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19)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낸 ‘인동초(忍冬草)’ 김대중

“인권유린이 반공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 15대 대통령 김대중.

‘당신은 민주주의입니다/ 어둠의 날 들/ 몰아치는 눈보라 견디고 피어나는 의지입니다/ 몇 번이나 죽음의 마루턱/ 몇 번이나 그 마루턱 넘어/ 다시 일어나는 목숨의 승리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들의 자유입니다 우리입니다/ 당신은 민족 통일입니다/ 미움의 세월/ 서로 겨눈 총부리 거두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 그 누구도 바라마지 않는 것/ 마구 달려오는 하나의 산천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들의 평화입니다  우리입니다// 당신은 이제 세계입니다/ 외딴 섬 아기/ 자라나서 겨레의 지도자/ 겨레 밖의 교사입니다/ 당신의 고난/ 당신의 오랜 꿈 지구의 방방곡곡 떠돌아/ 당신의 이름은 세계의 이름입니다// 아  당신은 우리의 내일입니다// 이제 가소서/ 길고 긴 서사시 두고 가소서/’

- 고은의 시 ‘당신은 우리입니다’

‘4.3사건은 반드시 진상이 규명돼야 하며 특별법이 제정돼 억울한 원혼들의 넋을 달래 주고 유가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제주도민들이 절차상 필요한 내용의 국회청원을 제출해 달라.’-1989년 10월 22일 평민당 제주도당 결성대회 때

‘수많은 도민이 희생된 4.3은 재조명돼야 한다. 4.3의 희생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수단과 방법의 정당화를 위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제주의 4.3은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요 부끄러운 역사이다. 인권유린이 반공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거창주민학살사건’은 이미 주민청원이 있어 정부차원의 보상이 검토되고 있다. 제주의 4.3 역시 청원이 이뤄져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1990년 7월 22일․제주방문 때

김대중(金大中, 1924년~2009년)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忍冬草)’로 비유되기도 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에 참여하여 선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51년 3월엔 목포해운회사 사장에 같은 해 전남해운조합 회장, 한국조선조합 이사로 취임하였다.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목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1955년 10월에는 《사상계》에 노동문제에 관한 글을 기고하였다.

그 후 제5대 민의원과 제6·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군사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 고문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이른바 민주 진영을 구축하였다. 1989년 8월 2일,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으로 중부경찰서에 강제 구인되어 14시간동안 수사를 받았다.

1990년에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을 3당 야합이라며 반대하고 투쟁을 선언하였다. 1991년 4월 15일에 평화민주당을 신민주연합당으로 확대, 재개편한 후 당 총재에 취임했고, 결국 1997년 12월 18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1032만 6천표를 획득해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노무현은 그의 자서전에서 김대중에 대해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권력 장악 능력’, ‘살림살이 솜씨’, ‘역사의식’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김대중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고, 발전을 거듭하며, 정말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노무현은 그가 김구와 필적할만한 ‘지도자’로써 존경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김대중은 ‘햇볕정책’이라는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기존의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APEC이나 ASEM처럼 세계 강대국들이 모두 참석하는 국제회의에서도 김대중은 거의 언제나 첫 번째의 발언권을 부여받았다.

특히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 후보는 4·3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새정치국민회의는 1998년 3월 30일 당내에 ‘제주도 4·3사태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국무회의 4·3특위는 5월 7일 제주에서, 9월 28일 국회에서 각각 ‘4·3사건 공청회’를 개최하였다.

 

▲ 제주 특별법 서명 문서와 당시 서명을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만년필.

“나는 제주인의 한과 고통과 희망을 같이 하겠다.”

‘모진 겨울/ 칼바람에도/ 잎을 떨구지 않고/ 인고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행동하는 양심으로/ 사셨던 임이여// 늦게 온 임의 계절/ 햇볕 따사로운 날/ 인동꽃 청초하게 피어/ 향기로운 그때// 나라사랑/ 민족사랑/ 평화의 물꼬를 트고/ 무지갯빛 통일의 꿈/ 겨레의 가슴 가슴에/ 포근히 안겨 주신 임이여// 다섯 번/ 험난한 생사의/ 고비를 넘고서도/ 민주주의와 인권/ 통일과 포용의 철학으로/ 용서와 화해를 실천한/ 평화의 대통령// 민주와 통일을 향한 여정/ 남은 자의 숙제로 남기시고/ 비방과 중상과/ 모략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 찬란하게 빛나는/ 주님의 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해같이 빛나소서.’ -김현호의 시 ‘인동초’

‘제주도민은 4.3의 비극을 겪었다. 나는 제주인의 한과 고통과 희망을 같이 하겠다. 나도 용공조작 피해자의 한사람이다. 내가 집권하면 억울하게 공산당으로 몰린 사건 등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겠다.’ -1987년 11월 30일 제13대 대통령선거 제주유세 때

‘제주4.3은 도민만이 아니라 민족전체의 비극이다. 반드시 진상이 밝혀지고 응분의 국가적인 위로가 있어야 한다. 현재 국회의원 154명이 서명해 특위구성 결의안을 내놓고 있으며, 지금은 국회가 정신이 없는 만큼 여유가 생겨 법 문제가 해결되면 이 법을 근거로 모든 것을 집행할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1998년 9월 25일 전국체전 참석차 제주방문 때

1987년 말 제주유세에서 김대중 평민당 대통령 후보는 정치권에서 처음으로 4.3을 이슈화하였다. 1989년 평민당 제주도당 결성식에 참석차 내도했을 때는 ‘4.3특별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새정치국민회의는 1998년 3월 30일  ‘제주도4.3사태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첫 사업으로  5월 7일 제주에서 ‘4.3공청회’를 개최했다. 또 9월 28일 서울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제2차 4.3공청회’를 개최해 보다 구체적인 4.3해법에 대해 논의했다. 

1999년 12월16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하‘제주4·3특별법’으로 약칭)안이 상정된 국회 본회의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김용갑 의원이 '역사에 대한 범죄'라는 과격한 용어까지 써가며 4·3특별법안을 통과시켜선 안 된다고 강변했다. 

박준규 국회의장이 "또 다른 의견이 있느냐?"고 묻자 약간의 웅성거림이 있었다. 박준규 의장은  "제주4·3특별법안이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며 의사봉을 힘차게 두들겼다. 시계는 오후 3시2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특별법 제1조)을 목적으로 하는 제주4·3특별법은 이렇게 탄생됐다. 이어 제주4·3특별법은 2000년 1월 12일 제정·공포됐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주4·3특별법이 그 얼굴을 내밀 수 있었던가? 물론  김대중 정부의 탄생을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다. 당시 국회는 여소야대 상황이었다. 만약에 여당인 국민회의가 먼저 4·3특별법을 치고 나갔더라면, 야당인 한나라당은 어땠을까?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의식과 결단을 꼽을 수 있겠다. 김대중 대통령은 4·3진영 대표단과 극적 면담을 가진 청와대 민정수석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특명을 내린 것이다. 

제주4·3특별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환영 성명이 잇따랐다. 4·3연대회의와 4·3범국민위가 공동으로 환영 성명을 발표했고, 한나라당 제주도지부, 국민회의 제주도지부,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4·3희생자유족회 등이 잇따라 성명을 발표했다. 지역 언론들도 "50년 맺힌 한 푸는 새 역사의 장 열다", "특별법 제정은 도민의 위대한 승리" 등의 제목을 달고 대서특필했다.   

5.16군사쿠데타가 터진 이후 17년간 계속돼 온 침묵은 한 소설가에 의해 깨어졌다. 1978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다. 작가 자신은 군과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 출판된 소설집은 한동안 판금조치를 당해야 했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또다시 4.3이 관심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은 그 무렵 미국학자 존 메릴의 「제주도 반란(The Cheju-do Rebellion)」이나,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등을 복사해 읽었고 또한 전파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4.3진상규명에 있어서 결정적인 초석을 깔았다. 소설 「순이삼촌」이 발표된지 9년만에야 다시 말문이 트인 것이었다. 1987년 말 실시된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가 처음으로 ‘4.3 진상규명’을 공약으로 제시한 것이다. 

제주대학교 총학생회에서는  ‘4.3 대자보’를 부착하며 1960년 4.19혁명 직후 제주대학교의 일부 학생들이 벌였던 진상규명 운동의 맥을 27년 만에 이어갔다. 1988년 제대학생들은 4.3추모기간으로 정해 ‘4.3위령제및진상규명촉구대회’를 가졌고, 서울에서는 제주사회문제협의회 주최로 4.3 학술세미나가 개최됐다. 또 일본에서는 탐라연구회 주최 추모강연회가 열렸다.

1988년 말에는 미국의 존 메릴과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이 각각 제주를 방문해 미군정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을 전개하는 등  4.3논의의 열기가 이어졌다. 1989년 4월 3일을 맞아 제주신문 4.3특별취재반이 기획물 「4.3의 증언」을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고, 5월 10일에는 ‘제주4.3연구소’가 발족됐다. 제주신문은 「4.3의 증언」 연재 외에도 김익렬 장군의 실록유고 「4.3의 진실」을 연재해 미군정 개입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시했다.

1990년 6월 ‘제주도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를 조직했고, 1991년 처음으로 유족들이 주체가 된 4·3사건위령제를 봉행했다. 1996년 3월 신구범 제주도지사가 정부에 대해 4·3사건의 진상 규명을 공식 요청했다. 그 해 11월 12일에는 제주도의회 4·3특위가 ‘국회 4·3특위 구성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했다. 12월 17일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가 넘는 154명의 찬성 서명으로 ‘제주도4·3사건진상규명특별위원회구성결의안’이 발의됐으나, 구체적인 처리 절차를 밟지는 못했다.

1998년 4·3사건 발발 50주년을 앞두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제50주년제주4·3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가 창립됐다. 위령제·국제심포지엄·예술제·종교행사 등이 개최됐다. 

제주 4.3학살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에서 줄곧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였으나, 역대 정부는 이를 무시하였고, 오히려 금기시하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는 발언이 있었다.

1999년 10월 11일 제주출신 3명의 국회의원이 ‘제주4·3사건특별법(안)’을 발표했다. 11월 18일 변정일 외 112인의 발의로 국회에 제출했다. 12월 2일 추미애 의원 외 102인의 발의로 ‘제주4·3사건 특별법(안)’을 제출했다. 12월 7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여·야가 각각 제출한 ‘4·3특별법(안)’을 단일안으로 만들어 국회 본회의에 회부했다. 12월 16일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제주4·3특별법’을 통과시켰다. 본격적인 4·3사건 진상규명운동이 시작된 지 만 10여 년만의 결실이었다. 

2000년 1월 11일 청와대에서 그동안 진상규명 운동에 앞장서 온 유족·시민단체 대표 8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주4·3사건 특별법 제정 서명식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4·3특별법은 인권이 그 어느 가치보다 우선되는 사회, 도도히 흐르는 민주화의 도정에 금자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3년 3월 29일 제주4.3조사위원회에서 보고서를 확정하였고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4.3의 쓰라린 심정이 50년이 넘도록 가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큰 불행한 일 가운데 하나로 역사에서 올바르게 처리돼야 한다. 전국체전 때 4.3대책위원장을 대동하고 가서 제주도민과 제주도지사와 협의해 4.3처리방안을 제주에서 밝히겠다.’-1998년 9월 14일 제주MBC 창사특집 특별대담 때

 

▲ 김대중 대통령, ‘제주4.3특별법.에 서명 2000.1.11.

“김대중·노무현, 제주4.3 획기적 전기 마련”

‘존경하는 제주도민과 제주4·3사건 유족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 55년 전, 평화로운 이곳 제주도에서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중의 하나인 4·3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 몰고 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입었습니다.

저는 이번 제주방문 전에 「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에 의거해 각계 인사로 구성된 위원회가 2년여의 조사를 통해 의결한 결과를 보고 받았습니다. 위원회는 이 사건으로 무고한 희생이 발생된 데 대한 정부의 사과와 희생자 명예회복, 그리고 추모사업의 적극적인 추진을 건의해왔습니다. 저는 이제야말로 해방 직후 정부 수립과정에서 발생했던 이 불행한 사건의 역사적 매듭을 짓고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주도에서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그리고 1954년 9월 21일까지 있었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희생됐습니다. 저는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정부는 4·3평화공원 조성, 신속한 명예회복 등 위원회의 건의사항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비단 그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 노무현 대통령.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분들의 충정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여 보다 밝은 미래를 기약하자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4·3사건의 소중한 교훈을 더욱 승화시킴으로써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확산시켜야 하겠습니다. 화해와 협력으로 이 땅에서 모든 대립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한반도의 평화, 나아가서 동북아와 세계평화의 길을 열어나가야 하겠습니다.

제주도민 여러분께서는 폐허를 딛고 맨 손으로 이처럼 아름다운 평화의 섬 제주를 재건해 냈습니다. 제주도민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이제 제주도는 인권의 상징이자 평화의 섬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전국민과 함께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3. 10. 31 대통령 노무현’
 
2000년 1월11일, 김대중 대통령은 각계 인사를 초청해 공개적으로 제주4.3특별법안 서명식을 갖고 떨리는 목소리로 ‘제주4.3특별법은 인권이 그 어느 가치보다 우선되는 사회, 도도히 흐르는 민주화의 도정에 금자탑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후 4.3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된 것은 노무현 대통령 재직 당시인 2003년 10월이다. 

당시 보고서는 ‘국가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희생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 적절한 명예회복 조치를 취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0월 제주도를 방문,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정부 차원에서 첫 공식 사과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에도 4.3추모제에 참석해 또 다시 사죄했다.

2003년 10월3 1일. 제주4.3 유족과 제주도민들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머리 숙여 사과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진 날이다.

“저는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있었기에 제주4·3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이 재직 당시 제주를 방문,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유족과 도민에게 사과함으로써 4.3의 의미가 격상됐다.

제주4.3에서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은 절대 뗄 수 없는 분들이다. 4.3진상규명 요구를 공개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나 각종 선거에서 4.3진상 규명이 공약으로 빠지지 않았던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덕분이라는 점이다. 특별법 제정과 정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대통령 사과가 있고 난 뒤에도 역사를 되돌리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계속됐다.

 

▲ 2000년 6월 15일 6.15선언 후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이러한 남북관계를 평화와 협력의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저는 98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첫째, 북에 의한 적화통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둘째, 남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도 결코 기도하지 않는다. 셋째, 남북은 오로지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교류협력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한 통일에 이르기까지는 얼마가 걸리더라도 서로 안심하고 하나가 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문 중에서

2000년 12월 11일. 노벨평화상 수상 식장. 군나르 베르게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 위원장은 노벨평화상을 김대중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다며 발표문을 이어갔다. 김대중은 동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기울인 평생의 노력,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노력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라는 말도 덧붙혔다.

김대중은  역사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의 위협을 이겨왔다. 1980년 군사정권에 의해서 사형언도를 받고 감옥에서 6개월 동안 그 집행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는 죽음의 공포에 떨 때가 자주 있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 데는 '정의필승'이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저의 확신이 크게 도움을 주었다.

평화(平和, peace)는 좁은 의미로는 '전쟁을 하지 않는 상태'이지만 현대 평화학에서는 평화를 '분쟁과 다툼이 없이 서로 이해하고, 우호적이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로 이해한다. 인류가 목표로 하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이다.

노르웨이의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그의 저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에서 평화를 직접적인 폭력이 없는 상태인 소극적 평화와 갈등을 비폭력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적극적 평화로 구분하였다.

전통적 의미에서 평화는 ‘전쟁의 부재’, ‘세력의 균형' 상태로 설명된다. 인류 역사상 평화의 시기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거나, 극히 짧았다(30년 전쟁, 100년 전쟁, 그리고 소소한 수많은 전쟁을 고려해 보았을 때). 

그러므로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려면 타인으로부터 공격당하지 않기 위한 전쟁 억지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즉, 소극적 평화는 강자가 폭력으로 약자를 억누름으로써 유지되는 평화, 비판적으로 말한다면 평화유지를 명분으로 약자의 저항을 억누르는 폭력(Pax Romana, Pax Americana)이 소극적 평화이다. 소극적 평화는 약자의 목을 조르면서 "조용히 해. 평화를!"이라고 윽박지르는 가짜 평화이다.

 

▲ 인동초.

‘간디’는 평화를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황이 아니라, 정의가 구현된 상황으로 보았다. 같은 맥락에서 마틴 루서 킹 목사는 "진정한 평화는 단지 긴장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했다. 스위스의 진보적 사회학자인 장 지글러도 테러리스트들의 대부분이 가난과 좌절로 인해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은 빈민출신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평화는 테러와의 전쟁이 아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가 건설될 때에 실현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제주4.3과 미국은 도대체 어떤 관련이 있는가?  미국은 과연 평화의 개념이 존재하는  나라인가? 미국은 과연 제국주의를 영원히 지속할 수 있는가? 최근 미국에서 열린 4.3관련 토론회에 참석한 학자들은 제주4.3에 대해 미국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주4.3은 언제 발생하였는가? 미군정시대에 발생하였다. 해방 당시 미국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관 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그의 포고문을 통하여 “본관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했다”고 하였다. 

미국이 존재하는 것은 오직 ‘팍스 아메리카’, 즉 미국 우월주의이다. 미국은 베트남전에서도 졌으며 한국전쟁도 이기지 못해서, 자존심의 상처를 받았다. 단지 전쟁이 없다는 의미의 평화를 ‘소극적 평화’라고 하고, 이에 반해 행복과 복지와 번영이 보장되어 있다는 의미의 평화를 ‘적극적 평화’라고 한다. 적극적 의미에서 평화란 사회정의의 실현이며, 인권의 옹호와 확대이며, 고통과 궁핍으로부터의 해방과 다름 아니다.

미국은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국가다, 한반도에서도 미국은 못 다 이룬 승리를 얻고 싶어 한다. 한국전쟁에서 승리를 얻지 못함으로써 자존심의 상처를 입은 미국이 오늘날 한반도의 모든 조건들을 제 손 위에 놓고 통제하고 싶어 한다. 남북의 통일과 관련해서 그는 한반도에 지금 필요한 것은 국가의 통일이 아니라 민족의 통일이라며 한국에서는 통일의 개념이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다. 요한 갈퉁의 주장이다.

우리는 분단과 전쟁을 겪고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 안보만을 강조하는 소극적 평화에만 집착해 왔지만, 이제는 탈냉전 시대를 맞아 안으로는 복지 사회를 지향하면서 인간 안보를 중시하는 적극적 평화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밖으로는 무력 통일이나 흡수 통일이 아닌 “평화적 수단에 의한” 통일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바로 김대중은 적극적 평화를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제주4.3의 해결을 위하여 역사와 함께 몸부림을 쳤다. 그래서 우리는 제주4.3을 논의하면서 김대중을 역사의 중심부에 올려놓는 것이다. / 김관후(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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