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14) 김달삼과의 평화회담을 이끈 김익렬

-김익렬은 누구인가

▲ 고 김익렬 장군.

‘제주도 국방경비대 제9연대는 귀양살이 연대였다/ 아무도 오지 않으려는 곳/ 제주도/ 이곳에 김익렬이 왔다/ 일본군 소위 경력/ 제주도에서/ 그의 야전생활이 시작되었다//

육지에서 건너온 경찰/ 청년단/ 군인/ 세 힘이 제주도를 밟았다//

민심은 산으로 향했다/ 경찰 발포로/ 민심이 일어났다//

제주도 지사도/ 제주도 경찰서장도/ 제주도 유지도/ 산과의 협상을 방기했다//

김익렬 연대장이 나섰다/ 어머니와 아내/ 두살 난 아들을 볼모로 제안했다/ 그는 유서를 써두었다/ 어머니와 아내에게/ 어린 아이에게/ 그리고 총사령관에게 썼다//

연대장은 장병들에게 말했다/ 오후 5시까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전투행동에 돌입하라/ 부연대장 지휘를 받으라// 그는 약속지점으로 갔다//

산의 지도자 김달삼은 '백두산'을 피웠다/ 연대장은 '러키스트라이크'를 피웠다/ 두 사람은/ 전투 중지에 합의했다//

선 선무/ 후 토벌의 원칙에 따랐다//

그가 돌아왔다/ 제주도의 평화를 안고 왔다/ 그러나 제주도에 건너온/ 군정청 조병옥 부장은/ 그를 빨갱이와 내통한 빨갱이새끼라고 대들었다/ 조병옥의 멱살을 잡았다/ 난투극/ 민정장관 안재홍과/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이 말렸다/ 딘 소장은 구경하고 있었다//

다음날 김익렬 연대장은 딘에 의해 해임되었다// 제주도의 평화가 여기서 깨졌다/제주도의 학살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고은의 시 ‘9연대장 김익렬’ 전문

‘사건의 발단은 소위 4·28파업사건과 3·1기념행사 관계로 도내에서 약 2,500명의 청년들이 경찰에 구금되었고 이 때 3명의 고문 치사자가 생기고 3월 15일 이 시체를 투강하려다 그 가족들에게 발견된 것이 극도로 민심에 큰 충격을 준 것이라고.....낮에는 농부이고 밤에는 반란군에 가담하는 일이 많은 산사람의 정체를 분별하기 어려운 도외에서 온 경찰대의 무차별한 사살은 상호간 너무나 엄청난 살생이 생겼을 뿐더러 무력으로써는 도저히 동 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볼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주4·3의 의인(義人) 김익렬(金益烈)이 1969년 집필한 회고록 ‘4·3의 진실’에서 발췌.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이치업(李致業)중령은 명에 의하여 거(去) 2월 1일부로 제2연대장(대전)으로 영전케 되어 불원간 이도하리라 하는데 씨(氏)는 약 10개월 간의 본도 체임 중 군 건설에 다대한 공헌이 있었으며 특히 민간 측에 있어서도 호평을 획득하여 이채 띄우고 있었던 바, 씨의 금반의 이임에 제(際)해서는 군민간에 있어서 퍽이나 석별의 정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런데 제9연대 후임 연대장은 현 부연대장 김익렬(金益烈)소령이 임명되었다 한다.’-제주신보 1948년 2월 14일

김익렬(金益烈, 1921~1988)은 경상남도 하동 태생으로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일본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해방 후 일본군 학병으로 귀환하였고,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소위에 임관했다. 1947년 9월 제9연대 부연대장으로 제주에 부임하고, 1948년 2월 제9연대 연대장으로 승진했다. 

1948년 4월 28일 김익렬은 김달삼과 평화회담을 추진하였다. 평화협상이 체결되어 전투를 72시간 이내에 중단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5월초 미군정과 조병옥 경무부장 등이 강경 일변도의 진압 정책으로  평화협상은 깨졌다.

5월 5일 제주중학교에서 열린 수뇌부 회의에서 김익렬과 김달삼은 일본 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 동기생인 것과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인 것을 폭로한 조병옥 경무부장과 충돌했다. 그는 진압에 반대하여 5월 6일 9연대장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여수 주둔 제14연대장으로 전출됐다. 

김익렬의 후임 박진경(朴珍景)은 토벌 작전을 추진하다가 1948년 6월 18일 남로당원인 문상길 중위의 부하에게 암살됐다. 김익렬은 1948년 6월 박진경 연대장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받아 미육군방첩대(Counter Intelligence Corps, CIC)의 조사를 받았다. 

1948년 8월 제13연대장으로 발령됐고, 1950년 6월 제1사단 제13연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북진 작전을 수행하였다. 한국 전쟁에서는 개성 문산 전투 등에 참여했다. 1952년 5월 제8사단장, 1955년 7월 제7사단장, 1960년 제1관구 사령관, 1962년 제1·2군단장, 1967년 5월 국방대학원장 등을 역임하고 1969년 1월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말년에 제주 4·3사건의 진실을 담은 유고를 남겼다. 1979년 5월부터 1981년 2월까지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 14대 이사장을 지냈다. 1988년 12월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금반 군 출동에 제(際)하여 제9연대장 육군중령 김익렬(金益烈)씨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30만 도민여러분! 본 연대는 본도에 주둔한 이래 도민여러분의 부단(不斷)의 □□□□ 밑에 (3줄 누락) 도내 각지에서 야기된 전고(前古) 미증유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도내 민심은 극도로 동요, 불안에 빠지고 있음으로 본 연대에서는 정부재산 및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사오니 도민제위는 안심하고 직장에 매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5줄 누락) 군기대, 정보부, 파견대 본부에 속히 연락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상기 목적 완수에는 도민제위의 긴밀한 협조에서 기할 수 있다고 믿어마지 않습니다.”’-제주신보 1948년 4월 18일

- 김익렬 연대장 성명 발표

‘이 사태에 황겁한 미군과 그의 중복인 유해진(柳海辰) 도지사, 김익렬(金益烈) 9연대장은 악을 써서 “유격대는 속히 하산하고 질서 유지에 협력하라. 만약 부락에 잠입 은닉한 경우에는 처단하겠다”는 요지의 경고문을 광포해서, 인민들과 유격대와의 상호 연계성을 끊고, 무장대 내부를 외해하기 위한 위협공갈과 회유기만책을 능란하면서 새로운 반동의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각종 방법과 수단을 다하여 인민들의 반항기세를 제압해 보려고 혈안이 되고 있었다.’-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서 발췌

‘15일 민전(民戰)에서는 제주도 사건에 대하여 성명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제주도사건은 그 동기가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일어난 애국적인 것이므로 이를 살상, 탄압한 것은 불가한 것이라고 격렬한 문구로써 호소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4월 17일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가 일어났을 때, 제9연대는 이 사건을 도민과 경찰 서청간의 충돌로 간주하고, 군이 개입할 입장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데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제9연대는 4월 13일 10명 미만의 특별부대를 파견하였다. 김익렬 9연대장도 성명을 발표, 군은 정부의 재산과 인민재산을 확수(確守)하기 위하여 군이 출동하였다며 그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금반 군 출동에 제(際)하여 제9연대장 육군중령 김익렬(金益烈)씨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30만 도민여러분! 본 연대는 본도에 주둔한 이래 도민여러분의 부단(不斷)의 □□□□ 밑에 (3줄 누락) 도내 각지에서 야기된 전고(前古) 미증유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도내 민심은 극도로 동요, 불안에 빠지고 있음으로 본 연대에서는 정부재산 및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사오니 도민제위는 안심하고 직장에 매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5줄 누락) 군기대, 정보부, 파견대 본부에 속히 연락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상기 목적 완수에는 도민제위의 긴밀한 협조에서 기할 수 있다고 믿어마지 않습니다.’-제주신보 1948년 4월 18일

그러나 미군정 수뇌부는 경찰력만으로 한계를 느끼자 4월 17일 제주주둔 미군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을 통해 제9연대에게 진압작전에 참여토록 명령했다. 아울러 부산 제5연대 1개 대대(진해 주둔)를 4월 20일부로 제주에 파견하도록 명령하면서 부산 제3여단의 미 고문관 드루스(Clarence Dog De Reus) 대위가 이에 동참하도록 했다.

딘 군정장관은 이어 4월 18일 맨스필드 중령에게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를 파악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이 평화협상은 제주4·3사건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평화협상은 김익렬 연대장 혼자의 결정으로 이뤄진 게 이니었다.

맨스필드 중령의 요청을 받은 김익렬 연대장은 즉시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만들어 4월 22일 비행기를 통해 살포하였다.   

‘단선단정을 죽음으로써 항거하려는 제주도의 투쟁은 날로 확대하여가고 있어 평화의 섬 제주도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터로 화하고 있는 터인데 방금 현지에 출동중인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육군중령 김익렬(金益烈)씨는 지난 22일 다음과 같은 전단을 비행기로 산포하여 그 가열한 전투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친애하는 형제 제위에 : 우리는 과거 반삭(半朔) 동안에 걸친 형제 제위의 투쟁을 몸소 보았다. 이제부터는 제위의 불타는 조국애와 완전 자주통일 독립에의 불퇴전의 의욕을, 그리고 생사를 초월한 형제 제위의 적나라한 진의를 잘 알았다. 이에 본관은 통분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이 이상 백해무득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국방경비대는 정치적 도구가 아니다. 나는 동족상잔은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 우리가 회합할 수 있는 적당한 시일과 장소를 여하한 방법으로든지 제시하여주기 바란다.”’- 독립신보 1948년 4월 30일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회담

 

▲ 1948년 5월 5일 제주공항에 도착한 딘 장군 일행.  최고수뇌회의 참석자 9명이 한 컷에 모두 들어있다. 왼쪽 두번째부터 딘 장군, 통역관, 유해진 도지사, 맨스필드 중령,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경비대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중령,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나는 제주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 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 경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씨나 미 군정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제주4·3의 의인(義人) 김익렬(金益烈)이 1969년 집필한 회고록 ‘4·3의 진실’에서 발췌.

‘이번 소요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육군중령은 약 1주일 동안에 걸쳐 수차 산록일대에 비행기로 삐라를 산포하여 “사건 계속은 이 이상 유해무익이므로 향토의 평화회복을 위하여 하루바삐 손을 잡자”는 뜻을 피력하고 그들의 민족적 양심에 호소한 바 있었으나 이에 대하여 산중으로부터 만족할 만한 회답이 없었으므로 이에 국방경비대 특별부대는 사건의 최후적 결말을 짓기 위하여 지난 27일 상오 10시경부터 드디어 행동을 개시하였다 하며 동 연대장은 다시 하(下) 요지 다음과 같은 전단을 비행기로 산록 일대에 산포하였다 하는데 사건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형제 제위여, 본관이 제위의 민족적 양심에 호소하고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수차에 긍한 권고문과 교섭은 (원문중략) 형제 제위의 지도자의 무성의에 의하여 수포에 귀하였다. 국방과 치안의 중책을 쌍견에 짊어진 국방경비대는 사건 발생 후 2순 이상을 은인자중하여 왔다. (원문중략) 본관은 전투를 개시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본관은 동족상잔은 어디까지든지 원치 않는다. (원문중략) 지금도 늦지 않다. 동족상잔을 원치 않거든 속히 귀순 투항하라. 연락원을 급속히 파견하라.”’(같은 기사 서울신문․자유신문 48. 5. 3 / 독립신보․동광신문․우리신문 48. 5. 4)-대동신문 1948년 5월 3일

김익렬 : 제9연대가 지금까지 전투를 개시하지 않았지만, 군대는 개인의 뜻과 관계없이 명령만 내리면 복종하고 전투를 개시한다.
김달삼 : 당신은 미군정하의 군대인데, 나와의 교섭결과에 대해 얼마나 약속이행의 권한이 있느냐?
김익렬 : 미 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왔으며 내가 가진 권한은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의 권한을 대표하며,  오늘 나의 결정은 군정장관의 결정이다.
김달삼 : 나도 제주도의 도민 의거자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

1948년 4월 28일 오후 구억국민학교에서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에서 나눈 대화내용이다. 김익렬은 4월 17일 미군정으로부터 진압작전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선 선무, 후 토벌’ 원칙을 세워놓았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단신으로 무장대 진영으로 들어가 김달삼과 4시간에 걸친 담판을 벌인 끝에 ‘4․·28 평화협상’을 이끌어내었다.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다음과 같은 합의를 보았다. 4·3 발발 25일 만의 극적인 합의였다.

①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또한 합의된 귀순절차는 회담 다음 날에 모슬포 연대본부와 제주읍 비행장에 각각 귀순자 수용소를 설치하고 점차적으로 서귀포·성산포 등지에도 수용소를 세우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제주도에는 잠시 평화의 시기가 도래하는 듯했다. 그러나 협상 사흘 만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이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세칭 ‘오라리 사건’이 벌어지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 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은 깨어졌고 이후 제주4·3은 걷잡을 수 없는 유혈충돌로 치닫게 되었다.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이 자행한 방화였다. 

오라리 사건은 5월 1일 밤 12시 괴청년 30여 명이 오라리 연미마을에 들어와 12채의 집에 불을 놓으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불이 난 시간에 마을 남쪽에 있는 민오름에서 유격대원 20명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마을로 급히 내려왔지만, 괴청년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유격대원들이 돌아간 뒤, 다시 경찰들이 총을 난사하며 마을로 들어왔다. 그리고 9연대 군인이 도착하자 경찰은 사라져버렸다.

당시 경찰은 방화의 주범을 유격대라 하였지만, 김익렬 연대장과 정보참모 이윤락은 이들을 무장대로 위장한 경찰이라고 하였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의 메이데이>란 영화를 만들어 제주 민중의 잔인함을 부각시키고, 경찰의 잔인한 토벌을 정당화시켰다.

미군정은 김익렬· 김달삼의 평화회담을 무시하고 강경 진압 방침으로 선회한 것이다. 결국 5월 5일 수뇌부 회의에서 김익렬은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과 충돌하기에 이른다. 결국 김익렬은 제9연대장에서 해임되어 여수 주둔 제14연대장으로 전출되었다. 후임에는 박진경(朴珍景)이 부임하여 강경 토벌 작전을 추진하다가 6월 18일 부하에게 피살된다.

두 사람의 ‘서로 총부리를 겨누지 않는다’는 합의는 ‘오라리 사건’으로 결국 깨지고 말았지만, 그는 계속 초토화 작전을 거부하다 미군정으로부터 해임되였다. 김익렬의 후임으로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진경이 임명되었다. 박진경은 일본군 출신답게 미군정의 총애를 받으며 무장대는 물론이고, 무고한 도민에 대해 잔인한 토벌을 자행했다.

한편 당시 오라동 주민들이 당한 피해는 오라리 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그 후 군경합동작전에 의해 정실마을, 연미마을 등이 불타서 없어졌다. 주민들은 야산으로 피신생활을 하거나 해변마을로 이주해야 했고, 이들은 그곳에서 도피자 가족이라고 희생되었다.

-‘김익렬 장군의 기념사업을 제안한다’

 

▲ 제주4.3 평화기념관.

“나는 진실화해위 상임위원 일을 하면서 군의 공식 역사와 다른 전쟁기 국군의 잔학상을 증언하는 수천명의 진술을 읽었으며, 제주4·3사건 당시 강경진압을 거부하다 9연대장에서 쫓겨난  김익렬 장군처럼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의로운 군경도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공회대  교수 김동춘의 한겨레신문 칼럼(2013년 4월 8일) ‘제주4·3사건, 인정이 먼저다’에서 발췌.

‘그의 숭고한 애국 애족정신을 기리는 김익렬 장군 기념사업을 전개함으로서 친일독재 권력에 이용당해 오욕으로 점철된 국군의 역사를 떨쳐버리고 광복군의 민족자주독립정신을 계승한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립하여 ‘민족’ ‘민주’의 정신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상징적 계기가 되게 하자. 국군 장병들이 그냥 무기를 가진 싸움꾼이 아니라 민족군대로서의 보람과 사명감을 가지고 즐겁고 명예롭게 복무하는 그런 군대가 되도록 하자.’ - 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의 ‘4.3 민중항쟁의 영웅 김익렬 장군의 기념사업을 제안한다’에서 발췌 

우리 국군은 파란만장한 현대사와 함께하며 이제 고희를 넘겼다. 우리군은 외형적인 물리적 군사력 측면에서는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왔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바람직하게 성장 발전하여 국민의식구조에 긍정적 영향을 미쳐왔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그런데 우리 국군 속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꿈꾸어온 인간존엄의 민주정신이 내재되어있는지? 자랑스러운 항일독립군과 광복군의 민족자주독립정신을 계승 발현하는 민족군대로서의 정통성과 정체성이 확립되어있는지? 장병들이 국민들로부터 진정으로 신뢰와 애정을 받으며 민족적 자부심의 높은 사명감을 견지하여 보람차고 즐겁게 복무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광복 후, 불의하게 정권을 걸머쥔 반민족친일무리들은 오직 자신들의 생존과 입신영달의 탐욕에만 눈이 어두워 독립 운동가와 민족의식 있는 분들을 제거 살육 하는데 국군을 이용했다. 제주4·3 당시 양민을 학살한 최경록(교통부장관·주일대사 역임), 송요찬(제2공화국 내각수반 역임), 함병선(국방연구원장 역임), 이들은 일제시대 일본군 지원병으로, 만주에서 광복군과 중국군들을 무자비하게 참살했던 군인들이다.

해방 후 이승만은 ‘물리력을 확보해야 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군정에 ‘광복군은 마적이나 마찬가지다. 정규훈련을 받지 않았다. 정규훈련을 받는 군과 경찰이 필요하다’며 일제당시 군과 경찰을 그대로 썼다. 그 이후 한국군은 얼마나 왜곡되었는가?

또한 국군을 동원하여 군사반란을 일으킴으로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은 자들은 누구인가? 군이 친일독재의 권력에 이용당해 저지른  역사적 과오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은 국군을 반민족 반민주적 집단인 것으로 착시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대부분 고급간부출신들의 의식과 행태는 거의가 그런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친일 매국노들이 미군정에 빌붙어 민족적 양심을 가진 인사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무법천지의 공포 속에서도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헌신 분투한 군인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제주4·3 현장에서의 김익렬 장군이다.

김익렬은 제주4·3 당시의 현지 연대장으로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서 민중봉기를 주도하고 있던 김달삼과 직접 만나 담판 하는 등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무차별 대량학살의 초토화작전만은 막아야한다는 일념으로 미군정과 경찰에 맞서 고군분투 처절히 주장했다. 치안 총책임자 조병옥과 맞다드려 그의 비인도적이고 반민족적인 작태를 향해 육탄을 던져 질타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익렬의 민족적 자부심에서 울러난 투철한 애민정신은 친일주류기득권 층으로부터 배척당해 갇혀지고 역사의 무관심 속에 묻혀갔다. 그래서 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는 “김익렬 장군의 동상을 건립하여 해방정국의 어려움과 냉전의 비참한 여건 하에서도 국군 속에 민족에 대한 뜨거운 자부심과 애정의 정신이 살아 흐르고 있었음을 널리 알리고 ‘김익렬 장군 상’을 제정하여 민족·민주 모범 군인출신을 발굴 선양하는 사업 그리고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로 개정하여 국군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사업 등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 김익렬의 회고록 ‘4·3의 진실’

 

▲ 김익렬 장군이 쓴 '4.3의 진실' 원본과 안경. ⓒ제주의소리DB

‘제35회 국무회의록(1952년 5월 2일)/ 일시 : 1952년 5월 2일/ 제출월일 : 5월 1일/ 제출부처 : 총무/ 건명 : 인사부의의 건/의결사항 : 인사부의의 건/ 1. 육군대령 김익렬(金益烈) 육군준장에 임함(임시계급)’

-국무회의록(1952년)  

‘조경 제9연대장 이동/ 5월 6일/ 조선경비대 제9연대 3대 연대장 소령 김익렬은 총사령부로 전속하고 후임 4대 연대장에 총사령부 인사처장 중령 박진경 보직하다’ -육군 역사일지 1집(1945.8.15.~1948.8.14.)

‘감사패/ 김익렬 장군 유족/  제주4.3사건 발발 초기 9연대장으로 재직 중 제주도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헌신적인 노력을 하셨고, 또한 4.3의 진상을 밝히는 유고록을 남기신 고(故) 김익렬 장군님의 고귀하신 뜻을 길이 새기며, 아울러 장군님의 유품을 제주4.3평화기념관에 기증해 주신 유족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이 패를 드립니다. 2008년 4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지사 김태환’

1969년 1월 국방대학원장을 끝으로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김익렬은 제주4·3에 대한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이 은폐 왜곡되는데 공분을 느껴 ‘4·3회고록’을 집필하였다. 그는 1988년 영면하였으며, 1989년 유족들이 그의 유고록을 공개했다.

그러나 도민을 살리기 위해 살신성인한 그의 공덕비는 제주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초토화작전을 감행한 박진경의 경우 그를 추도하는 비문이 충혼묘지 입구에 보란 듯 세워져 있다.

김익렬의 유족들은 제주4·3평화기념관에 유고록 원본과 유고록을 쓸 때 사용했던 만년필, 잉크, 안경, 그리고 망원경 등 유품 10점을 기증했고, 현재 평화기념관 ‘의인 코너’에 전시돼 있다.

김익렬은 ‘4․3의 진실’이란  유고록에서  “4·3의 기록들이 너무 왜곡되고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과 죄상이 은폐되는 데 공분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집필 사유를 밝혔다. 그리고, “이 원고가 가필되지 않은 그대로 세상에 일릴 수 있을 때 역사 앞에 밝히라”는 유언을 남겼다.

평화냐, 유혈사태냐는 갈림길에 서 있던 협상을 깨고 초토화 강경작전으로 내몬 미군정과 우리 군 수뇌부의 행적이 담긴 친필 원본이 결국 세상에 공개되어 4·3진상에 큰 버팀목이 되고 있다.  결국 김익렬의 글은 1992년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만일 그가 주도한 협상을 미군정과 군 수뇌부가 받아들였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앗아간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 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

평화재향군인회가 앞장서고 있는 김익렬의 동상 건립운동이야말로 4·3의 진실을 드러낸 참 군인의 행적을 넘어 역사의 진실이 결국은 세상에 밝혀진다는 교훈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제주4.3은 분명히 미군정 시기에 발발했고, 그 배경에는 미군정이 도민에 대한 무리한 탄압이 작용했다. 김익렬· 김달삼 평화협상을 깨는 계기가 되는 오라리 방화사건에 미군정이 개입했고 강경진압을 지시한 주체가 미군정이라는 증거들이 속속 제시되고 있다.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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