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례에 저항하는 일은 스스로 위협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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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73) 강림의큰부인 여성1

끊임없는 인내와 포용, 그녀의 미덕

강림의큰부인 여성은 남편도, 심지어 남편과 관계를 맺은 첩들도 궨당(친척이라는 뜻의 제주어) 대하듯 대한다. 제사 때나 만나고 이름이나 겨우 아는 사이지만, 끊을 수 없는 인연이고 가족과 제도라는 막역하고 단단한 이름으로 묶였다는 생각으로 늘 염려하고 도와준다. 여신 강림의큰부인이 남편의 열여덟 첩질에도 앙탈을 부리지도 않고, 첩들과도 암투를 벌이지 않았듯, 강림의큰부인 여성 역시 인간사 그러려니, 갈등에 빠져 반목하는 일도, 진한 열정에 사로잡혀 과한 감정을 쓰는 일도 없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상대에 대해서 복수를 하거나 험담을 늘어놓지도 않을 것이다. 지적인 혹은 정치적인 토론도 거의 하지 않을 것이다. 주변에서 논쟁이 붙어도 그녀는 무색무취의 개성을 발휘할 것이다. 야심과 추진력이 부족하고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전술을 짜는 일도 그녀에게는 낯선 일이다. 그녀의 재능은 억울해도, 심지어 기뻐도, 늘 잘 참고 상황과 상대방에 휩쓸리지 않는데 있다.  

끊임없는 인내와 포용은 그녀의 미덕이다.
비슷한 포용성을 가지고 있지만 백주또 여신을 닮은 백주또 여성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범상치 않은 상대라면, 강림의큰부인은 그저 만만한 상대가 되기 십상이다. 상대가 잘못을 범할 경우 백주또는 잘못을 지적하면서 불편하게 만들고 심지어 관계를 깨버리지만, 강림의큰부인은 모르는 척, 못 본 척 그냥 덮어 준다. 강한 위엄을 보여주면서 쉬 접근할 수 없게 하는 백주또와는 달리, 잘 모르는 듯, 둔한 듯 잘 들어주고 넘어가주는 강림의큰부인 여성 주변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괴고, 자신의 사정을 하소연하는 일이 많다.

미덕이 악덕이 되어버리는 세상

그녀의 인내와 포용은 그녀를 당하기만 하는, 바보스럽고 답답한 여성으로 만들어버리기 십상이다.
강림의큰부인의 방은 조강지처의 방이다. 그녀의 방은 그녀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누구나 항상 머물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아무 잘못 없는데도 자신을 구박하는 시어머니가 시시때때 날라 들어오는 방이다. 한껏 자신을 무시했던 시누이들이 자기 남편의 방탕함을 까발리면서 열여덟 첩을 둔 오빠의 아내에게 동의를 구하는 방으로도 애용된다.

언제라도 무슨 일을 했어도, 편히 쉬면서 지낼 수 있도록 그녀의 방은 큰 부인의 이름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비인간적인 남편에게도, 심지어 남편의 첩들에게도, 이름만 겨우 아는 오촌 당숙에게도 열려 있어야 한다. 모두들 혹시 문전박대를 받을 까 염려하기도 했지만 웬걸 따뜻하기도 하고 반가운 표정도 설핏 스치니, 그들의 행동은 더욱 스스럼없다.

강림의큰부인 여성의 유일한 목적은 자리를 보전하는 일인 듯하고, 그러니 그녀는 자기감정이나 욕심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상대가 무례하다고 같이 무례를 범할 수도 없는 것이다.

혼자만의 말을 하는 일방적인 시어머니께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눈 한 번 주지 않는 남편에게 칭얼대지도, 닦달하지도 않는다. 본 적 없는 궨당이지만 찾아오면 따뜻한 밥을 건네고, 어이없는 말을 해도 눈을 내리깔고 조신하게 앉아 있다.

남편이 열여덟 첩과 놀아나는 동안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사사사삭 움직이며 제사 명절을 차린다. 남편의 정절을 요구하지도 않지만 자신은, 휘날리는 바람에 저고리 앞섶이라도 풀어질까, 꼭꼭 여민다.

끊임없는 인내와 포용이라는 그녀의 미덕은, 반복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힘을 가진 쪽에, 쭉, 가만히 있는 비겁한 것이 되어버리고 사회는 강림의큰부인의 미덕을 악덕으로 만들어버린다.

 

▲ 뷰티풀 선데이(2007. 진광교)/ ‘폭력’과 ‘순정’이 앞뒷면으로 결합된 지점에 이 영화의 최초의 사건, 강간죄가 놓여 있다. 짝사랑하던 여자를 강간한 것과 모르는 여자에게 성욕을 풀기 위해 강간한 것은 다르지 않느냐는 질문을 이 영화는 깔고 있다.(출처/씨네21. 황진미. 2007. 4.13.)

폭력과 순종, 동전의 양면

강림의 폭력과 강림의큰부인의 순종은 서로를 숨기며 공생한다.
그녀의 계산된 순종은 자신의 자리보전을 위한 구체적인 욕망과 체념의 결과물이며 그녀의 ‘어머니 치마폭과 같은’ 너그러움, 인내와 희생이라는 여성성은 남성지배를 더욱 확고히 하는 기제로 작동된다.

이렇게 강림의큰부인의 여성성에 의해 더욱 견고해진 남성지배의 사회가 그녀들에게 전하는 명령들은,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질서유지의 명령들보다 더 강하게 자기검열을 거친 계산된 순종을 하도록 강림의큰부인 여성들을 계속 준비시킨다. 분석해보려는 생각조차도 없이 무방비로 자신의 편에 서있는 그녀들이 있다는 것은 남성지배 사회의 막강한 비자금이 되어 준다.

 

▲ 목수정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마속가지 정치적인」/출처. 2008년 8월 15일 국민일보, 네이버블로그 kwonyang74

강림의큰부인 처녀

야심과 추진력이 부족한 그녀에게 경쟁적인 일터는 어울리지 않는다.
사무실에서의 강림의큰부인 처녀는 조용하면서 부지런하다. 사무실의 간단한 청소는 물론 커피도 잘 타오며 무리한 부탁도 잘 들어준다.

그녀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고정적인 역할을 무리 없이 잘 해낸다. 반면 창조적인 기획안을 당돌하게 제출하거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술을 짜는 일은 그녀에게는 낯선 일이다. 일의 과정과 결과를 놓고 분석하고 대안을 찾는 일도 잘 하지 못한다. 일이 잘되길, 자신도 좋아지길 빌면서 모른 척, 모자란 척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게 전술이라면 전술이다.

만약 어떤 문제가 터져 모두들 나 몰라라 도망 가버리더라도 강림의큰부인 여성은 혼자 사무실에 남아 뒷정리를 할 것이다. 난장판이 된 사무실을 치울 것이고, 이미 실패하여 여기저기 던져진 기획안들을 모아 정리해둘 것이다. 단 한 번도 주인처럼 대접받았던 적 없으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마치 주인처럼 사무실을 염려하고 사장님과 상사들을 맞이할 것이다.

이런 강림의큰부인 처녀는 자기의 주장이 강하지 않은 온순한 아내감을 찾는 남성에게, 여자는 다 창녀 아니면 성녀라는 생각을 가지는 남성들에게 매력적인 아내감으로 다가온다. 보통 이들 남성들은 강림의큰부인 처녀 같은 좋은 여성과 결혼하고선 그녀의 미덕을 바보 취급하며 심지어 악덕으로 만들어 버리는 주범이다.

강림의큰부인 아내

남성과 여성의 역할분배는 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져 오기도 한다.
이 편안한 인식들이 문제가 되고 비판받는 지점은 그 역할분배가 지배와 피지배의 구도를 확장시키고 유지시켜주는 방향으로 이법적으로 구체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강림의큰부인 아내는 순종적인 삶에 만족하면서 안락한 삶을 유지해가려는 소박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강림의큰부인 아내 역시 남성지배사회의 여성들이 부여받아왔던 것처럼, 관계에서 소외되고 기본이 되는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존재감을 부여받지 못해 왔다. 신화에서도 나타나듯 강림이 차사가 되는 것은 물론 강림이 똑똑해서였기도 했지만, 모든 것을 채비해 주고 지원해 주는 부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녀의 노동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녀들의 기분이 어떤지, 능력이 어느 만큼인 지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일이 주어지고, 성취된 결과에는 소외되어 있다.

가장 인간적이어야 할 가족에서부터 비인간적인 행태들은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게 제사다. 제사를 치루는 일에 그녀는, 정작 남편은 제사 날짜를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몸도 정갈히 해가면서 준비한다. 그렇지만 복잡한 제사를 일일이 준비했으면서도 제사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에서 그녀는 제외된다. 채소를 다듬고 전을 부치며 쉴 새 없이 서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부엌에서 종종거리며 있었는데도 빨리 숭늉 내오라 타박받기 일쑤다. 심지어 절 한 번 못하고 부엌 구석에서 눈치나 보고 있다. 

▲ 소설 「나는 제사가 싫다」(2000. 이하천. 이프)

청소를 하고 변기를 닦으며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강림의큰부인 어머니와 아내들의 몫이다. 아무도 그런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냥 그녀가 하고, 결국은 그녀만 하게 되고 어느덧 그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장면이 되어간다.

여성들이 집안에서 늘 하는 일상사들은 생산의 부분에서 제외된, 소비 차원에 머무는 것이었고 그 일상과 소비는 사실은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것임에도 어떠한 영향력도 갖지 못하는, 대단히 하찮은 것이 되어 왔다. 커다란 결정들은 여전히 남성의 몫이고 그녀에게는 모두들 하기 싫어하는 것, 또는 하찮은 것에 불과한 끊임없는 수고만이 요구된다.

거의 대부분의 강림의큰부인 여성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앞서 살아온 여성들이 대부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관례에 저항하는 일은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위협하는 일이고 결국 내 몸에 몹쓸 멍 자국만 남기는 것이라면, 애쓰지 말고 강림의큰부인처럼 체념하고 순종하며 살아버리는 것이 훨씬 나은 일임을, 보면서 들으면서 오래도록 체득해왔기 때문이다.

사회의 폭력적 질서에 저항하지 못한 것이 결국은 너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 때문 아니었냐 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그 거대한 폭력에 대한 나름의 대응이고 방어였다고 이해하여도 될 일이다. 그 여린 여심에게, 부당한 폭력에 수난을 당하지 않게, 확고한 의지를 불태우고 힘을 키우고 앞장 서 나가야 했었지 않냐고 힐난하기 이전에 그것이 어떻게, 왜 행사되었는지에 대하여 각성된 사회적 인식으로 같이 따져 물어야 한다는 것에 우선 방점을 찍을 일이기 때문이다. (계속) /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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