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21) 한국판 ‘오스카르 쉰들러’라 불리우는 문형순 

독립군 출신 문형순 경찰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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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라는 거야? / 안 돼// 광복군 출신으로, 친일 군경과 맞짱 뜰 수 있는 배짱과 용기// 너희 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이게 뭐야?/ 부당함으로 불이행!// 말년엔 여느 독립 운동가들처럼 쓸쓸하게 죽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북지십년 만주십년 경찰백지 일자무식 문도깨비 유방백세(流芳百世) 문형순!’

-시인 김경훈의 「부당함으로 불이행」 전문

‘모슬포지서를 모슬포경찰서로 승격시켜 대정· 안덕· 한림면을 관할하게 하고, 성산포지서를 성산포경찰서로 승격시켜 성산· 구좌· 표선면을 관할하게 하였다. 따라서 모슬포경찰서장에는 강문식(姜文植)을 임명하고, 성산포경찰서장에는 문형순(文亨淳)을 임명하였다. 이에 제주경찰서는 제주읍· 애월· 조천면을 관할하고, 서귀포경찰서는 서귀· 중문· 남원면을 관할하였다.’-제주경찰사 92쪽, 102쪽

제주시 오등동 산 11-1번지 평안도민공동묘지 북쪽 울타리 안에는 문형순(文亨淳, 1897~1966)의 묘가 있다. 그의 묘비에는 '故 南平文公亨淳之墓'라고 적혀 있다. 또 좌측에는 '西紀 1897년 1월4일 平南 安州 出生. 1966년 6월20일 死. 一平生 抗日 獨立鬪士 大韓民國 樹立 後 摹瑟浦 城山浦 警察署長 歷任' 이라고 새겨져 있다.
 
1897년 1월 4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 만주 등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으며, 3.1운동 후 만주 한인사회 준 자치정부인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이었으며, 동시에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이었다. 가명 이도일(李道日), 일명 문시영(文時映). 독립운동가는 가명을 많이 썼다.  
 
해방이 되자 월남, 1947년 7월에 제1구경찰서(현 제주서) 기동대장, 동 10월에 경위로 한림지서장이었다.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새로 설치되고,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이 벌어지던 시절 문형순은 모슬포지서가 경찰서로 승격하면서 서장서리(초대 서장)로 임명받아 근무하다가 1949년 10월 19일 경감으로 승진하면서 성산포경찰서장으로 전출하였다. 문형순은 당시 국가 시책이었던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교화와 관할 지역 경비에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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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당시 제주지구토벌대사령관이던 최경록·송요찬·함병선은 모두 일본군에 있었다. 그렇지만 문형순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이었다. 제주지구토벌대사령관들이 양민들을 상대로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수많은 양민을 학살할 당시 문형순은 도민들의 억울한 희생을  막기 위해 주민들을 보호했다. 그래서 예비검속자 총살명령까지 거부했다.

그리고 4.3축성 창안자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서절 중국에 망명, 만주에서 10년, 중국에서 10년을 보낸 후, 경찰에 투신한 뒤 만주에서 마적단(馬賊團)에 응전하기 위해 축성한 경험을 살려 1948년 가을 4.3축성을 제안, 이를 수용하여 마을마다 축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된 주민들에 대한 군 당국의 학살 명령을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며 거부했다. 그래서 성산면 지역의 예비검속자들만은 거의 무사할 수 있었다. 모슬포경찰서 재직 때에도 무고한 희생을 막았다. ‘북지십년 만주십년 경찰백지 일자무식 문도깨비 유방백세(流芳百世) 문형순!’, 제주사람들은 문형순을 그렇게 음률을 맞추어 기억하고 있다. 

1953년 9월 15일 경찰을 퇴직하고, 1966년 6월 20일 제주에서 사망하였으나 가족도 하나 없고 가진 것도 빈손뿐이었으며 아라동 평안도민묘역에 쓸쓸히 묻혀있다. 경찰을 그만 둔 후 무근성에서 경찰에게 쌀을 나눠주던 쌀 배급소에서 일을 했다. 그 후  첫 영화극장이었던 대한극장(현대극장의 전신)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다가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1966년 6월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향년 70세로 후손없이 홀로 생을 마감했다.

국가보훈처가 공개한 독립운동 참여자 명단에도 문형순의 이름이 올라 있다.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사료에서 찾아낸 독립운동참여자 중 유족이 없는 독립운동 참여자 명단 2만1,013명의 이름을 공개하며 그가 독립운동가임을 확인시켜줬다. 그의 별명이 '문 도깨비'였다. 경찰 중에서는 군대에 맞설 수 있는 드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운이 장사였고 배짱 있고 남자다운 멋진 사람이었다.  

현재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김익렬 장군과 함께 문형순 경찰서장, 김성홍 몰라구장, 서청단원 고희준씨, 강계봉 순경, 장성순 경사와 외도지서 '방(方)'경사 등 일곱 명이 4.3당시 무고
한 양민 학살을 막은 의인으로 ‘의로운 사람들(righteous people)’ 전시관에 전시돼 있다. 

이스라엘 정부가 1953년, 나치 독일에 희생당한 유대인들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세운 야드 바셈(Yad Vashem) 기념관 경내에는 ‘의인의 길’이란 것이 있다. 이 길 양편에는 ‘의의 나무’가 심겨져 있다. 이 길과 나무들은 모두 학살기간동안 아무런 조건 없이 유대인들을 도왔던 비유대인들을 기리기 위해 마련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의인의 길’은 모든 방문객이 우선적으로 찾는 곳이다.
 
한국판 ‘오스카르 쉰들러’ 문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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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뜨르 군 비행장터에 있는 전투기 격납고.
‘옳은 일을 옳다고 하는 것/ 옳지 않은 일을 옳지 않다고 하는 것/ 그것이 의(義)다// 그 중간은 없다// 옳은 일을 옳지 않게 하는 것들에 맞서/ 옳지 않은 일을 옳게 만들어간 죽음들/ 그것이 4·3이다// 그래야 살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이 의(義)다’ -시인 김경훈의 「의(義)」 전문

경찰의 한 마디에  죽어갔던 사람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또 한 번  죽음의 아비규환으로 몰아넣었던 '예비검속'의 끔찍한 현장. 아우슈비츠의 집단학살에서 유태인을 구해낸 오스카르 쉰들러(Oskar Schindler)와 비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자수사건'의 주인공 문형순.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제주에서는 학살이 일어나는 동안 죽음의 위협에 내몰린 주민을 구했던 의로운 사람들이 없을까? 독일인 오스카르 쉰들러나 스웨덴 사람 라울 왈렌버그, 일본인 치우네 스기하라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왜 없었을까?

오스카르 쉰들러는 나치정권 당시 수감된 수많은 유대인들을 구출해냈다. 독일 국방군 첩보부와 관계를 맺은 뒤 첩보원으로 활동하다가 반역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주데텐란트 합병으로 인해 사형은 면할 수 있었다. 1939년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하였다. 그는 한 유대계 폴란드인 사업가의 조언을 받고 활발한 사업 활동을 시작했으며, 나치에 의해 탄압받던 또다른 대상인 폴란드인들을 대규모로 고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수많은 유대인들을 구출했으나, 이때의 막대한 지출이 사업 실패로 이어지게 된다. 
 
문형순은  1947년 5월 8일 제주경찰감찰청 경위로 경찰에 투신했다. 1948년 4·3이 발발하자 군과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은 '빨갱이' 의혹을 받아온 '산사람'들과 연루된 주민들을 학살해 나갔다. 11월 17일에는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갔다. 특히 국군 제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였던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다.

1948년 12월 10일 군경은 대정읍 하모리 좌익총책을 검거하고 4·3에 관련된 백여 명의 명단을 압수하였다. 이들은 전원 처형될 위기에 놓였으나 문형순 모슬포경찰서장은 이들에게 자수할 것을 권하였고, 자수자들에게  경찰에 협조할 것을 지시하면서 이들 전원을 훈방하여 백여 명의 귀중한 생명을 구해주었다.  

군과 경찰은 ‘자수하면 살려준다’며 주민들의 자수를 강요했으나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군과 경찰의 탄압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산사람'들이 부모요 형제요, 이웃인 탓에 그들에게 쌀 한 줌, 옷 한 벌 안 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어느 누구도 자수를 하지 않았다. 군과 경찰은 '명단'이 있다며 주민들을 협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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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이 나섰다. 두 사람은 문형순 모슬포경찰서장을  찾아갔다. '주민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 이들은 빨갱이가 아니다. 자수시킬 테니 살려달라'고 부탁하였다. 문형순은 두 사람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결국 1백여 명의 주민이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의 말을 믿고 경찰서로 줄을 져 자수하러 갔다.  
 
사찰주임이 주민들을 보자마자 '전부 다 빨갱이들이다. 다 쏴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서청단원이 조서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 때 문형순 서장이 나타나 서청들에게 호통 쳤다.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냐. 다 나가라. 자수하러 온 사람들이다. 전부 나가라'며 그들을 내쫓았다. 그리고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단장에게 '이들을 민보단으로 데리고 가서 자수서를 써 오도록 해 달라'고 말했다. 문형순 서장은 마을주민들의 조서를 마을서기에게 쓰도록 했다. 
 
며칠 후 주민들은 다시 계엄사령부로 불려갔으나 민보단 자술서와 경찰의 조서를 본 군인들은 '시시하다. 아무런 내용도 없다'며 전부 주민들을 돌려보냈고, 1백여 명의 주민들은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이것이 소위 '자수사건'이었다.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짐개동산. 모슬포지역 주민들이 마련한 위령비와 공덕비가 나란히 서있다. 4·3이 발발해 당시 억울하게 희생됐던 주민들을 추모하는 위령비와 함께 그해 11월 '학살'의 문턱까지 내몰렸던 모슬포 주민 백여 명을 살려낸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이다. 그러나 또 한 명의 주인공 문형순이 빠져 있다.

보도연맹원에서 예비검속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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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카 쉰들러의 나무

‘한때의 과오로 혹은 남로당 혹은 민전 등 좌익계열에 가담하였다가 그의 그릇됨을 깨닫고 속속 전향을 하고 있는데 그 중 거물급으로는 전(前) 민전 조사부장 박우천(朴友千)씨가 요즘 사상전향을 하는 동시에 이를 계기로 전향한 동지 500여 명이 발기인이 되어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고 전국 1만여 명의 전향동지를 중심으로 일대의 국민사상 선도운동의 선봉으로 나서게 되었다는데.........

(중략).........금년 43세로 과거 12년간 민족해방전선에서 일하였으며 신간회 당시에는 동경 조직부책임자로 혹은 노동운동 등을 하였으며 해방 후는 민전 중앙위원으로 전후 70여 회의 검속을 당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동 연맹 취의서(趣意書)를 보면.....(중략).....  민전 산하단체 간부층의 기만적이며 부소(附蘇) 관료주의적, 독선적 독재와 특히 남로당의 살인, 방화, 파괴 등 멸족정책은 마침내 탈당전향자를 매일 수십명씩을 속출하게 함으로써 그 정체가 무엇인가를 천하에 폭로하기 시작되었다.

경향 각 신문을 통하여 보더라도 남로당을 멸족파괴당으로 규정하고 탈당한다는 성명광고가 늘어가고 있지 않은가. 공산주의 사상을 이념적으로 찬동하는 나머지 참가한 결과 그들 간부층의 멸족적 정권쟁탈전에 이용도구로 되었다는데 분개하여 과감한 자기비판과 치열한 자기반성에서 단연 탈당을 천하에 성명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깨끗한 국민으로.......(중략).........정부수립과 남로당의 멸족정책으로 이상과 같이 탈당전향자가 속출하나 차등 전향자, 탈당자를 철저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으로써 멸사봉공의 길을 열어줄 포섭기관이 절대로 요청되는 바 여사한 기관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 나머지 오인은 천학미력(淺學微力)을 무릅쓰고 결사보국의 지성일념에서 감히 전향자 국민보도연맹을 기성(期成)하고저 하는 바이다. 전향자를 무조건 포섭도 무조건 배격함도 절대 금물이 아닐 수 없음으로 전향.......

(중략)........, 정치는 어디까지나 정치로 투쟁할 것이요, 사상은 사상으로 투쟁하여 상대방을 극복시켜야 할 것이다. 이제 본 연맹으로 하여금 전문적 연구를 적극적으로 하여 과학성에 입각한 논리정연한 이론으로 전향탈당자 뿐만 아니라 일반국민까지라도 언론으로, 기관지 등으로 일대 국민운동을 일으켜 민족의식을 고도로 앙양시키는 동시 광범위한 당해 대중의 조직을 통하여 상대방을 압도할 것이요, 남북로당 노선이 멸족적인 사실에 비추어 과거 과오를 범한 동포들에게 체계있는 이론으로 설복하여 대한국민으로서 멸사봉공의 정신태세에 적극 노력하여 멸족당인 남북로당 계열의 근절을 기하는 바이다.

△국민보도연맹 강령/ 1. 오등(吾等)은 대한민국 정부를 절대지지 육성을 기함  1. 오등은 북한 괴뢰정부를 절대반대 타도를 기함   1. 오등은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분쇄를 기함   1. 오등은 이론무장을 강화하여 남북로당의 멸족파괴 정책을 폭로 분쇄를 기함  1. 오등은 민족진영 각 정당․사회단체와는 보조를 일치하여 총력단결을 기함’-동아일보 1949년 4월 23일

‘국민보도연맹에서는 관계 당국의 후원을 얻어 지난 10월 25일부터 11월 말까지를 좌익계열 개전자 포섭 주간으로 설정하여 좌익계열 포섭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중, 지난 27일 현재로 남한 각지에서 자수하여 온 좌익분자는 무려 3만99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1일 이(李) 치안국장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공산도배의 모략에 빠져 본의 아닌 범죄를 감행하고 고민 중에 있는 동족과 기타 과오를 청산 전향을 자원하는 자에게 같은 혈족으로서의 구출의 문을 열어주기 위하여 지난 10월 25일부터 전향자 자수 주간을 설정하였던 바......(중략)..... 11월 27일까지 각 경찰국으로부터 내무부에 보고된 전향자 수는 서울 1만 2196명, 경기 5964명, 강원 4978명, 충북 3512명, 충남 1054명, 경북 1938명, 경남 2143명, 전북 1660명, 전남 115명, 제주 5283명, 철도 143명, 계 3만9986명 거대한 성과를 보았으며 기간 종말일인 11월 말일까지는 더욱 큰 성과가 있을 것을 확신할 뿐 아니라, 전기 전향 자수자중 서울특별시와 경기도를 제외한 각 도의 전향 자수자는 그 대부분이 폭도, 소위 야산대(野山隊)로서 활동하던 자이었음을 볼 때에 더욱이 본 기간을 설정한 취지가 민족사상 정화와 공산 분자 등에 대한 일대 경종이 되었을 것인 반면 앞날의 치안확보에 대하여 큰 자신을 가지게 되는 것을 감히 언명하는 바이다.”(같은 기사 국도신문․자유신문․조선일보 49. 12. 2)’-서울신문 1949년 12월 2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과 반정부혐의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예비검속에 내몰렸던 '국민보도연맹원'은 제주도에 27,000여명이 있었다.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 1949년 6월 5일 준비모임을 거쳐 6월 5일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됐다. 1950년 8월 17일 제주도 현지 상황을 조사했던 주한미국대사관 직원이 남긴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등록된 국민보도연맹 회원 27,000명과 과거 반란사건 시기와 그 후에 공산주의자로서 피살된 사람들의 친척 약 50,000명이 제주도에 잠재적인 파괴분자로 존재하고 있다. (Memorandum for the record, Subj.:Conditions on Cheju Island, John P. Seifert, Naval Attache, Donald S. MacDonald, Third Secretary of Embassy, Philip C. Rowe, Vice Consul, Aug 17, 1950.)
 
제주지역은 4·3을 거치면서 주민들은 대부분 희생되었기 때문에 새삼스레 보도연맹을 조직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데도 27,000명이라는 연맹원 수는 무엇을 의미할까. 1949년 11월 말 현재 제주지역에서 5,283명의 전향자를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놓았다. 서울 12,196명, 경기5,964명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수를 자수시켜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수는 계속 증가하여 1950년 6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27,000명의 연맹원을 기록했다.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지역에 또다시 3만명에 가까운 관리 대상자가 왜 필요했을까.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소위 '좌익활동' 전력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과거 인민위원회 간부, 3·1사건 관련자, 4·3사건 관련 재판을 받았거나 수형 사실이 있는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 됐다. 그러나 대동청년단 위원장이나 마을 구장 등 군 경에 우호적인 사람들까지 과거 전력이 있으면 경찰이 강제적으로 가입시켰다. 
 
제주도내의 예비검속은 당시 제주경찰서, 서귀포경찰서, 모슬포경찰서, 성산포경찰서 등 각 경찰서 별로 이루어졌다. 경찰당국은 예비검속자를 A, B, C, D로 등급을 매겨 분류했는데, 가장 심각한 자들은 D등급으로 분류했다. 1950년 8월에 제주지역 주둔 군경은 예비검속자들을 대대적으로 집단 총살했다. 집단 총살을 당한 자들은 주로 C급과 D급에 속한 자들이었다.
 
제주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자에 대해 두 차례의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다. 첫 번째 학살은 8월 4일에 제주항에서 알몸차림의 수감자 500여 명을 태운 배가 바다에 나갔다가 두 시간 정도 지나서 빈 배로 돌아왔다. 두 번째 학살은 8월 19일 밤부터 20일 새벽 사이에 자행되었다. 당시 수백 명의 수감자가 트럭에 실려 현 제주국제공항이 들어서 있는 '정드르'에서 총살된 후 집단 암매장되었다고 증언했다.
 
서귀포경찰서 관할 예비검속자들의 희생일은 7월 29일이다. 서귀포 수용소 수감자 150명 정도가 밖으로 끌려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수감자들 중 일부는 8월 12일에 제주도 경찰국으로 이송되었는데, 제주읍 수감자들과 함께 '정드르'에서 총살당했다.
 
모슬포경찰서 예비검속자들은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와 한림지서 관할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되어 있었다. 두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자들은 1950년 8월 20일 새벽에 송악산 '섯알오름'에서 총살되었다. 같은 날 새벽에 같은 장소에서 총살되었다. 모슬포 수감자들과 한림 수감자들은 약간 다른 위치에서 총살을 당했다. 유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려 했지만 군인들이 제지하여 수습하지 못했다. 1956년에 이르러서야 유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하여, 한림에 수감되었던 자들의 시신은 금악리 '만벵디 공동묘지'에, 모슬포에 수감되었던 자들의 시신은 상모리 586-1번지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址)에 안장하였다.
 
한편, 성산포 경찰서에서는 당시 경찰서장이었던 문형순이 군의 총살지시를 거부하여 대규모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문형순은 수감자들에 대해 집단 총살을 강요하는 해병대의 지시에 대해 '부당하므로 불이행'이라고 써서 지시를 거부했다.  문형순은 C급(4명)과 D급(76명)으로 분류된 자들 중 6명만 군에 넘겼는데, 이들은 7월 28일 서귀포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이들 6명은 7월 29일 새벽에 서귀포 경찰서 수감자들과 함께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광란의 집단살인이 중지된 것은 1950년 9월의 일이다. 당국은 심사를 통해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 198명, 서귀포 경찰서 수감자 120명, 모슬포경찰서 수감자 90명, 성산포 수감자 198명을 석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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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3 사건 당시 서북청년단 특별중대가 주둔했던 성산초등학교 건물.

2007년 8월부터 제주비행장에서 제주4·3 피해자 유해 및 유류품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발굴팀은 "남북활주로 서북쪽 지점에서 4·3사건 당시 민간인들을 총살하고 암매장했던 길이 32.4m, 폭 1.2-1.5m, 깊이 0.9-1.2m의 구덩이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발굴된 지점에서 유골과 유품을 확인함으로써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정드르에서는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 이외에도, 4·3과 관련해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을 선고받은 249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1949년 진압군에 의해 집행되었다.
 
예비검속 학살 거부하다

‘1950년 음력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그날 밤/ 우리들은 한도 많은 이 길을/ 서로 얼싸안고 떠나갔노라// 이승 사는 동안/ 부모님께 효도 한 번 못하고/ 무덤 하나 남겨두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떠났노라// 우리들이 말 못한 말들이사/ 살아있는 그대들인들 어찌 모르랴/ 그대들의 가슴깊이 묻어두었다가/ 아들손자들에게도 전하여다오// 아름다운 우리고장 제주도가/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는/ 진실로 평화로운 섬이 될 수 있도록/ 서로 손을 잡고 굳게 약속하여 다오’- 시인 양중해의 ‘떠나가는 자의 소원’

‘나머지 예비검속자들에 대해서는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이 군의 총살 지시를 거부함으로써, 상당수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즉 앞에서 보았던 제주 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 중령 김두찬이 1950년 8월 30일 성산포경찰서에 내린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에서 확인되듯이, 문형순 서장이 직접 ‘부당함으로 미집행’이라고 하여 거부하였던 것이다.’ -제주4.3사건진상보조사고서 434쪽

문형순은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검거하라’는 이른바 예비검속 사건 속에서 명령을 거부하고 주민들의 희생을 최소화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내무부 치안국장은 각도 경찰국장에게 전통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경계의 건」을 발하고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및 ‘요시찰인’들을 예비검속하도록 지시했다. 

1950년 8월 17일 당시 제주도 내 4개 경찰서에 예비 검속된 자의 수는 1,120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7월 29일, 8월 4일, 8월 20일에 각각 서귀포, 제주항 앞 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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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예비검속에 의한 섯알오름 양민학살터 안내판.
1950년 8월 20일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은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에게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공문을 보낸다.

‘해정참 제16호/ 단기4283년 8월 30일/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직인)/ 성상포경찰서장 귀하/ 예비구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 수제건에 관하야 본도에 계엄령 실시 이후 현재까지 귀서에 예비구속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하여는 귀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자이 의뢰함.

김두찬은 이 문서에서 "귀서에 예비구속 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서는 귀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CIC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이에 의뢰함"이라며 총살집행을 명령했다.

그러나 문형순 서장은 공문의 ‘성산포경찰서장 귀하’ 옆에 “부당하므로 불이행”이라 직접 쓰고 날인해서 끝까지 거부했다. 제주도 전역에서 수천 명이 죽어간 예비검속에서 성산면 지역의 예비검속자들만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던 문형순의 '용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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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비검속 총살집행에 관한 서류. 우측 상단에 [不當함으로 不移行]이라는 문형순장의 서명이 보인다

당시 성산포경찰서 관할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희생당한 사람은 모두 6명이었다. 이는 문형순 서장이 불가피하게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으며, 읍면별로 수백 명씩 죽음을 당했던 다른 지역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성산면 지역은 거의 온전할 수 있었다. 모슬포〈백조일손〉사건은 대표적인 예비검속 집단 학살사건이었다. 그렇지만 계엄사령관의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을 문형순 서장이 거부한 것이다.
 
문형순 서장은 제주도민들의 억울한 희생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모슬포 주민들을 보호했고, 성산포경찰서장 당시에는 계엄사령부의 예비검속자 총살명령까지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독립군 출신의 말로가 대부분 그렇듯이 문형순 역시 비참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전쟁이 종식되어 갈 즈음 4·3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1952년 제주도 경찰국은 100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 한라산 기슭 곳곳에서 무장대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다. 1953년 1월 대유격전 특수 부대인 무지개부대(부대장 박창암 소령)가 한라산 작전 지역에 보강 투입되었다. 이제 재산 무장대는 극소수에 불과하게 되었다.
 
1954년 9월 21일 제주도 경찰국장 신상묵은 한라산 금족(禁足) 지역을 해제, 전면 개방을 선언하였다. 지역 주민들이 담당했던 마을 성곽 보초 임무도 없어졌다. 소개되었던 중산간 마을에 대한 복구 및 이주·정착 사업이 전개되었다. 1957년 4월 2일 최후의 무장 대원 오원권이 구좌면 송당 지역에서 생포되면서 4·3은 종식되었다.
 
2003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확정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 진압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문형순은 제주에서 전권을 갖고 있던 제 1인자가 아니었다. 그의 위에는 학살을 명령하고 재촉하던 상관이 있었고, 그의 옆에는 또 다른 명령계통에 서서 학살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둘러있었다. 그의 관할구역 내에서 일어난 학살의 책임을 모두 그에게 전가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는 자신의 손과 팔이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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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 오등동 제주평안도 공동묘지에 자리한 문형순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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