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타공인 '서문시장 공주' 복순이 할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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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시장, 걸으명 보멍 들으멍]  (5)대영상회 김복순 할머니 / 정신지

<제주의소리>의 주말 코너 ‘걸으멍 보멍 들으멍’에서 제주 곳곳을 누비며 할망 하르방들의 소박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온 인터뷰 작가 정신지가 이번엔 제주 전통시장에서 걸으멍 보멍 들으멍 글을 쓴다. 그녀는 일본에서 12년간 유학생활을 했고, 그 사이 유목민처럼 세계 17개국을 떠돌며 사람과 사회, 지역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일본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지역연구학) 과정을 수료한 그녀가 타고난 역마살을 내려놓고 지난해 초 고향 제주로 돌아와 할망 하르방들을 만나는데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왔다. 이제 그 발길을 잠시 전통시장으로 돌려 올해 문화관광형시장에 선정된 제주서문공설시장에서 상인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펜 끝이 전하는 시장사람들의 사람냄새 진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 서문시장의 분위기 메이커로 알려진 대영상회 김복순 씨(75). 코미디언을 능가하는 말솜씨로 듣는이 에게 늘 웃음을 선사하는 그이는 48년째 이곳에서 양품점을 경영하시고 계신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내가 스물여섯에 여기서 동동구루무(화장품)를 팔기 시작해서 이제 이른 다섯이니까, 어휴, 시장에서 청춘 다 보내고 늙어버렸네!”
“에이, 일흔다섯이라고요? 이모님, 거짓말하시는 거죠?”
“이모는 무슨, 할망(할머니란 뜻의 제주어)이지! 1939년생. 내 이름은 복순이 할망. 내가 좀 젊어 보이긴 하나? 웃기는 이야긴데, 그래서 나 노인 대학 입학도 거절당했었어, 그것도 두 번이나! 하하하.”

믿기지 않을 만큼의 동안(童顔), 고운 피부, 시원시원한 말투. 서문시장의 분위기 메이커로 알려진 대영상회 김복순 할머니는 이곳에서 올해로 48년째 옷 가게를 경영하고 있다. 하지만 원래 대영상회는 양품점이었다. 서양의 물건을 판다 해서 이름 지어진 ‘양품점(洋品店)’은 이제 웬만한 시골이 아니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다방, 이발소, 여인숙, 대폿집처럼, 아쉽지만 사라져가는 정겨운 가게 이름 중 하나다. 복순이 할망이 결혼하고 시장 한쪽에서 장사를 시작한 무렵만 해도 양품점은 그야말로 시장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공간이었다. 여자들은 새로 나온 옷과 화장품을 사러, 남자들은 양말을 사러, 아이들은 연필과 공책 사러 양품점을 찾았었다. 어디 그뿐인가, 공산품보다는 수공예품이 많이 팔리던 그 시절이지만, 양품점에서는 벽지도 팔았었고 초콜릿도 팔았었다. 그야말로 시장 안의 작은 백화점과도 같은 곳이었다.

귤 수확이 끝나 섬사람들 주머니 사정이 두둑해지는 겨울이면, 서문시장은 제주의 서쪽 시골 마을에서 몰려든 인파로 가게마다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물건들이 팔려나갔던 그 시절의 양품점을 김복순 할머니는 아직도 즐겁게 회상하곤 한다.

“그럼, 손님이 얼마나 많았다고! 처음 시작했을 때는 시장 여자 중에 내 얼굴이 가장 하얗고 고왔어(웃음). 결혼해서 아기도 낳기 전이고, 나는 그전까지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예쁘장했지. 그때는 장사하려고 내야 하는 권리금도 상당히 비쌌는데, 나는 직장생활로 모은 돈으로 여기에 양품점을 차렸어. 양품점이라기보다는 만물상? 화장품을 주로 팔았었는데, 혹시 동동구루무라고 알아? 오스카, 주리아라는 회사에서 나온 국산 구루무(크림). 딱분(파우더)도 팔고, 하하하. 

▲ 조천읍에서 제주시로 시집을 올 적에 혼수로 가져오셨다는 오래된 손미싱이다. 가게 한 복판에 가져다 놓으시고는 "멋있지 안허냐(멋있지 않아)?" 물으시는 할머니. 이제 전처럼 많이 쓸 일은 없지만 볼때마다 향수에 젖어 기분이 좋아진다는 그이의 보물이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늘 가게 안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으니까. 그렇지만 뭐, 옛날은 옛날이고! 이제 여기는 그냥 옷가게지. 지금은 단골손님 빼고는 거의 손님이 없어. 나도 늙었고 손님도 늙었으니까. 솔직히 공치는 날도 있고 그래. 그래도 이렇게 가게에 나와 있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데! 낮잠을 자더라도 여기 와서 자고, 집에 있으면 심심하니까 여기 나와서 이렇게 노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복순이 할망이 늘 가게에 앉아있는 것은 아니다. 젊게 사는 만큼 그이에게는 할 일도 해야 할 일도 많다. 게이트볼은 물론, 그라운드 골프, 파크 골프는 프로선수급으로 치고 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받고 신문에 이름도 났단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닌 노인복지시설에서 봉사활동도 하신다. 물론 그곳에 계신 노인들은 복순이 할망이 당신들보다 나이가 어린 줄 알고 있다는 것이 포인트다. 그뿐인가, 직장일 때문에 바쁜 며느리들을 대신해서 다섯 손자를 할망 손으로 시장에서 업어 기르며, 아기 보는 할망으로도 불렸었다. 이렇게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즐거워하고, 누군가를 위해서 시간과 정성을 할애하는 일에 그이는 열정적이다. 그러다 보니 나이를 먹을 틈도 없으셨는지,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복순이 할망의 일흔다섯이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제주도 동쪽 조천 해안가 마을에서 태어난 그이는 26세가 되던 해에 결혼한다. 옛날치고는 꽤나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셔서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온다.
“집에서 자꾸 시집을 가라고 했었는데, 중매로 소개받은 고향 남자가 맘에 안 들었어. 난 당시에 부산에 돈 벌러 가서 일하고 있었거든. 1950년대 중·후반이지 그러니까. 전쟁 끝나고 나라가 온통 혼란스럽고 다들 힘들게 살았을 때, 거리에 버려진 고아들이 참 많았어. 그런 아이들을 길거리에서 데려와서 치료하고 고아원에 보내는 한 미국 병원이 있었는데, 거기서 5년간 이런저런 잡일을 했지. 하이고, 힘들게 일은 했지만 그땐 부산서 참 바쁘고 재미있게 살았지. 근데 부모님이 하도 결혼 걱정을 하시기에, ‘걱정맙서(걱정 마세요), 서른까지는 꼭 가쿠다(가겠어요)!’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려 놓고는 결혼하기 싫어서 끝까지 도망 다니다가(웃음), 스물여섯에 우리 아기 아방을 만나가지고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중매는 중매였는데 세상에, 무슨 남자가 만나자마자 당장 결혼하자고 하는 거야. 보름도 안 되어서 날을 잡아와서는 나 아니면 안 된다고. 그래서 뭐 하는 수없이 서문시장 바닥에 눌러앉았잖아. 안 그랬으면 자격증 따서 쭉 병원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어이구, 이렇게 평생 양말쪼가리나 팔려고 결혼을 했나, 하하하!”

▲ 대영상회는 원래 양품점이었다. 화장품, 옷, 문구, 벽지등, 없는 것 없는 만물 잡화상으로 사람이 바글바글했기에 시장 안의 작은 백화점 같은 곳이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할머니들이 주로 찾으시는 옷을 가져다 놓고 팔고 계신다. 손님도 늙고 나도 늙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복순이 할망 말씀. 가게 안에 진열된 화려한 몸빼 바지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 복순이 할망이 시집오고나서 부터 쓰셨다는 가위다. 믿기지 않을 만큼 젊어보이는 할망이지만, 오래된 가위를 들고 계신 손바닥위로 그이가 걸어온 수 많은 길들이 손금처럼 뻗어있는 듯 하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뭐든 씩씩하게 웃으며 말씀하시지만, 할망은 젊은 시절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겪지 못한 것이 한이 되신 모양이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고.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기에도 바쁜 인생, 후회해봤자 무얼 하느냐고 쩌렁쩌렁 큰소리로 말씀하신다.

“내가 사실 교통사고를 한 번 크게 당했었어. 7년 전에. 트럭하고 부딪혔는데 뇌에서 출혈이 난 거야. 그래서 며칠 간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있었지. 가족들은 내가 죽은 줄로만 알았어. 그러다가 일어났는데 갑자기 트럭운전사 생각이 나는 거야, 그래서 아들에게 그 사람은 어찌 되었느냐 물었더니 멀쩡하다고. 근데 그게 얼마나 슬프던지, 세상에 젊은 사람 인생을 이 노인네가 망쳐놨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힘들게 먹고 살면서 트럭 운전하는 젊은 사람인데, 나만 다쳐서 다행이지만 그 사람은 사고 때문에 분명 직장을 잃었을 거 아니야? 아무튼, 그렇게 한 번 죽다가 살아나고 나서 내가 많이 달라졌어. 우리 아방도, 그렇게 내가 한 번 큰일을 겪으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매일 즐겁게 놀다 가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고. 그러니 우리 아방도 나도 서로 경쟁하면서 늘 바쁘게 즐기며 살지. 밖에 나가서 새로운 것도 많이 배우고, 활동도 많이 하고. 근데 문제는! 이 노인 대학이라는 곳이 내가 젊어 뵌다고 학생으로 나를 받아주질 않잖아. 처음에는 왜 젊은 사람이 와서 파스를 타 가느냐고 주위 할망 하르방이 얼마나 핀잔을 줬는지 몰라, 하하하. 우리 아기 아방은 나보다 한 살 많아도 훨 늙어 보이니까 문제없이 노인정, 노인대학 출입하는데 나는 영 힘들어. 하하하.”

 

▲ 자타가 공인하는 공주병인 복순이 할망. 하지만 그이의 공주병은 긍정의 공주병이다. 늘 새로운 것을 배우고 사람들과 같이 그것을 공유하며 바쁘게 살아가시는 복순이 할망이기에, 하루하루 나이를 거꾸로 잡수고 있는 게다. 해가 갈수록 젊어지는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을 할망은 늘 즐거운 자랑으로 여기신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 손님이 안와서 공을 칠 때도 있지만, 이렇듯 할망은 매일 가게에 나와서 손님을 기다리신다. 평생을 시장에서 살아온 사람이니, 시장이 내 집이고 고향이라 말씀하시는 할망. 낮잠을 자더라도 가게에서 자는 것이 좋다하신다. 할망이 집에서 직접 기른 고추를 다듬고 있다. 고추를 다듬으며 옛날 이야기를 하다 웃음보가 터진 복순이 할망.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그렇게 말씀하시며 할망은 박장대소다. 젊게 사시는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할망은 자타가 공인하는 공주병. 하지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긍정의 공주병이다. 요즘은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 즐겁다는 복순이 할망은, 서랍 속에서 악보를 꺼내어 보여주신다. 따라 부르라며 펼쳐 놓은 악보에는 4개국어로 “나는 기쁘다 / 나는 기쁘다 / 나는 기쁘다 / 항상 기쁘다.” 라는 가사가 쓰여 있다. 손뼉을 치며 큰 목소리로 시장이 떠나가라 노래를 부르는 복순이 할망. 주변 포목점 아주머니들도 까르르 한바탕 또 웃음바다가 된다. 언제까지 가게를 계속하겠느냐는 질문에 그이가 말했다.

“아무리 장사가 안 되어도 여길 닫을 수는 없을 것 같아. 평생을 시장에서 살아온 사람이니, 집에 있어봤자 놀러 오는 친구도 없잖아. 한창 서문시장이 잘 될 적부터 단골손님이었던 서쪽 시골 마을 할망들은 지금도 ‘복순이 할망 아직 이신가(있을까)?’ 해서 시에 나올 때마다 여길 찾아주고 그러는데, 내가 관두면 얼마나 섭섭할 거야? 여기는 내가 항상 있어야 할 집이고 고향 같은 곳이니까. 아마도 쉽게 문을 닫지는 않을 거야, 건강하기만 하면.”

그러고 있는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할망손님이 한 분 들어오신다. “성님, 구경만 해봅서(구경만 해 보세요).”하고 예쁜 목소리로 싹싹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그이는 역시 프로답다. 결국, 복순이 할망이 추천해 준 멋진 윗도리를 구매하시고 나가시려던 손님이, 아까부터 공손하게 자꾸 자신을 ‘성님’이라 부르는 복순이 할망 얘기가 귀에 거슬렸는지 이렇게 물었다.
“아맹해도(아무래도) 내가 언니 닮긴 헌디(같기는 한데), 사장님은 연세가 어떵 되셤수과(어찌 되십니까)?”
“토끼띠 마씨(입니다)”
“그럼 나보다 나이가 훨씬 젊구나.”
“아니, 1939년생 토끼띠 마씨.”
“메께라!(어머나!), 나는 말띠(1942년생)인데, 그럼 사장님이 나보다 성님이로구나. 아이고, 잘도 기분 좋게 속았수다(속았네요)! 하하하.”

 

▲ 정신지 인터뷰작가

젊어 보이는 것도 상술이란 말인가? 건강하고 행복하신 복순이 할망 덕분에, 서문시장에는 오늘도 즐거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손님과 주인 사이에 오가는 짧고 무뚝뚝하게 들리지만 진득한 정이 담긴 제주사투리는 듣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다. 
“하영 폽서(많이 파세요).”
“예~에~, 혼저 갑서(네~네, 안녕히 가세요).” <제주의소리>

<정신지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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