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통일된 것은 1990년 10월이지만 실제로 동서독의 통일은 그보다 석 달 앞선 7월 1일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동 서독 양국 간의 통화, 경제 및 사회 통합 협정이 그 날 발효되었기 때문이다.
그 협정의 핵심에는 서독에 비해 크게 가치가 떨어지는 동독 마르크를 서독 마르크와 일대일로 교환하고 앞으로는 양국이 하나의 마르크를 법정 통화로 사용하기로 한 '화폐의 통일'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양국 간의 경제적 및 사회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부의 이전이 서독에서 동독으로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독일에게 통일 비용의 짐을 벗고도 남을 도약의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 유로화의 탄생이었다.
변동환율제의 장점은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무역불균형이 시정되는 것이다. 무역수지 흑자국의 통화는 강세가 되어 수출경쟁력이 둔화되는 반면 무역수지 적자국의 통화는 시장에서 저평가됨으로써 그 나라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이 되살아난다. 유로화의 경우, 상대적으로 취약한 몇몇 회원국들의 존재가 유로화의 가치를 끌어내리기 때문에 독일은 무역수지 흑자국이면서도 환율절상을 피할 수 있다.
적당히 약세를 지켜주는 유로화 덕분에 독일은 미국, 중국 등 역외에 대한 수출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역내의 다른 뒤떨어진 나라들에 대해서도 수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지난해 역내 수입은 2.6% 증가에 그친 반면 역내 수출은 5.4% 증가했다. 유로 존 18개국은 화폐만 통합했을 뿐 독일 통일의 경우와 같이 경제 및 사회의 통합을 이룬 것은 아니다. 따라서 독일은 역내 다른 나라들과의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을 해소해야 할 부담은 물론 화폐 통합으로 인한 경제적 이득을 다른 나라들과 공유해야 할 부담을 지지 않는다.
화폐의 통합에 그친 유로 존
지난 12월 11일에는 유럽연합 28개국이 의미 있는 하나의 합의에 서명하였다. 유럽 재정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던 유럽 부실은행들의 정리 방안에 대한 합의다. 부실은행의 구제 비용을 부담할 순서를 정해 2015년부터 시행하기로 한 것이다. 제일 먼저 채권자가 은행 총부채의 8%까지 손실을 감수한다("베일 인"). 채권자 사이에서는 주식, 채권, 비보호예금 보유자가 차례로 부담한다. 그것으로 부족할 때에는 해당 국가의 정부가 부채의 5% 범위 내에서 지원한다("베일 아웃").
그렇게 하고도 부족할 때는 레졸루션 펀드(resolution fund)에서 인출해 지원한다. 레졸루션 펀드는 유럽 역내 128개 은행이 700억 유로(보호대상 예금 총액의 1% 상당)를 목표로 향후 10년간 모금한다. 독일이 줄곧 주장해 오던 수익자 부담원칙이 반영된 것으로서 일견 공평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로 인해 독일은 화폐통합의 종주국으로서의 부담을 은연중 덜고 있다.
베일 인(Bail-in, 내부로부터의 구제) 없는 베일 아웃(Bail-out, 외부로부터의 구제)은 결국 그 나라 국민의 세금 부담으로 귀착될 것인 바 이번의 베일 인 절차의 확립으로 인해 독일은 앞으로 다가올 유럽의 경제 및 사회의 통합 단계에서 자국에게 귀착될 부담의 크기를 미연에 축소시킨 것이다.
유로화가 출범하던 1999년 1월에 1.17달러였던 유로의 환율은 현재 1.36달러에 이르러 만 15년에 걸쳐 16% 절상되었다. 그나마 최근에 유로화가 강해진 것은 미국 연준이 채권매입을 통한 통화증발을 시작한 2012년 9월 이후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1.21달러에 머물러 있던 유로화가 최근 1년 남짓 사이에 12%나 절상된 것이다. 거기에는 유럽중앙은행이 아직 채권매입이라는 칼을 꺼내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만일 미국이 채권매입 규모를 착실히 줄여나가기로 한다면 유로화 환율은 강세를 멈출 것이다.
베일 인(Bail-in)의 의미
그러나 만일 미국 연준의 새 의장 옐렌이 채권매입 축소를 주저할 경우는 유럽중앙은행도 유럽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채권매입을 단행할 가능성이 있다. 어떠한 경우도 유로화의 환율은 독일 수출을 위한 든든한 방파제가 되어주는 것이다.
보수성향의 기민당과 중도좌파의 사민당이 연정 구성을 하며 내놓은 기본 합의서 내용을 보면 최저임금 인상 등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좌와 우 사이에 통 큰 타협과 양보를 하면서 대외적으로는 강한 유럽, 견고한 유로 존을 지향하는 데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무엇이 나라를 위한 것인가를 생각하는 독일 정치의 일면을 본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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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내일신문> 1월 8일자 '김국주의 글로벌경제' 에 실린 내용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제주의소리>에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