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도대체 누가 물을 흐리나, 이제 그들을 잠재우자

 나는 어리석게 오늘도 꿈을 꾼다. ‘우리의 의지’에 따라 지역사회가 완전히 정의롭게 될 수 있다는…. 그게 미래를 위해 내 안에 깃든 헛된 기대와 유혹을 이겨내는 저항의 척도다. 그래서 나의 물음은 언제나 도발적이다. “도대체 누가 있어 지역사회의 물을 흐려놓는가”

 물음이 많은 게 무지 탓만은 아니다. 모르면 물어야 하지만, ‘물음의 형식’을 취하는 건 세간의 통념을 깨기 위한 것…거기엔 변혁의 의미가 있다. 이쯤 되면, 참으로 주제넘다.

 개인의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 지역사회도 다를 게 없다. 지역사회의 성격이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반드시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건강한가” 그 대답에 따라 우리가 나아갈 길은 달라진다. 한사코 건강하다고 우긴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만일 그것이 건강하지 못하다면, 건강한 지역사회를 위해, 다가오는 사회의 성격을 어떻게 기획하고 형성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물음에 모두가 치열해야 한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도 그 답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의로운 사회’는 저절로 그냥 오지 않는다는 것…그건 ‘우리의 의지’의 산물이다. 그것은 우리의 기획과 노력에 따라 내일을 주름잡아 늘릴 수 있고 줄일 수 있다. 그것은 이미 현재 속에 들어와 있다.  우리의 내일은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현재’를 근거로 창조적으로 규정될 시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존하는 지역사회는 이렇듯 ‘우리의 의지’에 따라 창조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에 의해 입체적으로 형태를 부여하고, 가치를 확인하는 유기적 과정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자명하다. ‘정의로운 지역사회’를 위해 ‘제주의 현재’를 제대로 기획하고, 잘 꾸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를 제대로 살아야 한다.

  # 막막하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다
    ‘말의 흐름’이 원활하면, 올바른 의지가 형성되고
    정의로운 지역사회가 형성될 거라고


 그러나 대체로 난감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현재를 제대로 사는 것’인지, 나는 그 답을 내놓지 못한다. 도대체 무엇을 상대로 그렇게 열을 올리는가 다그치면, 막막하기 이를 데 없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에겐 모든 분들이 만족할만한 답을 내놓을 능력이 없다. 그렇다고 하여 어디 아득히 한숨만 쉴 일인가. 나에겐 믿는 구석이 있다. ‘말의 흐름’이 원활하면, 깨끗한 물이 다 그렇듯, 모든 찌꺼기를 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말의 흐름’이 원활하고, 그렇게 활발하게 논의하다가 보면, 우리의 올바른 의지가 형성되고, 그 의지에 따라 결국 정의로운 지역사회가 형성될 것이라고.

 다시 나는 ‘말’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말은 항상 위태롭다. 쉽게 미끄러지기도 한다. 아차하면, ‘사람을 잃고’, 심지어 ‘그 말까지 잃는다’. 공자 말씀이다. ‘링가 포비아’ 그래서 더러는 아예 말을 기피한다. 나도 원칙적으로는 그 쪽으로 기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히려 오늘도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에 방점을 찍는다.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사람과 만나는 일이다. 그뿐 아니다. 비판적 변혁을 위해 말의 통로가 확보되지 않으면, 적절한 이해와 생산적 논의가 어렵고, 그러다 보면, 결국 올바른 의지의 형성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말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한 사회엔 미래가 없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말은 ‘비판적 언어’다. 그것이 이 글의 본색이다. ‘비판적 언어’는 ‘아님의 요소’를 찾아내는 말이다. 지역적 시대적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그것에 대한 답이다. 그래서 ‘아님’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비틀어 보면, 그건 오류에 대한 개방성이다. ‘아님의 요소’에서 가치를 설정하는 구성력에 의미를 두는 것, 그것이 내가 믿는 구석이다.

 어쩌면 특정 사안에 토를 다는 행위는 쉬운 일인지 모른다. 말로는 천하를 들었다 놓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걸음도 떼놓기가 험난하다. 요즘 그런 세상이다. 그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걸 이야기하자는 게 아니다. ‘비판적 언어’가 능멸당하고, 그것이 왜곡되는 바로 그곳에 정치적 음모와 ‘패거리’가 활개 칠 공간이 마련된다는 것, 그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지역사회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내밀한 영역의 힘보다는, 공공영역이 광범위하게 성립되고, 그 힘이 강화돼야 한다. 그곳이 바로 사적인 이익과 공적인 이익이 일관된 안목으로 볼 수 있는 명증화된 공간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힘이다. ‘비판적 언어’가 그것을 담보한다. 주제넘은 소리 같지만, 우리고장은 그런 면에서는 아직도 ‘수준이하’이다.


 # 너와 나를 가르고, 공익을 침범하며
   ‘말의 흐름’ 차단하고, ‘우리 의지’ 왜곡시키는 협잡 패거리
   이제 '비판적 언어'로 그들의 무례함을 잠재워야 할 때
  
  

 이제 “도대체 누가 있어 지역사회의 물을 흐려놓는가” 서두의 물음에 답해야 한다. 한마디로 지방권력에 기생하여 ‘끼리끼리 작당하는 패거리’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바로 지역사회의 물을 흐려놓는 장본인이다. 같은 범주 안에 들어오는 사람에겐 한 수 접어주고, 다른 범주 안의 사람들은 이유 없이 따돌리는…그것이 바로 ‘너와 나를 가르는 또 하나의 경계’로 작용한다. 그래서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킨다. 그 연줄은 지역사회의 공공영역을 내밀한 사적 영역으로 대체하려는 구조적 관성을 갖는다. 어디 인사뿐인가. 급기야 제도까지 주름잡고자 한다. 선거철만 되면 더욱 기승을 부린다. 끼리끼리 모이고 작당하고…경쟁자를 헛잡기에 혈안이고…그리하여 ‘말의 흐름’을 차단하고, 그래서 ‘우리의 의지’마저 왜곡하려 든다. 정말이지, 그건 음험하다. 협잡의 탯줄이다. 우리 지역사회의 병폐가 바로 그곳에서 비롯된다.

 이제 그걸 깨뜨려야 한다. 공공영역에 대한 공연한 불신과, 그런 명증화된 공간을 끼리끼리 내밀한 영역으로 대체하려는, 그 구조적 관성을 허물어야 한다. 거칠게 이야기해서, 혁명에 준하는 혁신적 탈주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판적 언어’가 건강해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흘러야 한다. 그리하여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하는 그 무례한 언동에 대응해야 한다. 자기변명에 쇳소리를 내고, 그것이 먹혀들지 않자, 더욱 폐쇄적이고 적대적으로 변해가는, 그 편협한 ‘패거리 의식’과 오만의 행태를 잠재워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정의로운 지역사회’는 추상적으로 존재하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에 따른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다. 의지가 확고하면, 이룰 수 없는 게 없다. 역시 “눈이 있어 보려는 의지가 있는 게 아니라 ‘보려는 의지’가 있어 눈을 만들었다”는 말은 멋진 말이다.

 우리의 올바른 의지를 위해선 ‘비판적 언어’가 자유롭게 흘러야 한다. 그런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 사회 분위기도 그래야겠지만, ‘비판적 언어’의 담지자인 지방언론부터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남루한 일인가. 역시 세밑 이야기로는 너무나 초라하다.  / 강정홍 (언론인)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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