리가 과거 공신정이 있던 장소로서 제주성 경내에서 조선시대 인문경관의 가장 핵심적인 장소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차후 제주시 원도심권역의 도시재생 과정에서 전통경관을 재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심적인 구역으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제주성 정비 복원의 필요성은 그동안 여러 차례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이 제시되었으나, 예산이 마련되고 본격적으로 정비복원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연구용역은 올해 7월에야 추진되어, 연말에 보고서가 나올 예정이다. 그런데 현재 제주지방기상청 신청사 사업이 맞물려 있는 셈이다. 장기적으로 제주성의 정비복원과 구도심 도시재생의 전통경관 복원 및 조성 등과 연계된 신청사 조성계획이 수립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지금이라도 두 당국이 머리를 맞대어 지혜를 모을 때이다.

높은 다락에서 북극성을 바라보던 정자, 공신정

 

▲ 1926년 1월 “Geographical Review”에 수록된 미시건 대학 Burnett Hall의 논문에 실린 1920년대 초반 제주읍 풍경. 사진 좌측 하단에 공신정의 지붕이 보인다. 이 사진의 규모로 보았을 때는 정방형의 합각지붕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정자의 지붕은 풍우가 잣고 심한 제주의 기후환경의 특성에 따라 발달한, 회땜질이 도드라지는 제주형 기와지붕의 전형을 보여준다.(사진 고영자 제공)

‘공신정(拱辰亭)’은 북수구의 ‘초루(譙樓, 궁문, 성문 등의 위에 지은 다락집)’였던 ‘공신루(拱辰樓)’에서 유래했다.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2년(1599) 성윤문 목사가 제주성을 개축할 때, 남수구와 북수구에 ‘홍문(虹門, 무지개다리 모양의 문)’을 세우고, 북수구에는 ‘죽서루(竹西樓)’를 지었다. 하지만, 효종 3년(1652) 8월 태풍으로 남·북수구가 헐리자, 그 이듬해인 1653년 3월 제주목사로 왔던 이원진이 남·북수구를 다시 쌓고, 북수구 위에 다시 정자를 세워 낙성하고, 그 이름은 ‘공신루(拱辰樓)’라 명명한다.

‘공신루’라는 누명(樓名)은,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의 <한밤중에[中夜]>라는 시(詩)의 “높은 다락에서 북극성을 바라본다(危樓望北辰)”라는 시구에서 뜻을 취해 지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북신(北辰)’은 북극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두보는 당시 대궐이 있는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을 가리키는 시어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공신루’는 서울을 바라보는 누각이란 의미를 담은 명칭인 것이다. 북수구는 정북(正北)을 향하고 있었다.

순조 8년(1808)에는 한정운 목사가 이를 중수하여 ‘공신정(拱辰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폭우로 다시 북수구가 무너지자 순조 32년(1832) 이예연 목사가 공신루가 “물길이 가까워 늘 노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니” 이를 피하기 위하여 ‘삼천서당(三泉書堂)’의 동쪽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현재의 위치) 그 뒤 헌종 14년(1848)에 장인식 목사가 중건하였고, 고종 21년(1884)에 심현택 목사가 중수한다. 또한 대한제국기인 광무 8년(1904)에 김옥균을 처단한 홍종우가 제주목사로 오게 되자, 그는 쓰러져 가는 왕조의 마지막을 목도하면서 제주에서 많은 토목공사를 벌여 성안의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들었는데, 그 역시 ‘공신정’을 다시 중수한다. 이 중수가 마지막 중수였던 셈이다.

건물의 규모는 발굴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확히 고증할 수 없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건물은 측면이 각각 3칸(1칸은 주척으로 10척(약 2m))이고, 퇴(退, 툇마루)는 없었으며, 평면은 18자 방형이고, 축대 위에 세워진 합각(팔작)지붕의 누각이었다고 하며,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규모다.

 

▲ <제주도측후소무선전신용목주신설공사내일부변경배치도(1923년경 추정)>(출처: 국가기록원 <고적‧관사‧사법‧행형 등 일제시기 건축도면 컬렉션>) 도면을 보면 일제는 당시 제주성의 동북치성 위에 건물을 신축했다. 또한 이때에도 공신정은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제주동성과 북성이 교차하는 지점인 동북치성 위에 제주측후소가 들어서면서 이 일대는 제주측후소의 경내구역에 속하게 되며 공신정은 그 부속건물이 된다. 이때까지도 공신정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1928년 일제는 내선일체의 동화정책을 강화하기 시작하면서 전국 각지에 일본식 신사를 조성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인다. 제주읍 ‘제주신사(濟州神社)’는 이곳에 짓게 된다. 이 신사의 조성으로 공신정은 끝내 헐리게 되며, 주춧돌만 한쪽 구석에 남아 있게 된다. 제주신사는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신사는 그 해 10월 건입동 청년들이 부수어버렸다고 촌로들은 전한다.

 

일제강점기 제주신사 전경(출처: 일제시대 자료수집보고서). 사진 전면부의 도리이와 본전 사이의 목재지주를 세우기 위해, 공신정의 주춧돌을 부분적으로 가공하여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제주에는 1만50000여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밀려드는데, 이 중에는 도인권 목사도 있었다. 그는 1951년 신사가 철거된 이 자리에 임시 피난민교회인 가설 ‘제주읍교회’를 설립하여 목회를 시작한다. 그 이후 ‘류형기 감독 기념 예배당’이라는 명칭으로 교회건물을 신축하게 되는데, 당시 이 터는 일제가 남기고 간 소위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어 정부부서인 세무서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도인권 목사는 1954년 이 터를 정부로부터 사들여 이곳에 교회건물을 건축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에 당시 제주읍내의 유림들과 유지 등 원로들은 원래 조선시대 유명한 정자인 공신정이 있던 명승지이므로 교회가 들어서서는 안 된다고 반발했으며, 이 사실은 당시 제주신보에 보도되면서 지역사회의 핫이슈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발 속에 도 목사는 명승지 주변경관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고 약조하고, 결국 그들을 설득해내어 토지를 사들였으며, 1956년 건물을 완공하고 교회 이름을 ‘제주중앙교회’라고 명명했다. 이 교회는 제주도 감리교의 시발점으로 오늘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가 엊그제 헐리기 시작했다. 

▲ 중앙감리교회의 전신인 제주읍교회의 당시 사진과 54년 준공된 제주중앙감리교회의 헐리기 전의 모습, 교회건물 2층 출입부 벽에 각명된 예배당명비와 교회 경내에 있던 도인권 목사의 기념비

공신정터와 인근경관은 제주성내 조선인문경관의 백미

1897년 제주에 유배와 4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한말의 대신(大臣),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은 제주 유배생활의 기록을 담은 일기인 《속음청사(續陰晴史)》에서 “(공신정에서) 석성 주위와 마주치는 데를 굽어보니 수구에 홍예문이 지어져 그 위를 통해 사람들이 왕래한다.

수문의 바깥은 100규(1규는 반걸음으로 100규는 약 30m)의 둑으로 둘러싸인 연못에 봄물(春水)는 넘실거리는데, 오리떼가 열을 짓고 있다. 제방 위에는 파란 버드나무가 빙 둘러있고, 언덕 위에는 사람 사는 집이 있어 복숭아꽃이 곳곳마다 활짝 피어 있다. 그림과 같은 경치이다. 정자 밑에는 세 곳에서 물이 솟는데, 천품(泉品)이 아주 뛰어나서 이 정자가 이름이 나게 된 것이다.”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제주성의 ‘공신정(拱辰亭)’에서 바라 본 산지천과 북수구를 낀 풍경의 아름다움을 이방의 노정객이 찬탄한 글이다.

공신정은 제주성 최고의 정자이자 북성 경관의 백미를 이루는 정점으로서, 이 정자는 목사나 판관 등 관리들이 북두성을 바라보며 세운(世運)을 기원하는 장소로 쓰이기도 했으며, 혹은 여름철 피서용도로, 또는 외지에서 온 손님을 접대하는 접대소 등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유배객이나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성내 최고의 정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공신정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역대 제주목사 중 최고의 선정관(善政官)이라 해도 손색없는 ‘노봉(虜鋒) 김정(金政)’ 목사가 조성했던 삼천서당이 연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 공신정 주춧돌 언덕을 올라 중앙감리교회 초입 모퉁이 정자목 아래에 방치되어 있던 공신정의 주춧돌은 모두 10기가 남아 있었다. 2008년까지도 그 자리에 놓여 있었으나, 어느 날 자취를 감추었다. 사실상 이 돌들의 하단부를 자세히 살피면, 보도를 포장하면서 시멘트로 고정되어 있는 것도 눈에 띤다. 그런데 모 언론사의 문화통으로 퇴임한 기자의 말에 의하면, 누차 제주시에서 이를 거두어 갈 것을 조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방치하고 말았다가 이마저 멸실 당하고 만 셈이라 한다.(마침, 이 글이 나가는 오늘 아침에야 <한라일보>에 이들 중 6개의 주춧돌을 찾았다는 기사가 떴다.)

삼천서당과 이 단애지역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조선 영조 11년(1735)에 제주목사로 왔던 ‘노봉 김정(1670~1737)’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조선왕조 내내 제주에 파견되었던 수많은 목민관들 중 ‘선정관’으로 이름 높은 사람을 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김정 목사는 그 많은 목민관들 중에서도 누구보다 제주를 사랑해서 이 척박한 절해고도에서 애민(愛民)과 흥학(興學)의 정사를 펼치다, 끝내 이 섬에서 생을 마감했다. 또한 이곳은 노봉이 누구보다 흥학을 위해 애착을 갖고 온 힘을 기울였던 공간이기도 했다. 

현재의 공신정 자리는 그 아래로 기암절벽이 이어지는데, 노봉은 이 그 무더기 바위들에 각각, ‘용린병(龍鱗屛)’, ‘중장병(中藏屛)’, ‘호반병(虎班屛)’이라 별도의 명칭을 붙여 그것을 각명해 놓았다. 그리고 그 바위 아래에서 솟는 샘물은 ‘감액천(甘液泉)’, ‘급고천(汲古泉)’이라 이름 지었다. 또한 공신정의 서남쪽 아래에는 ‘삼천서당(三泉書堂)’을 세워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예로부터 중앙관직에서 보는 변방의 임지인 ‘제주목(濟州牧)’은 나라의 남쪽 바다 끝에 있는 절도(絶島)로, 풍우의 피해와 풍토병 등이 유별나 위험한 임지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선지 부임했던 목사들도 대부분 무관들이었고, 문관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노봉 이전에 제주목사직을 제수받은 ‘김중희(金重熙)’가 사표를 내고 부임을 하지 않자, 결국 사헌부의 주청으로 유배시킨 일이 있었을 만큼 제주는 임지로서는 기피대상이었다.

그런 변방 중의 변방으로 목사직을 제수받고 온 노봉은 오는 날부터 재임기간 내내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백성들을 위한 공사를 일으키고, 흥학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크고 작은 공사에도 일반 백성들을 노역시키지 않고 번을 드는 병사들을 활용하여 공사를 진행해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사지 않았다. 그의 재임기간의 업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삼천서당을 지어 지역의 선비와 일반백성들의 아이들을 교육시켰던 것과 퇴임 한 달을 앞두고도 화북포의 방파제 축조에 들어가 완성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일 모두 후일의 제주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1735년 4월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2년 4개월간 고단한 섬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제주를 떠나기 위해 1737년 9월 3일 그가 손수 개척한 화북포의 ‘후풍관(侯風館)’에서 출항을 기다리던 와중에 68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하고 만다.

노봉은 《노봉집》(蘆峯集, 그의 사후 현손인 종걸(宗杰)이 펴낸 문집으로 생전의 그가 남긴 글들을 모아 펴낸 4권 2책의 목활자본이다. 2008년 고전번역가인 김익수 선생의 번역으로 제주문화원에서 <노봉문집> 1,2권으로 발간되었다.)에서 “저 연당(蓮堂)의 옛터를 보니 학사(學舍)를 새로 짓기에 적합하다. 마을에서는 떨어져 있지만, 실은 성안에 있으면서 산림과 샘과 돌들이 맑고 그윽하니 아마도 이곳은 하늘이 만들고 땅이 숨겨둔 곳이다.”라 하여 이곳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학문도야의 장소로 만들기로 작정한다. 삼천서당을 세운 터는 원래 인조 때인 1627년부터 1629년까지 제주 판관을 지낸 ‘이각(李恪)’이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그 위에 연당을 세웠던 터였으나, 노봉이 제주목사로 왔을 때는 이미 멸실되어 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노봉은 단지 기암과 수림이 우거졌을 뿐인 이곳의 경관적 가치를 누구보다 깊게 간파한 것이다. 결국 그는 임기 내내 바쁜 정사의 와중에도 틈만 나면 이곳을 학문적 도량으로 가꾸어 나갔으며,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또한 10소장의 국립목장지 중 6소장의 폐장된 토지를 떼어내어, 서당에서 공부하는 재생들의 늠료(廩料)를 마련하여 생활비의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삼천서당’은 노봉이 제주에 부임한 이듬해인 영조 12년(1736) 겨울에 세웠다고 한다. 그의 상량문에는 선비들이 여염집에서 기식하며 공부하는 모습과 “마을에는 예양하는 풍속이 줄어들고, 집에는 거문고 타는 소리와 책 읽는 소리가 고요해져 버린 것”을 안타까이 여겨, 쇠락한 시기에 사치스러운 일인 듯해도 제주에 부임하면서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라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며 시작한 것으로 서당 건립의 배경을 밝혀놓고 있다.  

▲ 1909년의 제주읍 산지천 일대 풍경(38×55㎝)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제주 성안구역에 살았던 일본인 ‘다케노 세이기치’가 노년에 기억에 의존해 그린 제주성 동성의 성내전경 그림이다. 제주성 동북성지역의 전경을 담은 그림으로 동문과 삼천서당, 공신정 그리고 널다리인 광제교와 간성, 중인문 등이 망라되었다. 북수구는 다케노의 기억의 착오로 남수구와 북수구가 동시에 그려져 있기도 하다. 삼천서당 뒤로 천연의 단애지역인 동북성의 경관이 잘 살아나 있다.

연이어 ‘삼천서당’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밝혀 놓았는데, 흔히 알려져 있듯이 경내에 3개의 우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역》의 ‘산수몽괘(山水蒙卦)’의 “산 아래 샘이 솟아나는 것이 몽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과감하게 덕을 실천하면서 묵묵하게 덕을 쌓아야 한다.”라는 괘의 의미를 취한 것이다. 즉, 이 서당이 아직 몽매한, 유학의 가르침을 깨치지 못한 어린 학생들이 선비로 성장하기 위한 학문도야의 장으로, 또는 일반 백성들을 교화하여 예양하는 풍속을 일으키기 위한 학문의 전당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또한 서당의 마당에 ‘이택(麗澤)’, 즉 서로 이웃한 한 쌍의 연못을 판 것 역시 주역의 “‘붕우강습(朋友講習)’하는 태괘(兌卦)를 본받은 것이다.”라고 했다. 즉, 서로 이어진 연못을 붕우에 빗대어 벗과 더불어 학습하고 교우하는, 선비의 도리와 이치를 터득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조성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철저하게 유학자적인 태도에서 유학의 가르침을 깨우치게 하여 양민을 교화하기 위한 예학의 장소로 정교하게 이 공간을 조성해나간 것이다.

그가 남긴 문집인 《노봉집》에서 이곳과 관련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보면 “사라봉은 한라산에서 오다가 바다에 이르러 서쪽으로 휘돌며 주성(州城)의 동북 모서리로 들어와 우뚝하게 절벽이 솟았다가 작게 다시 세 가닥으로 나뉘었는데, 가운데는 중장병, 왼쪽은 용린병, 오른쪽은 호반병이다.”라고 하였다. 즉, 그는 공신정 아래의 절벽인 이곳의 바위들에 각각의 그 형태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또한 그는 그 서당 아래의 지하를 흐르는 산지천의 수맥을 이용하여 감액천, 급고천 등의 새로운 우물을 조성하고, 산저천을 깨끗한 수질이 보장되게 수축한다. 노봉집에 “감액천은 용린병 밑에 있고, 물이 말라 없어진 지가 오래되었으나, 을묘년(1735년) 가을에 파서 고쳤더니 단물이 다시 솟아나왔다.”, “급고천은 중장병 아래에 있는데, 병진(1736년) 봄에 집터를 다질 때, 한 발 넘게 파서 옛 우물을 얻었는데, 감액천에서 30보 거리에 있다.”, “산저천은 호반병 밑에 있다. 온 성안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서 물을 긷는다. 정사년(1737년) 봄에 돌을 깨어내고 벽돌을 고쳐 바깥 난간을 평평하고 넓게 하였다. 급고천에서 30보 거리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재임 중 1년에 하나씩 새 우물을 조성했다. 이렇게 우물을 조성한 것은 몽괘의 ‘산하출수’의 상징성을 함의한 중의적인 공간의 창출에도 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삼천서당’ 경내의 여러 장소들에 대해서도 글로 남겼는데, “이택(麗澤)은 모두 재(齋, 삼천서당을 일컬음) 아래로 흘러 들어가는데, 위 못은 크고 넓어 약 10궁(弓, 여덟 자, 길이의 단위로 못의 둘레가 24m정도 됨)쯤 되고 아래 못은 약간 넓다. 이 못의 위쪽에 유생들이 글씨 연습을 하는 ‘천농석(天礱石)’이 있으며, 두 못 사이에는 ‘세심단(洗心壇)’이 있다.”라 했다.

즉, 서당 앞마당에 두 개의 연못을 조성하여 주역의 ‘태괘(兌卦)’에 나오는 “군자가 그 이치로써 친구끼리 강습한다.”라는 이치를 실현하려 하였고, ‘천농석’이라는 너럭바위를 놓아 붓글씨를 연마하게 했으며, ‘세심단’을 두 못 사이에 두어 항상 학문하는 마음을 가다듬게 하였다.

또한 “‘한취당(寒翠堂)’은 용린병 아래에 있다. ‘달관대’는 용린병 아래에 있으며 북으로는 넓고 아득한 바다를 누르며, 남으로는 영주를 적시고 서로 지는 해를 전별하며 옛 도읍을 굽어본다. 그 위에는 과녁을 두고 관덕(觀德)한다. ‘희우대(喜雨臺)’는 감액천 위에 있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용린병 바위 기슭의 푸른 대나무 숲 앞에 ‘한취당’을 짓고, ‘재일(齋日)’에 제사를 올리기 위한 ‘희우대’를 세웠으며, 활터로 ‘달관대’를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이곳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조성된 것이 없는 공간인 것이다. 노봉은 철저하게 유교적 미의식과 선비들의 학문과 풍류를 위한 인문공간으로 이곳을 심혈을 기울여 가꾸었다. 그의 이런 노력은 몽매한 제주섬사람들에게 유학을 권장하여 모범을 보이고 교학을 통해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유학자다운 면모의 실천결과였다. 

▲ 제주성 동북성구역의 문화유적분포 추정도. 학계에서도 달관대와 해산대의 위치는 정확하게 비정되지 않았다. 지역문화계의 원로들의 견해도 통일되지 않는데, 두 개의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금산수원지와 산지천변 전체 단애지역을 대상으로 지칭했다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제주성 북성과 주변의 단애 위쪽지역을 해산대로, 단애의 벽인 병풍바위를 달관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

위의 지도그림은 필자가 <제주읍성지적도>(1914년) 위에 노봉집에 서술된 삼천서당과 주변의 단애구역에 대한 각 시설물의 설명을 참고하고, <제주도측후소무선전신용목주신설공사내일부변경배치도>(1923년)의 공신정의 위치 등을 고증해본 것이며, 또한 우물들의 위치는 <제주성내음료수등가지역도>(1932년)에 표시된 용천수와 우물의 표시점들을 활용해 비정했다. 해산대의 위치는 등고선 지도의 최상부를 참고해 표시해 보았다. 노봉집에 전하는 삼천서당 인근의 경관과 그림에서 추정해보는 현재 측후소가 들어서 있는 구역은 제주성내에서도 가장 경관적으로 빼어났던 단애구역으로 소위 성내 유일의 절경지이기도 하다.

또한 그런 지형조건 때문에 오래도록 정자가 들어서 성내를 굽어보는 관경대의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주산이 없는 성내 입지로 보면, 제주성의 주봉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위에 재구성해 본 지도그림을 통해 보듯이 명승지이기만 했던 장소를 노봉은 어린 학생들의 학문도야와 선비정신이 깃든 조선유학의 경관으로 변모시킨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 구역은 철저하게 ‘노봉경관지’라 이름 붙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결국, 노봉은 흥학을 위해 삼천서당을 지었고 또한 그것과 관련한 부속시설들을 이곳에 집중시켰다. 학문도야의 장소와 그를 둘러싼 풍광의 해석과 의미부여를 통해 그는 제주성내의 방어시설과 관아구역을 뺀 최고의 문화경승지를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 제주지방기상청과 감리교회터 그리고 그 아래 주택지로 이루어지는 공간은 제주섬에서는 매우 드문 조선인문경관의 백미를 이루었던 곳이다.

▲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그러기에 감리교회가 들어서려 할 때 제주의 유림들과 성안의 원로들이 득달같이 일어나 반대했던 것이다. 당시에 누구보다 이곳 명승지를 잘 관리하겠다던 도인권 목사의 약속은 결국 없던 일이 되고 만 셈이다. 도 목사의 후예들은 이를 잊어버린 듯 기상청에 이 부지를 팔아넘겨버렸으니 말이다. 최소한 제주시 문화재 관련부서에 이의 처분을 상의라도 했을 수는 없었을까?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역으로 문화재부서 역시 이런 유서 깊은 공간이 팔리고, 또한 기상대를 신축한다는 소식이 이전부터 있었는데, 이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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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下편 "공신정 복원 막는 청사 이전...함께 해법 모색해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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