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후 칼럼] ‘행복을 추구하는 성장’으로 국가목표 재설정해야 할 시점

2013년을 보내면서 나는 과연 행복했는지 자문해본다. 올 하반기 들어 <응답하라 1994>라는 TV드라마와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응사>로 불리는 드라마는 1990년대에 20대를 보낸 40대에게 큰 인기다. 1990년대를 회상하며 “정말 그랬지, 그때 우리는 참 행복했다”는 환상에 빠져 현실의 고통과 불안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몰입도가 높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는 현재의 불안감을 쏟아내는 현대판 신문고가 되었다. 철도·의료 산업의 민영화 논란과 밀양 송전탑 건설 등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 심각한 학업·취업난, 빈부격차, 노동자의 고용불안, 언론자유 위축, 고령층의 빈곤, 주부들의 보육장애, 주거 난민 등 우리 사회에 널려 있는 문제들에 대해 국민들이 공감하며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국민들이 바라는 행복에 비해 불만·좌절과 불안감은 더 커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40대 중년 세대 중심으로 <응사>에서 느낀 행복하고 싶은 열망이 <안녕들 하십니까>에서 구체적인 주장으로 표현되면서 다양한 세대의 호응을 받으며 확산되는 양상이다.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지난 9월 UN이 발표한 ‘2013 세계행복보고서’에서 조사 대상 156개국가 중 41번째였다. 갤럽의 세계 여론조사와 유엔 인권지수 자료 등을 토대로 산출한 국가별 행복지수는 국가의 경제력과 비례하지 않는다. 덴마크가 1위, 미국은 17위, 독일 26위, 일본 43위 순이었다. 세계 15권안에 드는 우리나라의 경제력에 비해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낮았다. 성장 모델 대신, 정신적·물질적 요인이 균형을 이루는 행복 모델을 추구하고 있는 부탄은 국민의 주관적 행복 수준이 세계 1위다.

행복에 대한 정의는 ‘살고 있는 것 자체’에서부터 쾌락, 기쁨, ‘자연과의 합일’, ‘무한한 욕망의 충족’까지 범위가 한정이 없다. 그만큼 인간의 삶, 욕망과 생각은 넓고 다양하다는 의미다. 행복은 개인적·정신적·물질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난다. 솔론은 “인간에게 부의 한계는 없었다. 죽기 전에는 누구도 행복한 사람이라 말하지 마라”, 루소는 “과학과 예술의 발전이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데 보태준 것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많은 학자들은 경제성장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행복 경제학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미국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1974년 “국민 소득이 높아지면 행복 지수가 올라가지만 소득 증가분만큼 행복이 커지지는 않는다”는 논문을 발표하여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경제학과 행복의 관계에 대한 논란을 확산시킨 ‘이스털린 패러독스’는 지금도 유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절대적 부보다는 타인과 비교하는 상대적 부라는 점이다. 행복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즐거운 감정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나 관점·가치관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최근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과 불안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극심한 사다리 타기 경쟁과 법치적 강압통치에 대한 반발로부터 나온다. 인간성이 소진되고 경쟁의 기계로 전락한 사람들은 낙오되지 않으려 결사적으로 싸우면서 불만은 증폭된다. 정부는 경제 성장만이 국민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며, 국민들의 의견을 도외시하고 있다. 대선 공약 파기와 공안통치, 양극화 심화, 민주주의 후퇴 쪽으로 독주하는 독선·불통의 모습이 영력하다. <응사>나 <안녕들 하십니까>에 대한 울림이 큰 것은 정부의 비민주적 정책추진과 성장 만능 사회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불신·불안감이 나날이 커지고 있음을 반증한다.

‘국민행복시대’라는 정치언어는 행복이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닌 국가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국민행복을 위해서는 갈등·불안의 최소화와 신뢰회복이 급선무다. 우리 사회의 당면 과제인 경제민주화, 복지확충, 소통과 공감, 관용과 타협이 필요한 이유다. 영국 경제학자 스키델스키 부자는 그들의 저서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에서 행복에 필요한 기본재로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 일곱가지를 들고 있다. 사회적 부를 창출하지 않고서는 행복한 삶은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무한경쟁을 통해 소득만 늘리면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성장 지상주의는 거짓 우상 숭배와 다름없다. 성장의 ‘낙수효과’는 신기루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성장과 함께 소득격차가 확대되면서 모두가 불행해지고 있다. 이제부터 진영 논리를 떠나 성장 이데올로기를 행복한 삶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행복 코스프레 그만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성장’으로 국가목표를 재설정해야 할 시점이다. / 권영후 소통기획자

<제주의소리/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