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섬의 숨, 쉼] 새해단상

지난해 말 난 두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만났다.
가난을 상속받은 예쁜 여자와 재벌 후계자이지만 서자인 잘 생긴 남자의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 ‘상속자들’. 이 드라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사랑을 이루기 위한 이들의 정면 돌파 상황과 에필로그 내레이션에 나온다.
피 끓는 청춘들은 반복해서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진이라고.
이 말의 울림은 생각보다 강해 멀고 먼 성에 모셔둔 아줌마의 감성을 잠깐 가져오게 할 정도다.

두 번째 만난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인문학 베스트셀러 칸에 꽂혀있는 책에서 봤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인생의 멘토로 삼고자 한다는 박웅현 씨의 최신 베스트셀러 여덟 단어 1장 자존 편에서.

그러니 내가 가진 장점을 보고 인정해줘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부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죠. 단점을 인정하되 그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못났다고 외로워하지 마세요... 모든 인간은 다 못났고 완벽하게 불완전하니까. <박웅현 여덟 단어 북하우스 29쪽.>

박웅현씨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직진을 외치는 젊은이들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같은 분위기, 느낌은 아니다. 긍정의 나가 부정의 나를 끌어안으면서 스스로 사랑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문제를 단순화해서 원칙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렵고 복잡할 때는 원칙과 상식으로 정면 돌파하자는 것이다.

언젠가 너무나 많은 일들에 치여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우리 집 기달왕자님이 말했다.
“ 엄마, 그럴 땐 하나씩 하나씩 풀어나가.”
“ 너 그거 어떵 알안?”
“ 응 살당 보낭 알안”
질풍노도를 걸어가는 10대 청소년이 반백년 삶을 산 엄마에게 하는 조언이다.
‘너나 잘해’라는 말이 당장 튀어나오려 했지만 꾹 참고 도인처럼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얼마 안지나 여덟 단어를 읽었는데 딱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 이 작품을 그리면서 피카소가 했던 일은 아이디어를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것이었습니다. 빼고 또 빼서 본질만 남기는 것이었죠 (같은 책 64쪽)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풀어야 할 때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야 한다는 기달왕자님의 일갈이 제법 의미 있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많은 지혜를 모아 문제를 단순화시켜 본질에 이르렀을 때 그 후의 길잡이는 무엇일까?
사람들에 따라 그 해결책을 찾아가는 방법들은 다양할 것이다.
나는 어느 사이 훌쩍 지나가버린 한 해를 뒤로하고 새해를 맞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진>을 길잡이로 삼고자 한다.

열혈 청춘 냄새 물씬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진>을 한다니 우스운가.
우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청춘과 중년을 연결해준다.
젊은 시절에는 걸릴게 별로 없기에 문제의 단순화 작업이 중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다. 다만 이들에게 걸림돌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빛나는 청춘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딛고 문제를 정면 돌파한다.
중장년기에 들어서면 청춘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지만 문제의 단순화가 쉽지 않다. 많은 혈연관계와 사회적 네트워킹에 얽혀 수없이 많은 타협과 양보를 경험한 터라 문제의 단순화를 위한 가지치기가 쉽지 않다.

그러하기에 난 이쯤에서 과감히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올해 나의 길잡이 카드로 뽑았다.
위로 어른을 모시고 아래로 자식의 성장기를 책임져야 하는 나이에 이르니, 하루에도 몇 번씩 판단하고 결정할 일이 생겼다. 그때마다 나름 현명한 판단을 내리려 노력하지만 뒤돌아보면 완벽하게 불완전한 인간인 나는 수시로 실수하고 오판하고 후회했다.

그런데 연말에 친구가 권해준 책 한 권이 내게 등불이 되어주었다.
인의와 실리를 좇아 천하를 밟은 중국 상인사라는 부제가 붙은 상인이야기(이화승 지음. 행성:B잎새). 인의와 실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던 중국 상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의로움이 곧 이로움’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귀가 번쩍 뜨이지 않은가
의로움이 이로움이라니. 돌고 돌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파랑새를 찾은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마음이다.
젊은 시절 가슴에 새겼던 원칙들이 오랜 세월에 밀려 형체마저 희미해지려 하는... 멀고 먼 길을 돌아 다시 중년의 삶에서 그 원칙을 꺼내다니.

그러니 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진>카드를 들고 의로움이 이로움이 되는 길을 향해 가고자 한다.
워낙 부족함이 많지만 이땐 박웅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드를 꺼낸다.
재주 없고 둔한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의 나를 끌어안으며 뚜벅뚜벅 그 길을 가고 싶다.  내가 끝까지 그 길을 잘 갈 것이라고는 큰 소리 치지 못하겠다. 가다가 넘어지고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 해의 시작을 여는 지금 나는 굳게 결심 한다
내 능력 닿는 한 그 길을 가보리라고.

의상대사의 법성게 말미에 이런 진리가 나온다.
‘우보익생 만허공(雨寶益生 滿虛空), 중생수기 득이익(衆生隨器 得利益)’
우리의 삶을 이롭게 하는 보배 비가 허공 가득 내리는데 중생들은 자기가 가져온 그릇만큼만 그 보배를 가져간다는 뜻이다.
참 냉정하고도 바른 진리다.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들고 의로움이 이로움이 되는 길을 가고자 할 때 이러한 진리는 둔한 나를 채찍질하며 어서 가라 한다.  그러면 부족함이 많은 나는 어린이들이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고 좋아 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나를 달랠 것이다.
“ 야! 좀 잘해봐. 잘하면 보배를 더 가져갈 수 있네.”
그러면서 미욱한 나를 자꾸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진> 하게 하겠다.

혹시 부족한 글을 읽고 동감하셨다면 난 감히 함께 가기를 권한다.

아름다운 젊은이들이여, 두려워 말고 삶을 건너가라.
쉼 없이 걷고 또 걸어야 변하고 움직인다. 두려움에 멈칫 거리면 늘 제자리다.

 

▲ 바람섬(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제주의소리

아름다운 젊음을 넘긴 많은 사람들이여, 잊고 지냈던 가슴속의 파랑새를 꺼내보자
오랜 세월을 버틴 단단함으로 현명하게 선택과 집중을 해나간다면 항상 갈구하던 행복과 평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s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올해는 좀 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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