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시장 걸으멍 보멍 들으멍](8) 서문초석 김영애 할머니 / 정신지

<제주의소리>의 주말 코너 ‘걸으멍 보멍 들으멍’에서 제주 곳곳을 누비며 할망 하르방들의 소박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온 인터뷰 작가 정신지가 이번엔 제주 전통시장에서 걸으멍 보멍 들으멍 글을 쓴다. 그녀는 일본에서 12년간 유학생활을 했고, 그 사이 유목민처럼 세계 17개국을 떠돌며 사람과 사회, 지역에 대한 이해를 넓혀왔다. 일본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에서 문학박사(지역연구학) 과정을 수료한 그녀가 타고난 역마살을 내려놓고 지난해 초 고향 제주로 돌아와 할망 하르방들을 만나는데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왔다. 이제 그 발길을 잠시 전통시장으로 돌려 올해 문화관광형시장에 선정된 제주서문공설시장에서 상인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펜 끝이 전하는 시장사람들의 사람냄새 진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 서문초석 김영애 할망(70). 전남 당양에서 열아홉에 제주로 시집 온 김영애 할머니는 서문시장에서 25년째 초석집을 지키고 있다. 신혼시절 이야기에서부터 오십년을 제주사람으로 살아온 삶에 굴곡이 많았을텐데 옛날 이야기를 마냥 행복한 웃음과 함께 들려주고 있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사장님, 초석이 뭐죠?”
“아이고, 그걸 몰라? 이것이 바로 초석이주게!”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초석가게 주인에게 초석이 뭐냐고 묻고 있자니 꽤 창피하다. 그러고 보니 가게 안에는 돌돌 말린 돗자리며 병풍, 크기가 다른 여러 모양의 교자상과 왕골 바구니가 한가득 이다. 시장에서 25년째 서문초석을 경영하고 계신 김영애 할머니(1944년생)는 초석의 뜻이 뭔지 모르는 내가 마냥 신기한가 보다.

“하기야, 요즘 사람들은 초석이라 해도 잘 모르지. 이제 이런 가게도 시장에 많이 없으니까……”

 

▲ 서문초석. 서문시장에 자리 잡은지 25년째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초석(草席)은 돗자리를 말한다. 왕골(갈대)이나 볏짚 등으로 만들어진 멍석이나 돗자리, 강화도 하면 떠오르는 화문석(이제는 소비가 줄어 생산이 거의 중지되어버렸다는) 등이 대표적이다. 관혼상제의 의식이 있을 적마다 빠지지 않고 사용되고, 여름이면 시원하게 마루에 펼치고 윷놀이를 할 적에 마당에 까는 멍석도 한데 묶어 초석이라 했었다. 전통시장에는 예부터 초석을 파는 가게가 있었고, 잔치나 제사에 주로 쓰이는 만큼 초석집에서는 그것에 필요한 교자상이나 병풍, 혹은 제기용품을 같이 팔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활습관과 소비성향이 달라지며 초석집은 그 이름조차 생소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국산 수공예 돗자리보다 열 배 스무 배는 저렴한 외국산 제품들이 인터넷과 마트를 통해서 저렴하게 유통되고 있는 지금, 전통시장이니까 하나 정도는 있어야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유지가 힘든 상점 중의 하나가 초석집이다. 그러한 연유로 김영애 할머니는 제주시의 오일시장에서도 꾸준히 돗자리를 팔아왔다. 하지만 천 개가 훌쩍 넘는 점포가 서는 제주시의 오일시장에서도 초석집은 세 곳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니,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서문시장 안에 자리 잡은 그이의 가게는 생소하지만 귀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옛날에는 제사를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는 날마다 지냈잖아. 그러면 일 년이면 몇 분이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많았어. 제사상도 쓰다가 부서지면 또 사가고, 병풍도 구멍 뚫리면 또 사가고 했는데, 요즘에는 할망 하르방 조부모 제사는 아예 모아서 한 번에 지내기도 하지. 번거롭고 생활이 어렵고 하니까 아예 제사를 안 지내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 장사가 안돼. 제사나 잔치가 많아져야 나한테는 좋은데. 게다가 중국산으로 싼 물건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이제는 정말 오는 손님만 가끔 오지, 와도 예전처럼 정말 좋은 국산 물건을 제값에 사가고 그러지 않지. 다 싼 것만 찾거나 이제 여기 있는 물건은 찾지 않는 세상이난.”

   
▲ 관혼상제의 의식이 있을 적마다 빠지지 않고 사용되고, 여름이면 시원하게 마루에 펼치는 돗자리, 윷놀이를 하며 마당에 까는 멍석, 이 모든것을 묶어 초석(草席)이라 한다. 할망은 오일장에서도 초석집을 운영하고 있지만, 점포수가 천여 개에 달하는 오일장에서도 초석집은 세 개 밖에 없다니, 서문초석의 존재가 사뭇 소중하게 느껴진다./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 생활문화가 급변하면서 전기청소기에 밀린 싸리빗자루도 점점 주변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자고나면 사라지는 것들이 점점 그리워진다. 그래서 서문시장에 오면 만날 수 있는 서문초석집은 마치 박물관을 보는 것 같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할머니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가득하다. 손님이 있거나 없거나 늘 단정한 옷매무새에 환한 미소로 가게 안에 앉아있는 그이는 상인들 사이에서도 성격 좋고 부지런한 어르신으로 통한다. 젊어 보이기로 말하자면 이 분도 여느 서문시장 할머니에 뒤지지 않기에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동안이지만, 연세를 여쭙자 올해로 일흔. 고향은 전라남도 담양이란다. 적당하게 섞어 쓰시는 제주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가 참 맛깔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다. 듣고 보니 그이와 초석집과의 인연은 담양이 그 시작이었다. 담양 하면 ‘대나무’ 아닌가? 고향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이야기에 흥이 더해진다.

“나는 결혼을 잘도 빨리했어. 족두리 쓰고 가마 타고 결혼했지, 열아홉에. 그때는 맘에 들고 안 들고도 없어. 안 하고 싶어도 해야 해시난(했으니까) 신랑은 나보다 7살 많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나는 완전 아기였지. 첨에는 신랑이 너무 맘에 안 드는 거야! 너무 빨리 갑자기 시집을 왔잖아. 그래서, 한 석 달을 살다가 친정으로 도망 가부런(가버렸어), 아무 말도 안 하고, 하하하. 힘든 것보다는 남편 집이 너무 추웠던 것도 있고. 갑자기 생판 모르는 사람이랑 종일 한 방에 있으려니 너무 어색하잖아? (웃음)…. 아주 가야지, 하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고. 그 순간 낯설고 하니까 그냥 와 버린 거지. 친정에서는 당연히 깜짝 놀랐지. 엄마한테 ‘여기서 조금만 있다가 갈게요.’ 하니까 우리 엄마는 별말 않으시고 나를 받아주시더라고. 시어머니도 조금 쉬었다 오라하고. 그러다가 한 달 즈음 되니까 신랑이 나를 찾으러 완(왔어). 어른들 계시니까 조심조심하면서(웃음). 한 달을 집에서 쉬면서 ‘앞으로 잘 살아질랑가?’ 생각도 좀 하고. 그러니까 괜찮아지더라고. 그 후에는 남편 집으로 들어가서 탈 없이 잘 살았어. 한복 입고 앞치마 입고 아침마다 문안 인사드리고. 옛날엔 시집가면 다 그렇게 살안. 자랑은 아니지만, 이래 보여도 내가 담양에선 양반집 딸이여. 하하하.”

그렇게 시작된 할머니의 결혼생활이다. 결혼하고 나서는 남편과 함께 생계를 위해 마을에서 나는 대나무로 만든 소쿠리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둘째를 낳고 서른다섯이 되었을 때 두 분은 제주행 배에 오른다. 커다란 결심이었다. 당시는 담양 죽제품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때라, 장사를 하며 살기 위해 서울로 가는 사람, 부산으로 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제주를 택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살짝 웃으며, “그러게, 왜 그랬지? 제주가 내 운명이었나 보지!” 하신다.

   

 

▲ 서문초석 김영애 할망(70). 열아홉에 결혼을 하고, 갑작스런 신혼생활이 적응이 안되어 친정집으로 도망을 와 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며 크게 웃는다. 까마득한 옛 이야기이지만 할망은 지난 날의 어렴풋한 기억들이 되 살아나 기분이 좋단다. 족두리 쓰고 가마 타고 시집 왔던 그 열아홉의 추억에 웃음이 한가득.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 생활습관과 문화가 변화며 할망이 파는 물건을 찾는 사람들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예전처럼 잔치나 제사가 많아져야 장사가 잘 될터인데, 중국산으로 싼 물건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이제 이곳에는 정말 오는 손님만 가끔 올 뿐. 하지만 그래도 시장에는 초석집이 있어야 한다며 자신의 일에 긍지를 느끼는 할망이다. / 사진=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Simon Powell(영국, 한국명 박사민) ⓒ 제주의소리

1978년, 제주에 도착한 그들 부부가 별다른 정보도 없이 향한 곳은 제주의 동쪽에 자리 잡은 구좌읍이다. 제주시에는 이미 먼저 담양에서 와 자리를 잡은 상인들도 있었으니, 시골에 가면 왠지 더 장사가 잘 될 것 같은 마음에 무작정 외곽으로 간다는 것이 구좌읍 세화리였다. 처음에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제주어 때문에 고생도 좀 하셨다지만, 익숙해지고 나니 세화는 풍경도 좋고 살기 좋은 그런 좋은 곳이었다.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소쿠리를 머리에 인 채 바닷가 마을을 걷는 할머니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평화롭다. 살다 보면 정 붙이는 곳이 고향이라고. 할머니는 제주가 점점 좋아져 갔다. 그렇게 그들 부부는 세화에서 고향 담양에서 가져온 소쿠리를 팔며 2남 2녀를 길렀다. 전기밥통 대신에 바구니에 밥을 넣고 먹던 그 시절, 담양에서 가져온 질 좋은 소쿠리는 제주 아주망들에게 단연 인기였다. 그렇게 세화에서 십 년을 살며 모은 돈으로 제주시로 터전을 옮기며 시작한 서문초석은 올해로 개업 25년을 맞이했다.

“아이고, 그라고 봉께 세월 참 후딱 갔네. 시집오고 나서 벌써 오십 년 이 장사를 하니까. 지금은 옛날처럼 장사가 잘 되지도 않고, 앞으로 잘 될 것 같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옛날처럼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없으니 큰 걱정도 어서(없어). 그냥, 우리 초석집이 없어지면 오랫동안 쭉 와주던 손님들한테 미안하니까. 힘닿는데 까지는 여기 이렇게 있을라고. 여기가 내 자리니까. 자식들은 자기들 인생 잘 살고 있고, 족은 아들이 장가를 안 가서 걱정이지만 다른 걱정은 없어. 돈 달라는 놈 없고 땡깡 부리는 놈 없으니까(웃음). 가끔씩 한의원에나 한 번씩 다니지, 아직은 아파서 병원에 간 적은 없어. 다만, 요즘에는 부쩍 죽은 하르방이 보고 싶을 때가 있긴 해. 7년 전에 병으로 아파서 돌아가셨는데. 가끔씩 지치고 몸이 힘들 때 하르방 생각이 나. 그 양반 나한테 잘도 잘 해줘 나서. 같이 살 때는 몰랐는데, 참 부지런하고 착한 양반이었지…. 아이고, 그랑께 있을 때 잘해야지. 죽어불민 아무 소용없다. 요즘 사람들은 중간에 싫어지면 쉽게 치우고들 그라지. 헤어지고 이혼해 불고 쉽게 쉽게. 그런데 사람이 그러면 되나? 사람 관계라는 것이, 한 번 만나면 끝까지 매듭을 지어야지. 좋아도 싫어도 끝은 꼭 오니까”

 

▲ 정신지 인터뷰작가 ⓒ 제주의소리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하고 쉬라며 자식들은 안달이다. 그러나 남이 뭐라 하든 그이는 아침 8시면 가게에 나와 문을 열고 저녁까지 자리를 지킨다. 손님이 오든 안 오든, 장사가 되든 안 되든 쉬는 날은 거의 없고, 오일시장이 서는 날이면 그곳에서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린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변치 않는 모습으로 같은 곳에 서 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다. 하지만 할머니가 늘 같은 자리를 고집하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듯하다. 자신의 물건을 아직 필요로 해주는 손님들에게 늘 고마워하며 같은 자리에 한결 같은 미소로 서 있는 할머니. 한 번 시작된 인연에는 끝까지 책임을 지어야한다는 고집스런 신념으로, 오늘도 서문시장을 소리 없이 빛나게 하는 고집스런 상인이다. / 정신지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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