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지역개발도 도덕과 원칙에 벗어남이 없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한 물음이 있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개발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개발은 진정 지역주민들을 위한 것인가’. ‘개발’과 ‘자본’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그 물음은 현실적으로 다가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개발의 어휘들은 그것에 거의 침묵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데 거기에 웬 의미냐”고 되물으면 난감하다. 역시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묻는 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의미의 과잉이 더러 버거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그 물음과 치열하게 대결해야 한다. 그건 이미 우리의 실존적 물음이다.

오늘 우리의 물음에 대한 해답은 “지역개발의 궁극적 목적은 지역주민들의 질적 생활향상을 도모하는데 있다”는 말에서 찾아야 한다. 좀 진부하지만, 사무치게 그래야만 한다. 그게 전부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온갖 개발문제도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개발의 어휘들이 지역주민들의 삶과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지역사회 발전은 어쩔 수 없이 개발이라는 역동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개발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가치들의 반영이다. 그것은 지역사회 전체의 틀에서 조건 지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은 그 어떤 형태의 것이든, 지역주민들의 삶의 향상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를 사고(思考)의 발단으로 하여 계획이 수립되고, 추진돼야 한다. 개발의 효과를 아름다운 말로 포장하는 허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이 시대의 지역개발에 대해 아무 것도 이야기할 것이 없게 된다.

혹자는 역시서 되물을지도 모른다. “그건 이미 낡은 생각이 아닌가?”라고…. 역시 그것도 옳은 지적일 수 있겠다. 아닌 게 아니라,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너무 빠르게 변하여 눈길을 주기조차 힘들다. 개발을 보는 시각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의 ‘종합개발계획’을 바라보는 시각과, 오늘의 이른바 ‘국제자유도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다. 그러나 우리의 조건은 달라진 게 없다. 우리의 독특한 문화와, 이 아름다운 자연이 우리의 변함없는 삶의 터전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영역적 정체성’이 요구된다. 아무리 여기저기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상이지만, 그건 변함이 없다. 여기에서의 영역은 우리 모두의 정체성과 삶이 결부된 ‘공동체로서의 공간’을 의미한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항상 우리가 ‘제주라는 공간’으로부터 우리의 정체성을 도출해내는 공동체의 역사 속에 편입돼 있다. 그래서 나는 ‘제주라는 삶의 공간과 그 문화’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려는 그 어떤 개발에도 저항한다.

개발전략은 입체적 과정이다. 지역개발은 특히 그렇다. 한 지역의 문화와 자연은 거래대상이 아니다. 둘을 주고 하나를 얻자는 것도 아니며, 하나를 희생하여 둘을 얻자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진지한 사유를 거쳐야 한다. 우리의 자원 이용과 개발방향, 그리고 투자유치에 이르기까지…. 이때 만일 ‘그 어떤 것도 좋다’는 지나친 성과주의에 매달리거나, 선택이 고통스럽다고 하여 손쉬운 방법만을 추구할 경우, 지역사회 발전은 고사하고, 지역사회 안정만을 해칠 뿐이다. 그건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지역개발 역시 ‘도덕과 원칙’에서 벗어남이 없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두 가지로 집약한다. 우선 ‘사람’이다. 지역개발의 중심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에 두어져야 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지역주민들의 질적 생활향상이지, 지역의 외형적 성장만이 아니다. 그러나 오해 없기 바란다. 그렇다고 하여 지역의 외형적 성장이 필요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한 지역의 외형적 성장효과가 곧바로 지역주민들의 질적 생활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게 우리의 고민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자연’이다. 바로 ‘공간의 살핌’이다. 개발은 흔히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의 변형과 관련된다. 이때 개발의 경제적 유효함에 집착하여, 그 경험적 확증 안에 들어온 것만을 추구하는 개발우상주의로 치달을 경우, 자연파괴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는 지금 도처에서 그걸 확인하고 있다.

나는 ‘창백한 도덕주의’를 원치 않는다. 그건 ‘시대착오적 미망’으로 오해 받기 십상이다. 정말이지, 오늘의 이야기에서 그건 가당찮다. 그러나 ‘도덕과 원칙’은 ‘사람’과 ‘공간’을 보존함으로써, 우리의 자연적 본성을 지켜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절박한 욕망의 표현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원칙과 도덕적 명제다.

▲ 강정홍 언론인.

“의식(衣食)이 족해야 예절을 아는 법이고, 위험을 벗어나야 부끄러움을 알게 된다”는 말은 오늘에도 살아 있다. 그러나 도덕과 원칙의 무시는 우리의 질적 삶의 포기일 수 있다. 결코 색 바랜 비관론이 아니다. 원칙 없는 현실주의가 판을 칠 때, 지역의 건강성과 안정성이 상실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실험을 마친 경험이다.

그렇다면 서두의 물음은 다시 고쳐 물어야 한다.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누구의 관심과 이해(利害)에 따라 추진되는가’ 이제 선거철을 맞았으니, 이 문제에 대해서도 좀 논의했으면 한다.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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