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17) 제주사회에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킨 박진경

 

   

사건진압을 주도한 박진경

‘조선경비대 제11연대 본부를 경기도 수원에서 제주도 제주읍에 이동하고 연대 확장에 진력(盡力)하는 한편 제주도 폭동사건을 단시일 내에 진압코자 대대 혹은 중대별로 각 지구에 부대를 배치하여 경비와 폭동 토벌작전에 착수하다. 초대 연대장에 전 제9연대장 중령 박진경 보직(補職)하다.’-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가. 육군 역사일지 1집(1945. 8. 15~1948. 8. 14) 조경 제11연대 이동 및 연대장 임명 / 5월 15일

‘제주도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범에 대한 군법회의는 9일 오전에 이어 오후 1시 30분부터 속개되었다. 이지형 검사로부터 사건 총지휘자 김달삼과 두 번이나 만난 문상길(23) 중위와 저격범 손선호(23) 하사와 이를 도와준 배경용(19) 외 4명에 관한 청취서류의 낭독으로 이날의 공판을 끝마쳤다.

그리고 제2일인 10일에는 오전 9시 30분부터 이응준(李應俊) 대령 재판장으로부터 사실심리가 있었는데 이날 변호인측은 전일 검사가 낭독한 조서는 고문에 의한 진술이라는 반박 변론이 있은 후 증인심문으로 들어가 당시 제주도 군기대장 이풍우(李豊雨) 중위와 5명에 대한 증인심문이 있었으나 고문에 관한 증언을 거부하였으므로 변호인측은 이번 재판은 법정중심이 아니라 검사중심이었다는 이의를 제출하고 오전 11시 30분 휴정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8월 11일
 
‘경비대 박대령 암살 피고인 문상길(文相吉) 외 3명에 대한 총살형 언도에 대하여 28일 인권옹호연맹에서는 “이번 제주도 사건에 있어 사실을 통해 볼 때 피고인들은 결코 사감(私感)에서가 아니라 실로 민족을 사랑하는 정의감에서 범행을 감행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형의 양정(量定)은 반드시 범죄의 동기를 참작한다는 행형상(行刑上) 대원칙에 의거하고 민족정의를 수호하는 견지에서 감형의 재결이 있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서울신문 1948년 8월 29일

박진경(朴珍景, 1920~1948)은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무림리에서 태어났다. 오사카(大阪) 외국어학교를 거쳐 일본육군공병학교를 졸업하여 일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제주도에 주둔한 일본38군단 소속 소위였다. 그의 부친은 친일파 집단인 대정익찬회의 중요간부였다.  대정익찬회(일본어: 大政翼賛会 (たいせいよくさんかい))는 1940년(쇼와 15년) 10월 12일부터 1945년(쇼와 20년) 6월 13일까지 존재하였던 일본 제국의 관제 국민통합 단일기구이다.

박진경이 국방경비대 사령부의 인사부에서 일하다가 9연대장으로 임명된 이유는 일제시대 일본군으로 제주도에 복무한 경험이 있어서 섬의 지형과 산악요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국이 해방되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 국방경비대 인사참모를 역임하였다. 1948년 4월 3일  제주4·3이 발발하였다. 동년 5월 6일 김익렬 중령에 이어 박진경은 제9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미군정이 그를 연대장으로 임명한 이유는 사령관은 전범으로서 처형을 면키 힘든 '초토화 작전'을 충실히 수행할 연대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박진경은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 강력하고 적극적인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이를 초토화진압작전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취임 1개월 만에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그는 영어에 능숙하고, 지휘력이 탁월하여 미군정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 그는 제주4·3 토벌 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산화한 '창군 영웅'이라는 시각과 출세를 위해 무차별 토벌을 강행한 ‘민족 반역자’라는 시각이 함께 공존한다.

박진경은 연대장 취임인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천명하였다. 그가 취한 행동은 ‘폭도와 구분이 애매하기 때문에’ 중산간 주민들을 쓸어 담다시피 체포했다. 중산간 마을을 누비고 다니면서 불과 한 달 사이에 수천 명의 ‘포로’를 양산해냈다.

그렇지만 경비대의 강경 방침에 반대하는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1948년 5월 20일 밤, 9연대 병사 41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무기와 장비, 그리고 5,600발의 탄약을 소지하고 모슬포 주둔지를 빠져나가 대정지서를 공격하고 일부는 입산하였다. 10여 명씩, 혹은 몇 명씩 병사들이 부대에서 탈출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박진경이 부임한지 한 달 열흘 만에 10대와 부녀자 그리고 노인들인 '포로'가 무려 6천여 명에 달했다. 제주도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휩쓸어버리는 작전이었다. 이 과감한 행동은 미군정의 격찬을 받았고 박진경은 대령으로 진급한다. 

사건의 발단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박진경의 대령 승진 축하연이 1948년 6월 17일 요정 옥성정에서 차려져 미군 장교와 11연대 참모가 동석하였다. 그는 6월 18일 새벽1시 귀가하여 숙소에서 잠이 들었는데, 3시 15분 한방의 총성이 울려 퍼지더니 숨을 거두었다.  손석호 하사가  박진경 연대장 방 안에 숨어들어 M1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스물여덟 살 박진경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 그를 죽인 이들은 3대대장 문상길 중위 이하 몇 명의 부하들이었다. 그 후 딘 군정장관은 박진경의 시신을 싣고 상경하였다. 후임 연대장으로 최경록 증령이 임명되었다.

박진경이 사망하자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를 붙잡으면 전모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는 제보가 있었다. 암살주모자가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로 판명되고, 이 밖의 동조자로 양희천 이등상사, 신상우 일등중사, 강자규 중사, 배경용 하상 등이었다.

이들은 사형선고를 받고 1948년 9월 23일 경기도 수색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박진경의 장례식은 육군장 제1호로 기록되었다. 정부에서는 박진경을 준장으로 추서하였다. 1952년 11월 7일 제주도민 및 군경후원회 명의로 박대령순직충혼비를 세웠다.

 

▲ 제주에 내려온 고문관들 제일 오른쪽이 박진경 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의 파장

‘1. 경비대 작전/최근 경비대는 폭도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폭도 4명을 사살하고 53명을 포로로 생포했다. 이 작전에서 경비대는 약 2톤 가량의 잡동사니 물자를 압수했다. (미군정 보고, B-2)

2. 경비대 사령관 암살/ 제주도 주둔 제11연대장 박진경이 6월 18일 새벽 3시 15분 취침 중 살해되었다. (미군정 보고, A-1) 논평 : 박대령은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부대장이자 야전지휘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 G-2 Periodic Report 1945.9.9~1949.6.17

‘제주에 주둔하고 있는 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27) 피습 사건을 조사하고자 18일 정오 김포공항을 떠난 딘 군정장관은 당일 하오 7시 반 경 박대령의 유해를 싣고 귀임하였다. 저격 범인에 대하여서는 부내인의 행동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으나 아직 명확한 판단은 짓지 못한 채 현지에서 각 방면으로 엄중한 수사를 계속중이라 한다.

그리고 과도정부 당국은 이번 제주도 일대의 소요사건의 수습책의 하나로 경찰책임자와 도지사의 경질을 단행하여 민심 수습에 노력하고 있다 한다. 유(柳)도지사 후임으로는 제주도 산업과장으로 있던 임관호(任琯鎬)씨가 이미 취임하여 시무중이라고 한다.’ -현대일보 1948년 6월 20일

암살사건에 연류된 자들은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양회천 상사, 이정후 하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등 총 6명이었다. 그중 이정우 하사는 총을 들고 입산해 무장대에 합류하는 바람에 체포되지 않았다. 직접 총을 쏜 사람은 손선호 하사로 밝혀졌다.

박진경 연대장의 피살사건은 육군장(陸軍葬) 제1호로 기록되었으니, 이는 고급장교가 희생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사건에 관련된 자들은 모두 서울로 압송돼 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 피고들은 자신들이 박진경을 암살하게 된 동기를 '무고한 토벌전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박진경을 저격한 손선호가 남긴 진술을 보면 제주도민에 대한 무차별 토벌에 대한 군 내부 반발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하여 볼 때 그의 작전은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했다.

… 사격 연습을 한다고 하고 부락의 소 기타 가축을 난살하였으며 폭도의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고 말았다.… 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 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박진경 저격수 손석호의 진술

재판결과 황주복, 김정도 하사에게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가, 신상우, 배경용 하사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리고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에 대해서는 사형이 선고되어, 1948년 9월 23일 경기도 수색의 산기슭에서 총살형이 집형됐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길 때, 손선호는 "하나님이시여, 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국방군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기독교인이었으며, 박진경을 사살했던 동기가 종교적 신념이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박진경 대령 살해범 공판 제3일. 13일 상오 9시부터 개정되었는데 제2일인 12일 주범 문상길 중위의 기소문은 전기고문 끝에 눈을 막은 후 조서에 대한 기록여하를 모르고 강제적으로 무조건 날인한 것이라고 부인하는 심리서를 낭독하고.......(중략)

......한편 전 제9연대장(현 제13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모든 군사행동은 당시 최고작전회의 참모이던 드루스 미군대위의 지휘였고 박대령 살해는 전혀 자기는 모른다”는 중대 증언으로 상오 군법재판은 일단 휴정하였다(11시 20분).’ -국제신문 1948년 8월 14일
 
함(咸)연대장은 기자단 일행을 포로수용소와 난민수용소로 안내하였다. 정거장 대합실 같은 넓은 방안에 다리를 펼 곳 없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이 포로와 난민이다. 제주도 태생으로 농업학교 4년 중도에 4․3사건을 당하고 이것을 계기로 파괴행동을 시작하여 식량을 조달하러 해안부락에 내려왔다가 국군에게 포로가 되었다는 한 청년은 우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제주폭동은 종래 행정당국 측의 강압에 싹이 텄으며 작년 3․1절의 시위행렬에서 경관측 발포로 4~5명이 쓰러진 것에 한층 더 성숙하였다”고. 그들은 복수를 표방하고 쉽게 전도민의 동원에 성공하였으며 당국의 억압, 투옥 등에 그들의 선동․선전은 더욱 유리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미소공위만이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외치며 미국이 비록 강국이나 약소민족의 생존권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선전을 하여 도민들을 산중에 모아놓았다는 것이다.

국군의 파죽(破竹)과 같은 진격은 그들의 꿈을 깨뜨렸고 3월에 이르러는 이덕구 이하 20여 명이 무기를 땅에 묻고 분산하는 운명에 빠졌으며 서로가 투항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그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신(申)국방장관이 제주에 왔다. 여행의 피로도 풀 사이 없이 전지시찰에 들어갔고 한라산 장병의 위문이 시작되었다. 돌담만 남은 재로 덮인 인가와 죽어 넘어져있는 말과 사람의 시체더미가 눈에 띄며 시체 썩는 냄새에 점심밥도 맛이 없다.

한라산 중턱 군데군데는 연기가 난다. 폭도의 조량을 막으며 정글을 불로 태운다는 것이다. 한라산 기슭에 있는 저 유명한관음사(觀音寺)도 지금은 주춧돌만이 남아 있다. 파괴된 길을 수선하러 동리 민보단이 동원되었다. 남녀노소 거의 전부인 듯하다. 신(申)장관의 간곡한 훈시에 뒤이어 그들이 가지고 온 점심밥을 보았다. 약 20%는 점심이 없다. 가지고 온 것도 조․콩뿐이며 그 풍부하던 감자와 쌀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제주비바리(處女)는 20세 출가할 때까지 쌀 서말(三斗)을 못 먹는다’는 옛 기억이 머리에 도나 이는 1세기 전 이야기이고 근래는 그렇지 않았다. 뼈만 남은 근로대의 힘없는 괭이를 보는 신장관의 목은 또 막혔다. 임(任)도지사는 말한다. 동란으로 죽은 사람이 아마 2만 명은 될 것이다. 주택은 11만 7,000호중 무려 탄 것 3만 3,500호, 도민의 유일한 생업인 가축피해만도 4만 6,000마리. 전체도민은 지나간 1년간 생업을 잃었고 5,000의 해녀도, 20여 처의 대소공장도, 농토도 황폐하였다는 것이다.

브라스밴드의 나팔소리가 제주건설에 한 박자를 더 넣었다. 이(李)대통령의 제주도 시찰을 환영하는 학도호국대의 행렬이다. 수만의 도민은 광장에 모였고 간곡한 대통령의 훈시는 큰 감명을 주었다. 그들은 재건에 그리고 나라에 충성할 것을 대통령 앞에서 맹세하였다. “권당(眷堂)이니 더 쉬고 가시오”

초급중학 1년 여학생으로 조직된 국군위문단은 국군을 위문하고 내려오던 한라산 중턱에서 말문을 연다. 제주에서 권당(친척)을 만나니 반갑다고 하였다.(끝)’-국도신문 1949년 4월 23일

문상길 총살형과 철회 성명

 

▲ 제11연대 본부가 설치된 제주농업학교에서 열린 박진경 연대장 고별식에서 딘 군정장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1948. 6. 18).

‘제9연대는 1946년 11월 16일 제주도 모슬포에서 창설 이래 향토연대로서 교육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이치업(李致業) 소령이 제2연대 연대장으로 재임시(1947.6.1.~12.1) 중대장에 문상길(文相吉) 중위가 있었다. 문 중위는 제2연대 사병으로 입대하기 전부터 좌익사상에 감염된 자로서 제9연대내의 조직책이었다.

그는 도내 남로당의 종책인 김달삼, 부책 조노구, 동 인민해방군사련관 이덕구, 동 조직부장 김민생과 접촉하면서 연대를 전북하기 위한 공작을 기도하면서 연대 내의 불순분자 포섭에 노력하였다.’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발간 ‘국방경비대의 토벌작전’에서 발췌

‘경비대 박대령 암살 피고인 문상길(文相吉) 외 3명에 대한 총살형 언도에 대하여 28일 인권옹호연맹에서는 “이번 제주도 사건에 있어 사실을 통해 볼 때 피고인들은 결코 사감(私感)에서가 아니라 실로 민족을 사랑하는 정의감에서 범행을 감행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형의 양정(量定)은 반드시 범죄의 동기를 참작한다는 행형상(行形上) 대원칙에 의거하고 민족정의를 수호하는 견지에서 감형의 재결이 잇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서울신문 1948년 8월 29일 기사  

‘무고한 제주도 인민을 무자비하게 토벌하는 제주도 경비대 대장 박대령 암살사건은 그 동기가 애국애족의 지정에서 우러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살해범 문상길 중위 등에 대한 총살 언도는 너무나 민족정기에 거슬리는 처사라 하여 각계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바, 27일 민애청 법학자동맹 및 민애청 서울시위(市委) 등에서도 각각 성명을 발표하여 “박대령은 그 생모가 왜녀이며 대동아전쟁 당시 여성학병에 자원 참가하여 미영(美英)격멸에 위훈을 세운 알짜 친일파로 제주도에 파견되자 무고한 애국인민에 대하여 천인공노할 야수적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반역도인 박대령을 정의의 총탄으로써 처단한 문중위 등의 의거는 실로 민족정기의 발현임에도 불구하고 총살형 언도는 언어도단으로 즉시 총살형 언도 철회를 강경히 요구한다”고 말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28일

1948년 9월 23일 하오 3시 35분. 수색(水色)의 붉은 산기슭에 터져 나온 10발의 총탄. 두 젊은 생명을 빼앗아 가고 말았다. 중위 문상길, 일등상사 손선호(孫善鎬). 사건 관계자는 10명. 총살형이 선고된 피고는 문상길, 손선호, 배경용, 신상우 4명. 집행직전 배경용, 신상우는 무기형으로 감형, 결국 문상길과 손선호만이 그 형의 집행을 받게 되었다.

이날 하오 3시 15분. 제1여단 사령부 정문을 떠난 미군트럭에는 문상길과 손선호가 수갑을 찬 채 군기병의 호위 가운데 앉아 있었다. 네모로 깎은 말뚝이 둘, 붉은 산기슭에 나란히 서 있다. 그 하나의 말뚝을 향하여 문상길이 천천히 걸어간다.  총살형 집행장이 낭독되고 마지막 유언의 기회를 준다. “스물세살을 최후로 문상길은 갑니다. 여러분은 조선의 군대입니다. 마지막 바라건대 ×××의 ××아래 ×××의 ××아래 ××를 하는 조선군대가 되지 말기를 바라며 갑니다” 마지막 말에 화답하는 산울림이 영롱할 따름이다.

몸이 말뚝에 묶인다. 수건으로 두 눈을 가렸다. 왼편 가슴 심장 위에 검은 동그라미 사격표식이 붙여졌다. 다섯 명의 사격수가 쏜 총탄 다섯 발은 기어코 문상길의 가슴을 뚫고야 말았다. 뒤이어  손선호가 걸어가며 미소를 띤 얼굴로 상관들에게 일일이 목례를 한다.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던 군가나 한마디 부르고 저 세상으로 가겠습니다.” 머리를 하늘 쪽으로 돌려 노래를 부른다. “혈관에 파도치는 애국의 깃발, 넓고 넓은 사나이 마음,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들어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 천지를 진동하는 승리의 함성……” 사형집행 3분전이다. 그리고 유언으로 “훌륭한 조선군대가 되어 주십시오.” 단 한 마디. “겨누어 총.” 이 때 “오! 3천만 민족이여!” 손상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이 말이 사라지기 전에 “쏘앗.” 다섯 발 M1 총알은 손상사의 가슴을 뚫었다. 이때 하오 3시 45분.

문상길은 충남 출생이다. 육사3기다. 국방경비대 제9연대 소위로 복무하다가 중위로 진급하였다. 제주경비9연대는 1946년 11월 16일 모슬포 비행장에서 창설하였다. 장교들과 장병들이 제주도 마을을 찾아다니며 경비대에 입대하도록 설득을 해도 모병이 안 되었다.

▲ 억새풀과 소나무 가지로 임시거처를 마련한 주민들.

박진경이 사살되자 문상길이 범인이라는 투서가 수사대에 제보되었다. 투서는 ‘문살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를 잡아보면 암설사건의 전모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문상길 중위를 시작으로 암살사건 연루자들이 속속 체포됐다. 그들은 문상길(文相吉·중위), 손선호(孫善鎬.·하사), 배경용(裵敬用·하사), 양회천(梁會千·이등상사), 이정우(李禎雨·하사·미체포), 신상우(申尙雨·하사), 강승규(姜承珪·하사), 황주복(黃柱福·하사), 김정도(金正道·하사) 등 모두 9명이었다. 이정우는 M1 총 1정을 소지한 채 입산했다.

문상길은 심문 끝에 범행을 인정했다. 그의 가슴에 부적을 넣고 있었는데, 붉은 인주가 피부에 번져 있는 것을 보고 심문관은 “상관 죽인 뒤에 불안해서 그 부적 갖고 있었던 거지?”라고 추궁을 했고 문 중위는 인정을 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고 열혈 민족주의자였다.

문상길의 최후진술을 보면 그렇다.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 군정장관의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도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느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그들에 대한 선고 공판은 정부 수립 하루 전에 열렸다. 재판부는 문상길 중위를 비롯해 사건에 연루된 신상우·손선호·배경용 하사관 등 4명에게 총살형을 언도했다. 또 양회천에게는 무기징역을, 강승규에게는 5년 징역을 각각 선고했다. 그런데 변호인의 감형 진정서가 제출되고, 각계에서 감형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총살형에 반대하는 여론이 일었다. 그 덕분인지 신상우·배경용에 대한 총살형은 집행 직전 특사에 의해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1948년 8월 30일 하오 5시경 서울시내 화신5층으로부터 수많은 삐라가 살포되었다. 삐라의 내용은 문상길 주위에 대한 사형빕향을 참회하라는 것이었다. 성명서도 잇따랐다. 기독교 민주동맹은 8월 31일 ‘문 중위 등 감형하라’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박 대령 살해사건 총살형은 부당‘하다는 견해도 곳곳에서 나왔다.

당시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법학가동맹에서는 고(故) 박대령 살해사건에 관련하여 26일 “제주도민 30만을 위하여서나 또는 민족적 정기에서 보더라도 가해자 손선호(孫善鎬) 등 4명에 대해서 총살형에 처한다는 것은 범행동기를 전혀 무시한 것으로 용납할 수 없음을 법학도의 입장에서 강경히 주장한다”는 견해를 발표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특히 민애청 법학자동맹 및 민애청 서울시위(市委) 등에서는 각각 성명을 발표하여 “박대령은 그 생모가 왜녀이며 대동아전쟁 당시 여성학병에 자원 참가하여 미영(美英)격멸에 위훈을 세운 알짜 친일파로 제주도에 파견되자 무고한 애국인민에 대해여 천인공노할 야수적 학살을 자향하였다. 이러한 반역도인 박대령을 정의의 총탕으로서 처단한 문중위 등의 의거는 실로 민족 정기의 발현임에도 불국하고 총살형 언도는 언어도단으로 즉시 총살형 언도 철회를 강경히 요구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어제 31일 기민(基民)에서는 문중위 총살언도에 대하여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제주도사건을 무력으로 해결 지으려는 것은 천만부당하다”고 전제하고 “문중위가 박대령을 암살한 동기는 애국순정에서 나온 민족정의의 수호에 있으므로 사형언도는 부당하다”고 지적하고 동시 “그 감형을 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1일

“조국의 통일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5·10선거를 반대하고 봉기한 제주도민의 위대한 애국성을 박대령은 학살과 고문과 총검으로써 전 도민을 소탕하려한 것이다. 이는 박대령이 제2차 대전중 간도(强盜) 일제에 자긴 학병으로 나가 충성을 다하였던 자이며 해방 후는 그들의 새로운 주인에게 그 충성을 드리는데 전 도민의 무차별 학살로써 진충(盡忠)하였으며 그를 계속하려 하였다.

이에 분연하고 동족살상을 묵과할 수 없는 민족정기에서 문중위 등 제씨는 박대령을 살해한 것이다. 이런 애국애족열에 불타는 의거를 불구하고 사형판결이라는 그 부당성을 재일60만을 대표하여 지적하고 취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다.” -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1일

박진경의 추모비

 

▲ 충혼묘지 입구에 세워진 박진경 추모비.

‘금(今) 8일 하오 1시 본사 사무실에서 각계인사를 초청하고 기보(旣報)한 군원회(軍援會) 본도지부 주최로 추진중인 4․3사건 수습공로자 박진경(朴珍景) 대령의 기념비 건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한다.’

-제주신보 1952년 10월 8일

‘내(來) 11월 7일 고 박진경(朴珍景)대령 추도비 제막식이 거행된다. 4․3사건 발발 당시 11연대장으로서 공비토벌과 민심선무에 많은 공훈을 남긴 고 박진경대령을 추도하여 앞서 도내 각 기관장과 유지들이 회합, 총장 9척의 자연석비를 건립키로 결정하였음은 기보(旣報)한 바이거니와 그간 군경원호회를 비롯한 각계의 진력으로 공사는 예정보다 급속한 진척을 보아 석비 조각을 완료, 수일내에 제주방송국 내에 건립될 것이다. 이 건립장소는 고(故) 박(朴)대령이 전사한 장소인 것이다.’-제주신보 1952년 10월 24일

‘29일 당지 병사구사령부 508특무대 육군헌병대 장병들이 제주방송국 경내에 건립되어 있는 고 박진경(朴珍景)대령 추도비 환경을 아담하게 정리하였다. 고 박진경 대령은 4․3사건 당시 본도에서 제11연대장으로 있으면서 공비토벌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다가 순직한 호국의 신이며 추도비 주위가 정리되어 있지 않음을 느낀 당지 주둔 육군부대 장병들이 땀의 봉사로써 고 박대령의 전공을 추념하게 된 것이다.’-제주신보 1953년 6월 30일

박진경에 대한 평가 역시 둘로 나뉜다. 그의 고향인 경남 남해군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1990년에 세워졌다. 빨치산 토벌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산화한 '창군 영웅'이라는 시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최근 그 지역에서는 '양민학살자 박진경 동상 철거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 운동은 박진경이 출세를 위해 무차별 토벌을 강행한 민족반역자라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주시충혼묘지 입구에도 ‘박진경추도비’가 있다. 추도비에는 “북괴는 제주도를 공산기지화 설정 1948년 4월 3일 무장폭동을 봉기 양민학살폭동을 감행하자 딘 소장은 공(公, 박진경)을 11연대장으로 보임하였다. 제주도민의 생명보호.와 사태수습 명을 받은 공(公)은 불과 2개월 내 소위 공산반란 해방군 주력을 섬멸한 전공에 감탄한 딘 소장은 대령으로 승진시켰다. 그 후 산발적 폭동공비잔당 소탕 작전 중 불행히도 적의 흉탄에 장렬히 산화하셨다.’라고 씌어져 있다. 그는 지금도 창군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1990년 4월 7일 박익주 전 국회의원에 의해 남해군민동산에 세워진 또 다른 동상 앞에는 제주도를 상징하는 돌하르방 2기도 세워져 있다. 한때 남해지역에서는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도 일었다. 

군 장성 출신 모임인 성우회는 2001년 4월 이 곳에서 참배행사를 갖기도 했으며, 당시 박익주 전 의원과 성우회 회원들은 동상 철거(이전)운동을 비난하기도 했다. 남해사랑청년회 등 지역 단체들은 제주4·3의 진실규명이 이루어지고 과거청산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더구나 군민동산에 박 대령의 동상이 세워져있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폈다.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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