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꽃을 피우다] (3) 가시리 충의사, 고려말 예문관대제학 한천을 모신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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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말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한천이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적소터에 청주한씨 문중회에서 충의사를 지어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장태욱

대하드라마 정도전이 날로 인기를 더하고 있다. 드라마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왕조교체기를 배경으로 하는데, 제작진의 철저한 고증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이 바탕이 되어 시청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위기 때마다 전장에 나아가 풍전등화에 놓인 고려를 구했던 최영과 이성계가 요동정벌과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결별하는 장면은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정치에서의 이상과 현실은 최영과 이성계뿐만 아니라 정도전과 정몽주, 심지어는 이성계와 이방원까지도 갈라놓았다. 새로운 사회를 향한 유혹은 늘 짜릿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하고 결과는 허무한 법이다.

여말선초의 혼란기, 옛 왕조에 대한 충성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 사이에서 고뇌와 갈등을 반복했던 당대 지식인의 자취를 찾아 표선면 가시리를 찾았다. 고려말 예문관대제학을 지냈고, 왕조교체 후에 이성계의 제거를 모의하다가 제주에 유배된 서재공 한천의 유허지가 가시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청주한씨 문중회에서 봄을 맞아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 녹산로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힌 적이 있다. 유채꽃이 만발하여 행인들을 기쁘게 한다. ⓒ장태욱
▲ 가시리로 오는 도중 길가 유채밭에 들어갔다. 한폭의 수채화를 연상하게 한다. ⓒ장태욱

가시리로 향하는 녹산로는 일찍이 전국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적이 있다. 이 길은 목장을 가로질러 마을로 들어가는데 길가에 작은사슴이오름(소록산), 큰사슴이오름 (소록산) 등이 있어서 '녹산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1702년(숙종 28)에 이형상 목사가 화공 김남길의 손을 통해 만든 탐라순력도에는 이목사 일행이 조정에 진상할 동물을 얻기 위해 사냥을 열었던 상황을 그린 교래대렵(僑來大獵)이 남아 있다. 소록산과 대록산은 교래대렵의 주요 무대였다.

주말부터 열릴 유채꽃잔치를 준비하는 녹산로는 이미 몰려든 관광객들로 분주하다. 들판은 온통 노랗게 물들인 유채꽃으로 인해 한 폭의 수채화가 되었다. 유채꽃은 바람을 타고 한들거리고, 꽃을 찾아 몰려든 벌떼가 윙윙거린다. 이 길에 서면 가슴 설렘으로 인해 멀미가 날 지경이다.

한천이 제주에 유배된 것은 정도전, 조준, 남은, 배극렴 등이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1392년이다. 이들은 공양왕을 왕자신분인 공양군으로 강등시키고, 원주를 거쳐 간성군으로 유배시켰다.

▲ 청주한씨 입도조 묘역이다. 이곳에 고려말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한천의 묘가 있다. ⓒ장태욱

이때, 한천은 공양왕의 사위 단양군 우성범과 진원군 강회계와 더불어 이성계 제거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왕의 두 사위는 개경에서 참형을 당했고, 한천의 목숨도 풍전등화에 놓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한천의 종질인 한상경이 구명에 나섰다.  

결국 한천은 부인 광산김씨와 두 아들(한말, 한제)과 더불어 제주에 유배되었고, 당시 제주만호 겸 목사였던 유구산의 도움으로 지금의 가시리에 적소를 정했다. 이로서 한천은 조선 개국이후 제주에 유배된 최초의 인물이자 가시리 설촌인이며, 청주한씨 제주 입도조가 되었다.

한천은 조선조 제주에서 마을 만들기 제 1호로 등록한 셈인데, 600여 년이 지난 후 이 마을이 정부에서 공모하는 각종 마을만들기 사업에 응모하여 독보적인 업적을 낸 것도 기막한 우연이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제주에 유배를 온 김만희가 곽지에, 강영이 함덕에 적소를 정한 점이 흥미롭다. 마치 바둑판에 포석을 두는 것처럼 제주의 동남부, 서북부, 동북부 등 섬의 귀퉁이에 차례로 적소를 마련했으니, 유배인들 끼리 교류하는 것을 막고자했던 조정의 의도와 세속에서 벗어나 난세에 화를 면하고자 했던 유배인들의 마음이 이심전심 통했던 것 같다.

한편,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1394년에 간성군에서 삼척으로 이배되었다가, 태조 이성계의 명에 의해 배소에서 두 아들과 함께 교살되었다. 공양왕이 삼척에 머물던 마을은 왕이 머물렀다하여 궁촌이라 불리고, 마을 뒷산에는 왕이 살해되었다고 해서 사랫재(살해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조선조 난세의 비극이 남쪽 제주섬에서 북쪽 삼척에까지 통하고 있다.

▲ 가시리에 있는 충의사에서 청주한씨 제주도 문중회에서 세향제를 지내는 모습이다. ⓒ장태욱

당시 한천이 가시리에 배소를 정할 당시 주변에는 토산, 진사리(지금의 성읍 민속마을)와 안좌리 등이 있었는데, 가시리에 적소를 정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으로 보인다. 조선조 혼란기에 목숨을 보존할 수도 있었고, 이 일대 비옥한 토양에서 식량도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천을 모신 충의사 주변에는 스승밭, 서당밭, 사장터 등으로 불리는 지명이 남아 있다. 한천이 이곳에서 후학들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쳤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제주도 청주한씨 문중회에서는 조선조 이래로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이곳에서 세향제를 지낸다.

1873년 대원군과 맞서다 제주에 유배되어 1년 4개월을 제주에서 보낸 면암 최익현은 해배된 후 제주를 들러보다가 한천의 후손들이 제주에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적이 감격하였다. 그는 당시 한천의 후손들에게 비문을 써주고 새로운 비석을 세울 것을 권하였는데, 당시 비문과 비석이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와 관련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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