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현 칼럼> 대통령 사과가 ‘외면’하는 것들 (3)

    <이 글은 김동현의 박사 학위 논문 『로컬리티의 발견과 내부식민지로서의 ‘제주’』의 보론이다. 김동현 논문은 ‘로컬리티’와 ‘내부식민지’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바탕으로 식민지 시기부터 1970년대까지의 제주의 지역성이 ‘발견’되는 양상을 규명하였다. 이 보론은 제주의 ‘지역성 발견’ 양상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제주 4․3, 특히 대통령의 공식 사과문을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최근 제주 4․3 추념일이 제정되는 가운데 대통령의 사과문의 의의와 그것이 담고 있지 않는 것을 규명하는 이 글은 제주 4․3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인의 동의와 양해를 얻어 이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문에서 제주는 “평화와 인권의 섬”이라는 상징으로 지칭된다. 대통령은 이날 연설문에서 “제주가 평화와 인권의 섬으로 우뚝 섰다”라고 말한다.

주지하다시피 55년간 제주는 대한민국의 외부로 존재해왔다. 그것은 4․3을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으며 국가권력은 금기에 대한 도전을 철저히 응징해왔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날의 공식적인 사과를 통해 제주는 “평화와 인권”이라는 기표를 부여받았으며 위령공간은 제주 4·3 평화공원이라는 공식적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평화와 인권은 보편적 가치로 승인받는다. 이 때 보편적 가치라는 것은 특수를 전제로 개념화된다. 구체적 질료를 가진 제주는 이렇게 추상화되고 폭력적으로 단일화된 이미지의 그물망에 묶이고 만다.

그렇다면 이러한 추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추상의 기원 혹은 정치적 수사의 작동방식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1948년 4월 3일의 ‘무장봉기’ 이후 발표된 조병옥의 선무문을 살펴보자.

 

                                                                               도민에게 고함

친애하는 제주의 동포 여러분!
우리의 동경하던 자주독립이 목첩(目睫)에 박두한 이 때, 무모한 폭동을 일으켜 여러분의 골육인 건국의 일꾼을 살상하여 가뜩이나 빈약한 우리의 재산을 파괴하고 독립을 방해함은 그 무슨 일인가.

여러분은 민족을 소련에 팔아 노예로 만들려 하는 공산분자의 흉악한 음모와 계략에 속은 것이다. 현명한 여러분은 총선거가 조선독립의 천재일우의 호기이고 그 완성의 유일한 방도임을 인식하라. 이 기회에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영영 노예의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여러분! 때는 아직 늦지 않았다. 파괴와 기만적 선전 및 폭동에 부화뇌동하지 마라. 그리고 주모자와 직접 행동으로 범죄한 자들도 지금이라도 즉시 그 전과(前過)를 회전(悔悛) 선량한 국민이 되는 행상(行狀)을 가지라.

소지하고 있는 무기, 흉기 등을 신속히 경찰관서에 납부하라. 그리고 각기 생업에 종사하라. 그리하여야 정상작량(情狀酌量)의 은전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개전치 않고 끝끝내 여사(如斯) 망국적 폭거를 지속할진대 본관은 부득이 눈물을 머금고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1948년 4월 14일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신보, 1948.4.18)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제주도민을 지칭하는 지시어 층위들의 충돌이다. 선무문에서는 “제주도민”과 “여러분”, “제주의 동포”, 그리고 “건국의 일꾼”과 “국민”, “민족”이 서로 혼재되어 등장한다. 이들 지시어는 서로 충돌되기도 하는데 “여러분”은 “우리의 재산을 파괴하고 독립을 방해”하는 세력들에게 속은 우매함을, 때로는 “현명한”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하기도 한다.

이러한 혼재들 속에서 분명한 것은 “공산분자”들이 ‘도민’의 범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산분자”들은 “범죄”를 저지른 자일뿐이며 과오를 참회하고 “선량한 국민”으로 개조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들은 “건국의 일꾼”을 살상한 흉악한 자들이다. “공산분자”와 “건국의 일꾼”이라는 명확한 구분 속에서 도민은 그 발화의 의미에 따라 “여러분”으로 또는 “동포”로 불려진다.

이러한 구분은 “공산분자”와 “건국의 일꾼”이라는 대립적 구도 속에서 “도민”이 특정한 선택을 강요받는 대상임을 보여준다. “공산분자의 흉악한 음모와 계략”에 속을 때는 우매한 “여러분”이지만 “총선거가 조선독립의 천재일우”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도민은 “현명한 여러분”으로 불려진다.

이러한 구분은 ‘폭동’의 주도세력을 “조선독립의 천재일우의 호기”를 방해하는 세력으로 묘사한다. 이들의 ‘폭동’은 “망국적 폭거”이며 “민족을 소련에 팔아 노예로 만들려는”는 반민족적 행위이다. “조선독립”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이러한 구도는 ‘민족-반민족’의 이분법으로 사태를 재단하는 태도이며 민족의 내부와 외부를 명확히 구분 짓는 발상이다. 이러한 ‘민족-반민족’의 구도 아래에서 민족은 절대선으로 그리고 “공산폭동”은 절대악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는 당시 조병옥을 비롯한 집권세력이 ‘사태’의 발발원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총선거를 통한 ‘조선독립’의 성취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악은 응징되어야 할 대상이며 민족을 위해 악을 응징하는 군경은 선의의 집행자일 뿐이다. ‘민족=선’ / ‘반민족=악’의 구도는 군경의 진압행위를 선의 집행으로 인식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과론적인 접근이지만 제주 4·3이 한국 현대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비극적 결말을 가져온 것도 이러한 선악의 대결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결의식과 달리 김대봉 공보실장은 “폭력과 동족상잔”을 막아야 한다는 사건의식을 보여준다. 김대봉은 기자들과 만나 밝힌 담화문에서 자신의 직속상관인 조병옥의 견해와는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는 “동포애만이 사건해결의 관건”이라며 자신의 임무를 “민중을 탄압”하는 것이 아닌 “민중의 참다운 여론을 듣고 서로 협동해서 선무를 통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동족상잔을 막자”고 주장한다.

내가 내도한 목적은 민중을 탄압하는 것보다도 민중의 참다운 여론을 듣고 서로 협동해서 선무를 통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동족상잔을 막자는 이 점에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민중과 접촉하여 민중의 소리를 듣는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하며 무력이나 탄압으로 치안을 확보하려는 것은 벌써 낡은 치안유지 방법이며 폭력과 동족상잔은 절대 회피하여 도덕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난 3․1 사건으로부터 2․7사건에 긍(亘)하여 경찰이 잘못한 행위가 있는 것을 나는 인정하며 이를 사과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경찰관 개인의 부당한 행위이요, 국립경찰은 항상 이러한 부당행위를 제거하기에 노력하고 이다. 그러나 민중들도 경찰이 잘못된 점이 있으면 폭행과 살육으로 임하는 대신에 상사에 호소하여 주기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진정한 민중의 여론을 듣고 의견을 참고하여 이번 사건의 수습에 노력하겠다. 오늘과 같이 미군정 하에 있는 우리들은 사상을 초월하여 민족애를 가져 독립전취에 매진하지 않으면 우리는 조국을 잃을 것이요, 민족은 영원히 멸망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공산주의니 우익이니 하는 것을 모두 싫어한다. 이런 것은 조국이 독립되는 날 주장할 것이고, 군정 하에 있어서 취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동족상잔밖에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나도 제주사람이요, 조선민족이다. 나는 제주사람을 사랑하고 조선민족을 사랑한다. 동포애 이것만이 이번 사건해결의 유일한 관건일 것이다. 그리고 청년단체가 경찰에 협조하는 것은 좋으니 그 기회를 얻어서 무기를 가져서 테러 폭행 그 외의 경찰행위를 하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제주도의 언론인도 일부 말단 경관에 의하여 활동에 많은 제한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양성할 것이며 언론인을 통하여 참다운 여론을 듣고 싶다. 야간통행증 같은 것도 발행하도록 하겠다. 또 교통이 차단되어 곤란한 사정도 잘 안다. 최후에 부탁할 것은 이조 500년래 내려온 개인 팟쇼주의를 청산하고 민족애를 가져서 서로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밑줄 인용자) (제주신보, 1948.4.18)

조병옥의 선무문과 다른 점은 일단 그가 ‘제주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조병옥이 ‘민족-선/반민족-악’의 구분에서 사태를 바라본다면 김대봉은 ‘제주인’을 ‘조선민족’의 범주에 포함시키면서 ‘동포애’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조병옥이 사건 발발 원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과 달리 김대봉은 사건 발발의 한 원인으로 ‘경찰’의 잘못을 거론하고 있다.

물론 그 잘못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위였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무력’과 ‘탄압’에 의한 치안 유지를 ‘낡은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도덕적 치안 집행’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이러한 ‘도덕적 치안 집행’이 ‘동족상잔’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관용적으로까지 보이는 이러한 발화는 국가권력의 인도주의적 ‘사과’인가, 아니면 ‘선한’ 권력의 반성인가.

권력의 관용적 태도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199쪽 참조) 김대봉의 발언은 조병옥 선무문의 유화적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것은 이 담화문에서 과오를 인정하는 방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부당한 행위’가 경찰관 개인의 잘못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경찰관 개인의 부당한 행위”를 “국립경찰”이 “제거”하려 애쓰고 있다는 발언에서 드러난다. ‘폭력’과 ‘탄압’은 ‘국립경찰’의 문제가 아니라 일부 개인의 일탈행위일 뿐이다. 과오는 국립경찰-국가권력의 성실한 대리인인-이 아니라 개인이 범한 것이다. 국가는 개인의 과오까지도 ‘관대하게’ 사과를 할 수 있는 주체이다. 이러한 태도는 구조를 문제 삼지 않고 모든 것을 개인의 ‘실수’로 모든 것을 무화하려는 무의식을 저변에 담고 있다.

‘민족/반민족’의 구분이나 ‘동포애’를 강조하는 방식은 구체적 개인들을 추상의 범주로 수렴하려는 동일한 욕망에서 발화된다. 민족성, 혹은 일국(一國)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결국은 관습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신체화된 다양한 실천들로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도리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33쪽)  이러한 추상의 언어란 개인의 신체에 각인된 국가의 언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은 변하지 않는다. 권력의 잘못을 인정할 때는 그것을 개인으로 탓으로 돌리거나 ‘국가’라는 추상의 가면 뒤로 숨어버린다. 이승만이 “가혹한 방법을 써서라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권력의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가혹한 탄압’의 지시나 노무현 대통령의 ‘희생’에 대한 사과는 동일한 권력의 수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제주’라는 구체성을 지워버린 진압명령과 가해의 구체성을 외면한 사과는 서로 같은 맥락에서 발화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권력의 선함과 악함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게 말해지도록 하는 것, 그렇게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권력이기 때문이다. ‘제주’라는 지리적 공간은 국가에 의해 호명될 때 추상은 전면으로 부각되고 수많은 구체들은 그러한 추상의 외부에서 잉여로 남게 된다. ‘가혹한 탄압’의 명령 주체나 모두를 ‘희생자’로 호명하는 방식은 개별적 죽음의 구체적 진실을 은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사과문은 진실에 다가서려 하는 선의마저도 진실에 다가갈 수 없게 만드는 권력구조의 발화가 지니는 한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물론 이러한 시각에 대해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가 지닌 역사적 의의를 축소하고 있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제주 4․3’에 대한 ‘반동적 시각’은 무엇 때문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사과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그것이 지닌 한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과오를 국가라는 추상의 뒤에 숨기는 행위는 그 자체로 비겁하다.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행위 혹은 ‘우리’의 행위가 지닌 폭력의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음험하며 불온하다. 끊임없이 개인의 구체적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 그럼으로써 그것을 추상으로 회피하려는 모든 시도를 무화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악’이 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를 회복하는 길이다.

루쉰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외부의 대상을 향해 날선 투창을 던지는 동시에 내 자신에게도 동일한 날카로움으로 비수를 던지는 일. 그것이 국가라는 추상의 뒤에 숨겨진 개인의 구체적 가해와 그것의 책임을 묻는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대통령의 사과는 역사적으로 진일보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행위를 추상화함으로써 ‘추상의 알리바이’를 부여했다는 책임을 모면하기는 힘들다.

그러한 추상의 뒤에서 국가 폭력에 대한 공식적 사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그들의 행위를 반성하지 않는, 방아쇠를 당긴, 채찍의 손잡이를 휘두른 책임이 은폐되거나 용인될 수는 없다. 이것이 역사적 성과와 의의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사과에 담긴 언술의 작동방식을 문제 삼는 이유라고 해야 할 것이다. / 김동현 박사(국문학)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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