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범 칼럼> 도민은 ‘재선충 전쟁’...도지사는 ‘입당 전쟁’

 ‘소나무 재선충 병과의 전쟁’이 선포된 후 작업에 나섰던 도민들의 인명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전직 애월 이장님이 한 달 전 고사된 소나무들을 제거하다가 운명을 달리 하셨고,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또 한 분의 일꾼이 순직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소나무 잡는 재선충병 사람까지 잡는다”는 농담 섞인 푸념이 이제 우리 속담집에 정식으로 실릴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 사람 잡는 뒷북행정

‘재선충병 전쟁’도 전쟁이란 것을 입증하려 하는 것일까? 고사목 벌목 작업에 나선 도민들의 희생이 적지 않다. 사전에 관계부서의 약간의 관심만 있었더라도 재선충이라는 화마가 온 산을 태우기 전에 힘들이지 않고 간단히 불씨로 잡을 수 있는 일이었다. 사태가 극도로 악화된 이후에야 요란스럽게 ‘전쟁’이라는 살벌한 구호를 외쳐가며 주도면밀한 안전대책도 없이 무모하게 사태수습에 나선 제주도의 ‘뒷북행정‘ 때문에 작업에 동원됐던 애꿎은 도민들의 아까운 목숨만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관련부처 책임자에게 “직을 걸고 고사목 제거에 나서라”는 도지사의 추상같은 말씀에는 시대착오적인 군사문화 냄새가 풀풀 난다. 그 발언을 들으니 유독 사단장이나 윗사람이 부대를 방문할 때에만 운동장에서 잡초를 제거하거나 창틀과 관물대에 없는 먼지까지 애써 털어내는 시늉을 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는 수십 년 전 어느 당나라 군대의 케케묵은 얘기가 떠오를 정도다.

굳이 공무원직을 걸지 않더라도 직무상 해야 할 일이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임기가 반년도 채 남지 않은 선출직 최고공직자의 지시에 영이 제대로 서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제주도의 공무원 조직이 도지사가 이렇게 엄중한 명령을 내려야 비로소 움직일 정도로 근무기강이 해이된 것인가? 그러나 작업 현장에 나서는 일반 도민들은 단지 일자리 정도가 아니라 목숨까지 걸고 있다.

이 과장된 언사에는 초기대응 실패에 대한 도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나머지 그 책임을 이 한마디로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한 ‘보여주기’ 식 행정의 심리가 깔린 것은 아닐까?

# 겉멋만 잔뜩 들어간 전시행정

전시행정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재선충병 예방은 별로 빛이 나지 않는 하찮은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주도가 전시행정에 들였던 정성과 관심의 단지 1%라도 있었다면 현재의 재선충병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타이틀을 따는 것에만 신경을 쏟은 나머지 소나무병 방제작업에는 미처 관심을 돌릴 겨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세계7대자연경관 선정 운동 때는 순진한 어린이들 저금통까지 깨고 도민들의 호주머니 쌈지 돈까지 털어서 마련한 수 백 억 원을 국제전화요금으로 아낌없이 쏟아 부은 제주도였다. 하지만 그 대가로 받은 것은 지금 관광지 입구마다 썰렁하게 붙어있는 세계7대자연경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녹슨 동판들뿐이다. 관광지에 등급을 매기는 것도 그렇거니와, 필자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방식으로 후보지를 선정하는 그 정체모를 한 해외 사설기관의 평가에 얼마나 공신력이 실릴 수 있을까 의문이다.

오히려 유네스코 3관왕이나 세계7대자연경관이나 세계환경수도 같은 명칭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자연을 대대손손 잘 보존하고 가꾸는데 모범이 되라는 사명과 책임을 우리들에게 부여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소낭밭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겉만 번드르르한 명칭들을 붙들고 있는 게 오히려 염치없는 짓이 아닐까? 지금 우리의 현실은 실속도 없이 겉치레에만 신경 쓰다가 소중한 유산을 탕진해버린 불효자의 전형을 보고 있는 것 같다.

# 여당 입당과의 전쟁

더욱이 이번 사태에 전력을 쏟아도 모자랄 판국에 도정의 최고책임자가 여당 입당을 위한 샅바지르기에 열중한 것은 ‘재선충병과의 전쟁’이라는 거창한 구호와 달리 이번 사태에 임했던 도정의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도지사의 여당 입당설이 설왕설래하는 것에 여론의 초점이 쏠리는 바람에 소나무들의 집단 폐사문제는 사안의 시급성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관심에서 뒷전으로 물러나버렸던 감이 없지 않다. 

결국 도민들은 ‘재선충과의 전쟁’을 벌인 반면, 정작 도지사는 ‘여당 입당과의 전쟁’을 벌인 셈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번의 사태를 지자체 단체장이 차기선거만 의식한 나머지 표와 관련된 전시성, 선심성 사업만 남발하며 ‘제사보다 잿밥’에 눈독을 들이는 이기적 행태가 결국 화를 불러온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 김헌범 제주한라대 교수

재작년 산림과학원이 재선충 소나무 고사목을 수천 그루로 집계하고 있을 때 제주도는 불과 몇 십 그루일 뿐이라며 사태를 방관했다고 한다. 이제는 재선충의 번식기인 내년 4월 까지 베어내야 할 소나무들이 20만 그루가 넘는다. 일 선충으로 가볍게 끝날 재선충이 이미 몇 백, 몇 천 선충을 넘어서 버린 것이다. 예정대로 수습하는데 실패할 경우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임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까지 잡은 재선충 병이 자칫하다가 눈독을 들이던 차기 도지사 선거까지 잡을지도 모른다. 만시지탄이지만 맡은바 책임을 다하는 도정의 분발을 촉구한다. / 김헌범(제주한라대학교 간호과 교수)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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