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와 화무십일홍, 그 쓸쓸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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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꽃을 피우다] (2) 제주성 서문 안 광해의 적소를 찾아 다니다

 

▲ 목관아 마당에 핀 벚꽃이 벌써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 갑자기 기온이 상승하자 벚꽃, 배꽃, 유채꽃이 한꺼번에 꽃을 피웠다. 벌이 꿀을 찾아 유채꽃 속으로 들어왔다.

기온이 갑자기 올라서 벌써 더위를 느낄 지경이다. 겨울에 핀 매화가 꽃잎을 떨어내기도 전에 벚꽃과 복숭아꽃, 유채꽃이 한꺼번에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주변이 온통 꽃 세상이어서 느낌이 화사하긴 한데, 생각해보면 그 화려함도 잠시뿐이다. 화사하던 꽃잎도 결국은 땅에 떨어져 행인의 발길에 밟히는 운명이니 허무할 수밖에.

그래서 옛사람들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 꽃은 10일을 넘지 못한다)이라고 했다. 잠시의 화려함을 자랑도 말라는 표현인데, 지금의 영화에 도취되어 사는 사람들은 새겨 들어야할 계명이다.

화무십일홍에 빠지지 않고 따라다니는 말이 권불십년(權不十年 ; 권력은 10년을 넘지 못한다.)이다. 권세만 믿고 오만방자했던 자들이 종국엔 어김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옛사람들의 단순한 가르침이라도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 광해군과 그 측근들을 생각하면 이 가르침이 더욱 사무치게 다가온다.

▲ 남문로터리 안쪽 KB국민은행 입구에 광해군의 적소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는 적소 자리가 서문 안쪽이라고 했다. 서문 안쪽이 맞는 것 같다.

광해군과 대북세력은 취약한 권력기반을 보완하기 위해 형인 임해군을 목 졸라 죽였고, 영창대군은 배소 안에 가두고 불을 세게 지펴서 말려 죽였다. 그리고 영창대군의 외가를 비롯해 그 주변을 잔인하게 제거했다. 정적을 차례로 제거하면 보위가 안정될 것처럼 보였지만, 믿었던 상궁 김개시와 수비대장 이흥립의 배신이 보위에 결정적 균열을 만들었다. 서인들이 ‘거사’에 동원한 병사는 고작 1000여명에 불과했는데, 변방의 적은 병사로도 권좌는 맥없이 허물어졌다.

봄꽃이 활짝 핀 날 광해군의 유배지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란 ‘화무백일홍 권불십년’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바람 불고 비가 날려 성 머리를 스쳐가는데

드높은 누대에 짙은 안개만 자욱.

창해의 성난 파도 소리 어스름에 들려오니

푸른 산 스산한 모습 가을도 깊어

돌아가고픈 마음, 왕손들 볼 적마다 괴롭고

나그네 꿈속에서도 서울을 보고 놀라네.

고국의 존망 소식도 끊기었으니

물안개 서린 강 위, 외로운 배에서 쉬어나 볼까.

인조실록에는 광해군의 7언율시 '제주적중(濟州謫中 ; 제주 귀양 가운데)'이 전한다. 권좌에서 절해고도의 섬으로 내쫓긴 패자의 비통하고 고독한 심경이 잘 드러난다. 인조 19년에 기록된 걸 보니 숨을 거두기 얼마 남지 않은 시절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 광해군의 장례를 치렀던 관덕정. 광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인조는 예조참의를 급하게 제주로 보내 임금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 옛 제주성 서문이 있던 자리다. 구도심의 정취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다. 근처에서 광해군의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세월이 많이 흐른 지라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남환박물(1704)>에는 광해군의 제주유배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적소는 군인 30명이 돌아가며 당직을 섰다고 했고, 1637년 6월 30일 오후에 나인이 광해군이 중병을 얻었다고 보고하였으며, 7월 1일에는 숨이 끊어져 나인들이 통곡을 했다.

광해군이 숨을 거두자 목사는 삼읍의 수령을 모이게 한 후 서인의 예로 입관하였고, 쾌속선으로 조정에 알렸다. 1월 27일에 장례식을 치르는 일로 예조참의 등이 제주도로 들어왔고, 빈소를 관덕정으로 옮겨 세 읍이 돌아가며 대제를 지냈다. ‘물안개 서린 강 위, 외로운 배에서 쉬어나 볼까’했던 시구처럼, 회한 많은 인생을 뒤로하고 영원한 휴식에 들어간 것이다.

▲ 구도심 골목이다. 문명이 빠르게 변해도 이 일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 길거리 벽화다. 행인의 발길을 멈춰 세운다.

한편, 광해군이 숨을 거둔 지 12년이 지난 1653년에 네델란드 상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타고 가다 제주섬에 표착했던 하멜은 <하멜표류기>에 8월 22일 제주목에서 목사에게 조사를 받은 후, 왕의 숙부가 유배되어 생활하다가 숨질 때까지 지낸 집에 도착했다는 기록했다.

여기서 하멜이 왕의 숙부(실제로는 효종 임금의 큰할아버지)라고 언급한 자는 광해군이다. 광해군의 적소는 군인 30명이 돌아가며 당직을 설 만큼 큰 집이었다. 표류인 36명을 수용할 만한 큰 집이 필요하자,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원진은 마침 비어있던 광해군 적소를 이들에게 내어준 것이다.

그런데 광해군의 적거지를 찾아 가는 도중 난감한 일이 생겼다. 광해군의 기착지를 알리는 행원리 표석과 이형상의 <남환박물(1704년)>에는 그의 적거지가 제주성 서문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광해군의 적거지를 알리는 표석은 남문로터리 안쪽 KB국민은행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광해군은 1641년에 적소에서 숨을 거뒀고,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부임한 시기는 1702년이다. 60여년 세월의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이형상의 기록은 믿을 만 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광해군의 시에 '창해의 성난 파도 소리', '물안개 서린 강' 등의 시구가 나오는데, 이는 남문 근처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취다. 제주성 서문 인근에는 병문천 하류가 바다와 만나는 한두기마을이 있는데, 그 주변에서의 체험이 시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 용연하류의 풍경이다. 용연과 병문천 하류 사이에 한두기 마을이 있다. 광해군의 시에 강과 바다가 나오는데, 이 일대에서 시적 심상을 떠울린 것으로 보인다.

▲ 병문천이 바디와 만나는 곳인데, 서문 가까운 곳에 있다. 서문 인근에서는 이 일대 파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옛 제주성 서문 인근에서 광해군의 흔적을 찾아봤지만, 500년 세월이 지난 뒤라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적소가 있었음직한 자리에는 무속인들이 터를 잡고 행인들에게 길흉화복을 점쳐준다. 어떤 곳에는 잘못 맞히면 복채를 환불해준다는 곳도 있다. 서문 안쪽 골목에서 길을 잃고 여러 시간을 헤매고 다녔다. 건진 것은 근대적 색체가 채 가지지 않은 제주읍의 정감어린 정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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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욱 2014-04-06 07:16:27
이크!! 제가 숫자를 잘못 썼습니다. 광해군이 사망한 해는 1641년이 맞습니다. 1637년은 제주에 들어온 해입니다. 내용을 발췌하다가 실수를 했습니다. 지적에 감사합니다.
119.***.***.109

관찰자 2014-04-05 20:37:50
1637년 6월 30일 오후에 나인이 광해군이 중병을 얻었다고 보고...7월 1일에는 숨이 끊어져 ...서인의 예로 입관...1월 27일에 장례식을 치르는 일로...광해군은 1641년에 적소에서 숨을 거뒀고...<광해군이 죽은 때가 1637년이라는 소리여, 1641년이라는 소리여 ? > 사실관계부터 제대로 정리해야 할 듯.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