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제주판 3김’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미지일 뿐이다

 햇볕 따스한 어느 날 오후/ 세 아이가 공터 한복판에서 모래놀이를 한다./ 모래로 집을 지었다 허물면서 시간가는 줄 모른다./ 해가 서쪽으로 기운다./ 한 아이가 다른 두 아이의 눈치를 보면서 “그만 놀고 집에 가자”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두 아이는 들은 체 만 체다./ 멀리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한 아이가 또 다시 그만 놀자고 말한다./ “들어가려면 너만 들어가”/ 결국 한 아이는 아쉬운 듯 흘끔 흘끔 뒤돌아보면서 집으로 간다./ 그래도 두 아이는 서로 경쟁하면서 모래놀이에 정신이 없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설정이 좀 장황하다. 어디서 본 듯한 내용을 내 무딘 붓으로 각색했다. 거기엔 이런 말이 있다. “영생이란 인간 중심의 아집일 뿐이다. 해가 지는 데도 놀이에 빠져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아이처럼…”.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렇다고 하여, 여기서 시덥지 않게 ‘철학적인 말’이나 주절대자는 게 아니다. 글귀가 빠른 분들은 벌써 알아챘을 터, 이른바 ‘제주판 3김씨’를 빗댄 말이다. 이쯤에서 혹 “지나치다”고 말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외람되게도 우리 고장의 이름 있는 지도자를 ‘어린 아이’에 빗댔으니… 정말 송구스럽다. 그러나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는 우리 고장의 ‘김태환’ ‘신구범’ ‘우근민’(가나다 순) 세 분을 왜 이른바 ‘제주판 3김씨’로 부르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른다. 성씨도 제각각인 데…. 치열하게 서로 경쟁한다는 점에선 혹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른바 ‘제주판 3김씨’로 뭉뚱그려져도 좋을 만큼, 세 분 사이엔 정녕 차이가 없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세 분’에 대한 환상을 심고, 그리하여 지역주민들의 편견을 낳게 하는 이유가 아닌가. 그 물음에 답하는 게 제주 지방정치의 본질을 밝히는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 머릿속에서 세 분은 항상 ‘트리오’로 작용한다. 그 세 분을 따로 떼어내 평가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그래서 한 분을 바로 보기위해서는 다른 두 분을 제대로 보아야 하고, 다른 두 분을 바로 보기위해서는 또 다른 한 분을 제대로 봐야 한다. 이렇듯 우리의 머릿속에서 그 세 분은 오랜 기간 그렇게 뒤엉켜져 있다.

 세 분을 한사코 부정하고픈 사람들의 머릿속도 그와 다르지 않다. 세 분의 끝없는 경쟁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세 분의 이야기만 나오면, ‘밥알을 튀기’지만,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그들 정신세계 역시 이른바 ‘제주판 3김씨’의 이미지 속에서 해매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세 분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눈엔 이처럼 이미 ‘콩깍지가 끼어’있는지 모른다. 그 세 분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행태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 역시 각기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그들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그 세 분을 그 이미지에 맞게끔 꿰맞춰온데 지나지 않는다. 고통스럽지만 그걸 인정해야 한다.
 
            
  # 한 사람씩 보면 개인문제, 함께 하면 현재 ‘제주의 문제’
    이미지로 환상을 심고, 그것으로 편견을 부르고 있다
    이제 별반 의미 없는 그 ‘이름표’를 떼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가능한 정치구조를 넘어서야 한다

 
 정치란 감정과 이미지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성으로써, 그리고 논리로써 그것을 깨는 게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정치란 어디까지나 ‘당위’요 ‘명분’이기 때문이다. 이제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서로 경쟁하느라 동원되는 그 낯 뜨거운 미사여구에 끌리지 말고, 과감하게 이른바 ‘제주판 3김씨’란 이름표를 떼어내야 한다. 제주의 미래를 위해, 정말이지, 이른바 ‘제주판 3김씨’란 이름표는 별반 의미가 없다.

 그 이름표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눈에 콩깍지가 끼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결코 그들의 진실의 옷자락을 만질 수 없다. 아무리 우리의 인식이 주관에 의해 왜곡된 이미지들의 집적이라 하다라도, 아무리 평면적 논리로는 그 진실을 담아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막말로, 약초와 독초는 구별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집에 돌아간’ 한 분은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도 숨 막히게 경쟁을 펴고 있는 두 분을 각기 우리의 논의의 전면에 세워, 그리하여 하나하나 따져봐야 한다. 그것이 앞으로의 우리의 과제다. 좀 난감하겠지만.

 세 분의 퇴진을 주장하는 말들이 더러 있다. 아예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오기까지 한다. 지방선거에 출마할 뜻을 가진 분들도,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정치적 소신을 밝히기 보다는, 세 분의 퇴진을 주장하는 데 열을 쏟는다. 역사의 논리 중 가장 명백한 사실이 ‘물러갈 때 물러나지 않는 사람들을 응징하는 것’이라지만,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기 보다는, 이른바 ‘제주판 3김씨’를 공격하여 그 반사적 이익을 노리자는 건, 한마디로 치사한 전술이다.

 나는 세 분의 퇴진을 인위적으로 선언하거나, 그것을 주장하는 데, 얼른 동의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하여 ‘세대교체론’에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도자의 신뢰를 깨뜨리고, 지방자치를 망쳐놓고, 지역사회를 분열시키는, 그 정치구도를 깨기 위해서는 세대교체가 최선의 방법임에 틀림이 없다. 이른바 ‘제주판 3김씨’에 의한 우리 고장의 ‘정치지체 현상’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그것의 회피일 뿐이다. 물론 세상을 살다가 보면,  문제의 해결보다는, 문제의 회피가 더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른바 ‘제주판 3김씨’를 가능케 했던 그 정치구도를 깨지 않고서는 설령 세대교체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새로운 정치구도의 형성을 보장할 수가 없다. 그것이 절실하다고 하여 과정을 무시하고, 한꺼번에 뛰어 넘을 순 없다.

자연스럽지 못한 인위적인 청산은 결국 또 다른 부작용을 낳는다. 앞에서 이른바 ‘제주판 3김씨’에 의한 ‘우리고장의 정치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자’고 주장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지방선거까지’ 그 대결구도에 인내할 필요가 있다. 결코 박수는 보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 지도자의 덕목은 정치적 테크닉이 아니라 ‘인격’이다.
   지역정서를 고려치 않은 정치적 욕심은 위험하고 파괴적.
   제발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에서 벗어났으면.


 그렇다고 하여 이른바 ‘제주판 3김씨’의 행태를, 그저, 그렇게, 그대로 용인하자는 건 결코 아니다. 지역정서를 고려치 않는 개인의 정치적 욕심은 그만큼 위험하고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은 자신의 욕망과 그 실현을 둘러싼 쳇바퀴의 메커니즘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정치적 욕망이 지역정서에 합치되지 않으면, 그 충족을 위한 행태는 곧 소모와 피로, 그리고 사회적 해악과 갈등으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보고 있다.

 욕심은 독선을 부른다. 혹자는 이야기 한다. “세 분이 22년을 시작했으니 그 분들이 그것을 마무리하게 하자”고…. 이겐 웬 독선인가. 그것은 일견 ‘책임과 헌신’의 자세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어찌 과거가 그들만이 시작이었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것을 그들만이 마무리해야 하는가. 공자의 말씀처럼 “타인과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린다”면, 그 말씀이 오늘에도 진정 살아 있다면, 차마 그런 말은 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자고 하여 그렇게 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아무리 말 자체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 말이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지역적 시대적 상황에 부합해야 한다.

 지방정치는 어쩔 수 없이 ‘실용’이다. 그러나 한 지역사회의 지도자의 덕목은 정치적 테크닉이 아니라, 인격이다. 정치적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권모와 술수, 그리고 임기응변과, 추종세력이 많아 사회적 동원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지역주민들을 인격적으로 감화시키고, 그들에게 모범이 되지 않으면, 누구도 그를 따르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그 지역공동체는 결국 무너지고 만다.

 

▲ 강정홍 언론인

 피선거권에 흠결이 없는 한, 그들의 출마는 그들의 자유이다. 그 두 분 뿐만 아니라, 지금 출마를 준비 중인 모든 분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나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만큼은 버렸으면 한다. 서두의 ‘세 아이의 비유’도 결국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제발 마음을 좀 비웠으면…. 일체의 아집과 공격성을 괄호 칠 줄 알아야 마음을 비울 수 있다. 거기가 전부이다. 마음의 빈자리가 넓으면 넓을수록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지역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마음까지 열린다. 어디 꼭 지사가 돼야 지역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다시 믿는다. 편견에 좌우되는 경우가 더러 있긴 하지만, 지역주민 모두가 ‘이번만큼’은, 이른바 ‘제주판 3김씨’에 대한 환상과 편견에 좌우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올바른 심판을 내리리라는 것을…. 그만큼 우리 모두 치열해야 한다. 지금 나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떠벌리고 있지 않은가. / 강정홍 언론인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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