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72) 강림의큰부인 원형 2

전근대적 남성중심의 사회가 요구하는 스테레오 타입

강림의큰부인은 다음에 얘기될 원강아미 원형과 함께 전근대적 남성중심의 사회가 요구하는 표준여성형(스테레오 타입)의 원형이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이 여자는, 남자의 집에서 남자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큰 부인의 자리를 보전하고 있으니 그 그늘아래서 어떤 무시와 억압에도 함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요구된다.

그래서 많은 강림의큰부인들은 난 ‘잘 모르겠다’며 뒤에서 눈치를 보다가 상대가 좋아할 거라 판단되는 대응만 한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은 철저히 숨기면서, 위험한 여자로 보이지 않도록 노력한다. 처음엔 머리를 굴리며 계산된 순종으로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지킬까 궁리했지만, 그건 차츰 몸에 착착 감기는 자연스러운 순종으로 점점 굳어간다. 

강림의 아니마

강림은 그의 사회와 자신의 무의식이 투사한 여자를 본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증조부 고조부의 삶을 보아 왔고 어머니와 증조모 고조모의 삶을 들어 온 터라, 자신 역시 몇 명의 여자를 취하든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명의 여자를 취하고 사는 것이 남자의 당연한 권리이며, 그렇게 못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일이라 생각한다.

강림의큰부인과 열여덟 호첩은 강림의 아니마다.
한 여자가 있으나, 그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고, 재미도 없다. 강림은 변덕스런 마음으로 열여덟 호첩을 취하고, 그런 삶은 그의 허세를 만족시킨다.

강림의 본능과 육체가 꿈꾸는 아니마는 열여덟 호첩의 매끈한 이브들이다. 이런 아니마를 가능하게 한 건 물론 오래도록 구조화된 가부장제다. 한편 이런 원초적인 강림의 아니마는, 언제라도 거기 있고 어떤 일에도 온화한 미소를 지어주는 액자 속의 모나리자이기도 한데, 그 여자가 강림의큰부인이다.

▲ 빌리 와일더의 7년만의 외출(1955년). 남성들의 절대적인 아니마, 몬로와 모나리자(사진출처/씨네21, 네이버 지식백과).

강림의큰부인의 아니무스 역시 강림일 것이다.
열여덟 호첩을 거느리면서 어쩌다 한 번 찾아왔는데도 은옥미로 밥을 지어 진지상을 내는 강림의큰부인의 아니무스 역시 조상 대대로 남성에 관해서 그녀가 경험한 침전물이다. 그녀 속엔 죽을 위기에 빠져도 그깟 일에 남자가 울음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남성이미지가 있다. 자신의 남편이 열여덟 호첩을 거느리는 일이 한 편으론 그런 완전한 남자가 내 남자노라 으스대는 바탕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 미셸 오슬로 감독의 애니메이션 프린스 앤 프린세스(1999). 어린 시절의 모두, 어른 시절에도 거의 모두의 아니무스와 아니마로 존재하는 왕자와 공주. 내 안의 왕자는 어떻게 변해 왔을까?(사진출처/씨네21)

조강지처 원형

강림의큰부인에겐 큰 부인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유일한’ 혹은 ‘중요한’이 아니라, 다만 순서상의 첫 여자로 말이다. 

두 번째의 여자를 만날 때도, 열여덟 번째 부인을 취할 때도 강림의큰부인은 액자속의 모나리자처럼 존재했으니 ‘강림’의‘큰부인’이라는 이름이 그녀의 이러저런 속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고유한 이름이 되어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강림의큰부인은 조강지처의 원형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어가며 고생한 본처(本妻)를 이르는’ 조강지처라는 의미는 썩 어울리지 않지만 강림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큰 부인을 찾아왔고, 정성껏 남편을 위한 채비를 해주면서 비로소 삶을 나누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컷 놀아나다가 이제는 돌아와 조강지처 앞에 선 남편이 더 이상 고통과 수난을 주지 못할 때쯤 되어야, 이런 강림의큰부인 원형은 가정과 사회를 유지하게 한 기본이라며 때때로 호명될 것이다. 사회는 남편이나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희생하는 원강아미(원강아미는 남편과 아이를 잃지 않으려고 모진 고통을 이겨내는 제주의 여신이다.)들에게 양처와 모성의 표창을 내리듯, 끊임없는 소외와 무시를 죽은 듯 감내해 온 이 강림의큰부인에게도 조강지처의 표창을 내릴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표창은 가부장제를 위한, 가부장제의 표찰이다.

이름 없이 사는 삶

제주신화에서 특히 강림의큰부인 류의 조강지처 원형에 속하는 여신들은 거의 자신 고유의 이름을 갖지 못하고 있다.
강림의큰부인, 사만이의처, 여산부인과 같이 누구의 부인이고 누구누구의 처로 불려 지는 그녀들은 개체가 가지는 그 어떤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녀들은 우리의 전통적인 여인들처럼 배경 속에 완전히 스며들어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여성들이다.

무명무색의 강림의큰부인은 이 신화에 같이 등장하는 과양생의처처럼 자신의 사리사욕을 탐하지도 못하고 백주또처럼 자립적이고 강하지도 못하다. 가믄장아기처럼 능력있는 여성으로 주도적인 삶을 살지도 못하고 자청비처럼 자신의 욕망과 사랑을 찾고 만들어 가는 데 거리낌 없지도, 젊지도 못하다. 동시에 궁극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지고지순함 때문에 원강아미처럼 수난을 겪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강림의큰부인 유형들은 ‘관계’가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거나 심지어 부정적일지라도 무조건 지속적으로 그 관계를 유지시키려 한다는 점이 자청비나 가믄장아기, 백주또 유형들과 다른 점일 것이다.

이 두 부류의 가장 큰 차이는 관계 자체를 수단으로 생각하는지, 목적으로 생각하는 지에 있다.
자청비, 가믄장아기, 백주또는 관계 자체가 자신이 존재하는 또는 기득적인 지위를 가지게 하는 수단이 되지는 않는다. 그녀들은 바람직한 상대성을 요구하면서 관계의 본질을 잃지 않도록 늘 노력하였다.
자청비는 문도령과의 관계, 즉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보다는 늘 사랑이라는 것의 본질을 좇으려 노력하였고 결국 그녀의 사랑은 남편을 다른 여자와 공유하는 혁신적인 모습으로까지 이어진다. 가믄장아기는 일방적 의무로 주어지는 효보다는 진정한 인간심성으로서의 효를 지향하면서 부모와 자식 관계를 재정립한다. 백주또 역시 소천국에게 남편이라는 개인적 관계보다는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사회경제적 정의를 앞서 요구했다.

그녀들은 주어진 함의, 기득적 질서에 연연하기보다는 인간적인 원칙―사랑, 거부해야 할 기존의 질서들, 비인간적인 상대의 행동―을 관계의 기준으로 삼고 다양하게 관계속의 자신을 새롭게 구성해 나갔다. 상대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녀들은 그 관계를 개선하거나 파기했다. 좀 더 인간적인 삶과 사랑을 생각하게 되면서, 아버지에게 딸이면서 동시에 인간 개체로서의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 사회의 정의를 어기는 남편과 마주치면서, 그들에게 관계는, 고착된 것이 아닌 늘 변화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강림의큰부인 원형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어진 관계 자체의 유지를 위한 인내이다. 이미 맺어진 관계는 절대 파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던져지는 관계부정의 행동도 상관없다.
이런 인내가 언제나 그녀를 그 자리에 있게 해준다. 관계만 잘 유지할 수 있다면 주변에 대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데 별로 의미를 두지 않는다. 열여덟 호첩들을 얻어도 상관없다.

무조건 포용하고 인내하는 것

무조건 포용하고 인내하는 것은 그녀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일방적인 행동이나 음모에 대해서도 적당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무조건 고통과 수난을 감내하고만 있다. 

▲ 마그레트 올린의 엔젤(2009). 어머니도 딸도 돌봐야 하는 레아. 입양시킨 딸을 보러 가면서도 자기 몸조차 가누기 힘들만큼 약에 절어 있다. 모든 남성들의 아니마인 ‘엔젤’은 어디 있는가? 레아가 ‘엔젤’이 아니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상대가 ‘관계’ 속에서 악을 행했을 때 백주또는 내쫓았지만 강림의큰부인은 그러지 않는다. 상대에게 사랑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원강아미처럼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잘못한 것 없어도 때리면 맞고, 제발 나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오히려 자기가 죽어라 사정한다. 그렇게 버텨내는 게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라면 그래도 이해해 볼 나위가 있겠지만, 그리움도 정도 없다. 오면 어인 일인가 하고, 가면 이제 가는 구나, 한다. 그래도 별 탈 없이 호적에만 강림의 처로 건재해 있으면 된다.

상대방은 언제나 불쌍한 표정도 짓지 않으며 잘 참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그녀가 있다는 것이 편안하다.
본능과 욕망은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고, 여자들 역시 자신이 본능과 욕망을 쫓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편안하고 싶다.

익명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

이런 강림의큰부인 원형은 인간적 여성 원형이기도 하다.
열여덟이나 되는 첩을 두고 쾌락을 좇다가 위기의 순간이 되어서야 자신을 찾아 와 하소연하고 있는 강림을 그녀는 내쫓지 못하고 정성껏 대우한다. 그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또 그와의 관계에 꼭 연연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런 그가 불쌍하고 안 돼 보였을 수 있다.

인간이 가지는 많은 감정 중 가장 사랑스런 감정은 포용, 동정과 연민일 수 있다.
자신에게 미운 짓을 해도 적당히 받아들이는 아내가 되어 주고, 위험천만한 가정이 유지되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남편을 존경하고 따르며 부지런히 어지러운 것들을 청소해 주고 게다가 이해관계에 따른 사움이 나도 나서지 않고 양보하며 조용히 웃어 주는 게 어디 나쁜 일이랴. 인내와 수용으로 사회의 관례를 존중하는 것은 훌륭한 시민성이기도 하다.

문제는 세상이 여전히 많은 여성들에게 이 강림의큰부인 같이 살아야 한다고 암묵적인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고 그녀들 역시 관계에서 나오는 기쁨과 희열은 아니더라도, 그건 포기해버리고, 나 혼자의 풍요와 만족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계산된 순종을 기꺼이 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강림의큰부인은 그런 부당한 지배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가장 든든한 지지자로 서 있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만의 지고지순한 선은 오히려 세상이 이루어야할 선과 충돌할 경우가 많다. 여성주체의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해방된 지적 행위들과는 달리 강림의큰부인의 무조건적 순종은 그 자체로 남성지배의 결과이기도 하며 부당한 많은 것들을 유지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름 만족할만한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삶의 방법들이 부당한 지배논리를 유지시키는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될 수 있음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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