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범 칼럼> 언론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한다

작년 연말 겨울에 접어들면서 시작된 이른바 ‘안녕 대자보’는 새로운 사회적 신드롬이었다 “안녕들 하십니까”를 화두로 수많은 대자보들이 전국 대학가의 구내 벽보난들만이 아니라 캠퍼스 외곽 담장들까지 온통 새하얀 벽지로 도배하듯 줄을 이었다. 이상기온 때문인지 눈마저 변변치 내리지 않는 올 겨울이지만 유난히 추워 보였던 것이 일부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안녕’ 대자보 신드롬

이 ‘안녕‘대자보들이 우리들 마음에 더욱 가까이 와 닿았던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이웃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글들이며, 이념적이고 개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생존권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이다. 대자보들마다 ‘승자 독식’의 논리에 의해 국가와 사회의 언저리로 밀려나간 억울한 ‘을’들을 걱정하는 가슴이 에이면서도 다른 한편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구절들이 절절이 넘쳐났다.

소위 ‘잘 나가는’ 명문대 학생들이 해고 노동자들을 걱정하고, 교수들이 경제난과 취업난에 학생들의 미래를 안타까워하며, 힘든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가난하게 살았던 한 대학교 청소부 아줌마들이 자신들의 파업으로 강의실을 청소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우리나라가 아직도 남을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던 사회였던가. 아직도 신자유주의에 동화하지 못한 마음 따뜻한 ‘미개인’들이 이렇게 많이 생존하고 있었던가. 마치 멸종된 줄 알았던 희귀 철새들을 대학가의 담벼락에서 다시 발견한 느낌이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미개인’

‘안녕’ 대자보는 현재 우리가 좋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글이다. 난해하고 과격한 표현이 아니라 “하수상한 시절에 별 일없이 안녕 하시냐”는 질문 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정치적이 아니라 현실적인 관점에 서서 무언가 사회가 잘못돼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고민들이 실려 있었다.

그동안 권력과 재계, 그리고 학계와 언론 등 이른바 ‘여론 지도층‘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마치 우리를 지상낙원으로 데려다줄 것처럼 찬미해 왔다. 그리고 어느덧 우리 모두는 그들의 일사불란한 선전나팔 소리에 이성과 인간성이 마비된 채 ’약육강식‘의 살벌한 밀림에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서로를 희생양으로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렸다. 공동체 사회의 동반자였던 이웃은 어느덧 경쟁주의 풍토 속에 타도돼야 할 적이 되고 한민족의 자랑이었던 미덕은 위기에 처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명암과, 민초들의 고통스런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애를 써본 적은 있는지? ‘안녕’ 대자보의 수많은 필자들은 그것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민초들은 살벌한 생존경쟁의 전쟁터에서 한시라도 맘 편한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우리사회의 리더들은 경쟁의 비정함을 겪어나 봤는지 의심스럽다. 입으로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고 떠들면서도 자기 자식만큼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병역을 기피한 이른바 ‘신의 자식’으로 만들었던 일부 인사들처럼, 자신들도 신자유주의의 전쟁터에서 비껴나 저 푸른 초원에서 골프나 치러 다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어느 지도층 인사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다. 정작 맡은 바 제 일을 묵묵히 충실하게 하고 있는 것은 민초들이 아닌가?

꽁꽁 막힌 언로

‘안녕’ 대자보는 언로(言路)의 문제를 제기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상호간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다. 동일한 사안을 가지고도 계층이나 연령에 따라 해석이 정반대다. 정부의 경영 효율화를 위한 철도 구조개혁은 국민들에게 민영화로 받아들여지고, 4대강 살리기 공사는 4대강 죽이기로 해석된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현상이 정부의 모든 정책들을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일부 국민들의 악의에서 나온 것으로만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상식‘과 ’비상식‘, 정상과 ’비정상‘이 혼재한 속에서 구별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정치적, 사회적 사안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마저도 ’종북‘이라는 빨간 딱지를 붙여버리는 비상식적인 풍토로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상호간 진정한 토론이 실종되고 불신의 벽은 높아만 간다.

우리 사회의 언로가 막혀 버린 것이다. 위정자의 진의가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국민들의 의사가 위정자에게 올바로 전달되지 않는다. 대의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중요한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약자의 소리를 외면하는 언론

이번 대자보 사태는 우리 사회의 언론의 책임을 엄중히 묻고 있다. 언론이 제대로 맡은 바 역할을 다 했던들 학생들이 굳이 힘들게 대자보까지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대자보의 주요 화두였던 공기업의 민영화와 해고 노동자 문제 등은 진작 언론에서 진지하고 신중한 역지사지의 태도로 이해당사자의 의견들을 공정하게 다뤄야 했었다. 지상파 방송들과 일부 주요 신문들은 ‘안녕’ 대자보 사태조차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언론들은 취임 후 처음으로 가진 대통령 기자회견마저도 ‘대통령 지시사항 받아쓰기 연습시간’으로 만들어버렸다. 기자들이라면 모처럼의 그 천금 같은 시간에 국정의 중요한 현안문제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질문을 하는 게 당연했고, 또 그것이 국민들이 언론에 기대하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랑을 듬뿍 받는 ‘국민들보다 훨씬 팔자 좋은’ 한 청와대 애완견에 대한 그들만의 훈훈한 얘기 속에서 ‘안녕 대자보‘ 행렬도, 복지 문제도, 해고 노동자들의 아우성도 묻혀 버렸다. 

제 역할을 저버린 언론의 모습은 우리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어느 지상파 방송은 아예 억울한 민초들의 하소연에는 아예 귀를 막아버렸다. 가해자인 ‘갑’의 입장은 온갖 정성을 다해 보도하더라도, 피해자인 ‘을’의 억울함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신들의 직장에서는 ‘을’의 입장에 있을 기자들이 피고용자들의 억울한 애로를 모를까. 민주시대에 주민들과 ‘을‘들에게 군림하는 몇 안 되는 ‘갑’들이 내주는 보도 자료만 받아쓰고 음으로든 양으로든 ‘갑’의 입장만 거들어주는 언론이 진정한 언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이 행복도시 제주에서 억울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을’들도 어쩔 수 없이 안녕 대자보를 써야 하는 이유다.

▲ 김헌범 제주한라대학교 간호학과 조교수.

대의민주주의는 제대로 기능을 하는 언론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론의 감시 기능을 민주주의 제도의 ‘제4부’라는 이름으로 설정한다. 권력에 대한 비판은 건설적 파괴이며 창조적 부정이다. 적어도 언론만큼은 ‘갑’과 적당히 타협해 자신만의 안녕에 안주해선 안 된다. 

국민들이 ‘안녕’ 대자보를 붙여야 하는 사회는 결코 안녕하지 못한 사회다. ‘안녕’ 대자보는 언론의 몫이어야 한다. 괴테는 “가장 나쁜 악덕은 그 자신의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론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한다. / 김헌범 제주한라대학교 간호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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