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25) 이번 선거는 특별자치도를 바로 세우기 위한 선거

이제 곧 농지마저 부동산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다

지구 위에서 벌어지는 지배와 피지배 권력과 경제의 문제는 농업혁명이 일어난 신석기시대 이래 결국 땅의 문제였다. 최근에 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 사극 ‘정도전’이라는 드라마에도 600여 년 전의 땅과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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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정도전’의 한 장면. 왼쪽이 조선개국의 설계자 정도전, 가운데가 나중에 개국공신이 되는 신진사대부 윤소종, 오른쪽이 과전법이라는 전제개혁의 주인공 조준이다. 이들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주도한 신진사대부의 핵심들이다.(2014. 4. 12. 방영분)


정도전과 윤소종이 조준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사택에 걸린 지도그림에 대해 궁금하다고 정도전이 묻자, 조준은 전국의 토지소유관계를 알 수 있는 지도라고 설명한다. 그 지도 위에 걸어놓은 ‘목패’ 중 황색은 나라가 소유한 공전, 청색은 자작농이 소유한 사전, 적색은 권문세가들의 사전이라고 설명하는데, 지도는 적색목패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에 정도전이 “백성들이 송곳 하나 꽂을 땅조차 사라져 버렸군요.” 하자, 조준이 “땅이 사라지자 백성들도 사라지더군요. 4년 전 노상에서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맬 때 돌보아 준 농부가 있었는데, 1면 뒤 가보니 보릿고개 때 빌린 곡식을 갚지 못해 전답을 빼앗기고 소작쟁이가 되었고, 1년 뒤엔 노비가 되었고, 1년 뒤엔 야반도주하여 산적의 무리에 끼었다가 얼마 전 관군에 붙잡혀 효수되었습니다.”라고 한다.

동행했던 윤소종이 “권문세가 지주들의 탐욕이 부른 참극일세.”라고 말하자 조준은 “인간의 탐욕 이전에 제도의 문제였습니다. 사사로이 땅을 사고팔게 만든 고려의 사전제도가 원흉이란 말입니다.”라고 한다. 이에 정도전이 “지주도 없고 소작도 없고 제 땅에서 땀 흘려 일하는 자작농의 시대를 원합니다.”라고 한다. 소위 여말선초의 과전법(科田法)이라 불린 전제개혁((田制改革)의 기원이 되는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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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속의 600년 전 토지소유지도와 현재 제주도의 토지소유지도가 무엇이 다를까? 우리나라의 자본가들은 현대판 귀족이 아니던가? 붉은색의 목패가 꽂힌 곳이 사전제도로 땅을 장악한 귀족들의 토지들이다.


이 드라마의 짧은 대목 중에 부동산투기의 문제를 인식하는 다른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땅이 사라지자 백성도 사라지더군요.”라는 표현처럼, 토지 특히 농토와 집터는 농민과 주민들의 마지막 보루다. 예나 지금이나 토지가 없어지면 주민들도 없어지는 것이다. 최근 천정부지로 오르는 땅값은 FTA로 인해 농사로 먹고살기 막막한 농민들에게는 그나마 천재일우의 기회처럼 여겨져 농토를 내놓는 집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더욱이 쇼핑하듯이 땅을 사대는 중국인들에게 이런 땅들을 시시콜콜 찾아내어 거간비를 챙기는 부동산 소개업자들에게는 얼마나 좋은 시절일까?

하지만 땅을 팔아 도시의 아파트로 이전한 뒤 남은 돈을 생활비로 탕진하면, 다음 세대가 실업자가 되어 그 가계를 유지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면, 결국 비정규직의 싸구려 일자리로 연명하다가 집도 없이 전세로 월세로 전전하다가 도시의 하층민으로 전락하게 된다면? 결국 21세기의 농부 역시 600년 전 조준이 말한 농민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 조준은 “이는 가진 자들의 탐욕의 문제 이전에 제도의 문제”라고 했다. 바로 2008년 7월 전국적으로 최초로 제주지역 농업진흥지역제도를 해제해 버린 것과 같은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제주도지사에게 권한이 이양되자마자 제주특별자치도는 국제자유도시를 위해 규제를 완화한다며 이 농업진흥지역을 해제해 버린다. 농업진흥지역제도는 1990년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의 제정에 의해 1992년 12월 지정 고시 운용되어 왔던 제도로, 농업진흥구역과 농업보호구역으로 구분됐다. 이 구역 내에서는 농업관련 행위 이외엔 ‘행위제한’을 두어 농지를 보존하고 농업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였다.

그런데 특별자치도로 바뀌면서 이 해제 권한이 도지사에게 이관되었고, 도지사는 몇몇 농민들의 해제 요구를 핑계 삼아 전국에서 처음으로 얼른 해제해 버렸다. 이제 이 구역 내의 토지소유주들은 돈만 되면 언제든 농지를 팔아 치울 수 있고, 부자들은 돈만 있으면, 농지든 대지든 상관없이 게걸스럽게 땅을 사들일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콘도도 짓고 리조트도 지어 분양하는 부동산업이 활개를 칠 것이다. 하지만, 부동산업이야말로 도박 다음으로 부도덕한 업종 아니던가?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아닌, 개발이익에 따른 잉여수익과 부동산 붐에 따른 시세차익 등이 이 업종의 중요한 생산성 아니던가?

이러한 조치 뒤에 ‘투자자이민제도’라는 것을 작동시키자 곧바로 제주지역의 부동산투기열풍이 격발된 것이다. 그것도 정부의 주도하에 말이다. 생물권보전지역이나 녹지보전지역의 부동산 투기 제한 조치가 강력해지면, 이번에는 농지들이 대상이 될 것이다. 시기도 절묘하다. 농산물에 더욱 타격이 큰 한중 FTA가 마침 타결된 상태다. 생각 있는 농민들은 더 이상 농사로 삶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며, 이어서 농업포기 농가들이 속출해나갈 것이다. 그다음은 고려시대 토지잠식과 같은 과정을 밟게 될 것이다.


고도의 자치권을 구현한 세계의 섬들

‘1국 2체제’, 얼핏 들으면 마치 독립하자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이미 이러한 체제는 세계적 차원에서는 현실적인 제도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이념이 다른 사회체제인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중국과 홍콩, 마카오가 그러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념이 다른 2체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제주섬의 운명을 제주도민 “스스로 선택하고 영위할 수 있는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체제가 왜 필요한가? 제주는 섬이라는 환경적 여건으로 인해 ‘성장의 한계시대’ 또는 ‘한계초과’의 상황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원의 관리와 자본 규모의 경쟁력에서 그러하므로, 스스로 자율적인 조절과 공동체적 사회체제가 시스템화되지 못하면, 섬의 자원 수탈은 물론, 본토에 내부식민화될 확률이 매우 높다. 이미 제주는 대자본의 공략에 의해 식민의 내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이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자치도들은 어떤가 간략하게 살펴보자.

스페인의 마데이라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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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데이라 제도(포르투갈어: Madeira)는 북아프리카 연안의 북대서양에 위치한 포르투갈령의 화산제도이다. 포르투갈의 해외령인 마데이라 제도의 행정상 공식 명칭은 ‘마데이라 자치주(Região Autónoma da Madeira)’로, 사람이 사는 ‘마데이라 섬(Madeira)’과 ‘포르투산투 섬(Porto Santo)’, 무인도인 ‘데제르타 제도’와 ‘셀바젠 제도’로 이루어져 있다. 인구는 마데이라 섬 25만 명(2007년), 포르투산투 섬 4326명(2006년)이다. 마데이라 제도는 북아프리카 대륙의 해안에서 서쪽으로 360마일 정도 떨어져 있으며, 리스본에서 535마일, 그란 카나리아 제도에서는 230마일 떨어져 있다. 아조레스 제도의 산타 마리아에서는 480마일 떨어져 있다. 주도는 푼샬(Funchal)이다.

포르투갈의 지방자치제도는 헌법 ‘제VII편 자치지역(Regioe Autonomas)’과 ‘제VIII편 지방자치단체의 권한(Poder Local)’에 규정되어 있다. 포르투갈 헌법 제VII편(Regioe Autonomas)의 자치지역에 관한 규정은 마데이라(Madeira)와 아조레스(Azores) 자치주에 관한 특례를 규정하고 있고, 제VIII편 지방자치단체의 권한(Poder Local)에 관한 규정은 포르투갈 본토의 지방자치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다.

포르투갈 헌법 VII편(자치지역), 포르투갈 헌법 제225조(아조레스와 마데이라의 정치ㆍ행정적 지위)
1. 지리적ㆍ경제적ㆍ사회적 및 문화적 특성과 지역주민들의 자치에 대한 역사적 열망에 근거하여 아조레스와 마데이라 제도에 대해 특별한 정치ㆍ행정적 제도를 둔다.
2. 지역자치는 지역시민들의 민주적 참여, 그들의 경제적ㆍ사회적 발전, 지역적 이익의 옹호ㆍ촉진, 국가적 통합과 모든 포르투갈인들의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을 추구한다.
3. 지역적인 정치ㆍ행정적 자치는 국가의 완전한 주권을 훼손하지 않으며, 이 헌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진다.

포르투갈은 1974년 군사혁명에 의해 포르투갈 민주화가 시작되었으며,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헌법제정 과정에서 마데이라 지역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포르투갈 헌법에 ‘마데이라’와 ‘아조레스’에 관한 ‘자치권의 특례’가 명시되기에 이른다. 1978년 ‘마데이라’와 ‘아조레스’에서 주정부와 주의회를 정식으로 출범시켜 자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이후에 몇 차례에 걸친 헌법 개정을 통해 마데이라와 아조레스의 자치권은 강화되어 왔다.

그에 따라 「마데이라의 정치 및 행정에 관한 법률」과 「아조레스의 정치 및 행정에 관한 법률」도 개정되어 왔다. 이러한 자치법률들은 자치주의 의회가 개정안을 만들어 포르투갈 국회에 상정하고 협상과정을 거쳐 국회를 통과하면 효력을 갖게 된다. 지난 2004년 제6차 헌법 개정으로 자치권은 한층 더 강화되게 되었다.(김순은)

마데이라는 현재 국방․외교․세관․치안․사법 이외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자치권을 누리고 있다. 1977년 자치권 행사를 위해 ‘마데이라의 정치ㆍ행정적 지위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으며, 이 법률 제5조에서는 “마데이라 제도는 헌법이 정하는 범위 안에서 정치, 행정, 재정, 조세상의 자치권을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법률 제36조 및 제37조에 의해 마데이라 자치주 의회는 ‘정치적 권한’과 ‘입법권’을 가지고 있고, 같은 법률 제69조에 의해 자치정부는 ‘자치법령 입안’, ‘자치주 예산편성권’을 가지고 있다.

마데이라의 자치는 3계층이며 주의회, 시ㆍ군의회, 동의회를 두고 있다. 「자치지역 재정법」도 제정되어 있다. 마데이라의 경우에 자체재원이 70%, 국비와 EU지원금이 각 15%이며, 2005년 예산은 15억 유로 규모이다. 자치지역 내 모든 국유토지를 중앙정부로부터 이양받았고, 자치지역 내에서의 국세징수액은 전액 마데이라에 귀속시키고 있다. 국세의 세율감면권한도 자치정부가 행사할 수 있다. 마데이라와 아조레스 자치주 의회는 자치지역에 한하여 적용되는 법률을 포르투갈 국회에 제출할 수 있으며, 자치주 의회가 상정한 법률(안)을 국회가 거부 또는 수정할 경우 국회는 의견을 요구하기 위하여 이를 해당 자치주 의회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자치주 의회로부터 의견을 접수하는 즉시 국회는 법률(안)을 표결로 부쳐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마데이라 주지사는 명칭이 ‘President’로 표시되며, 실제로 주민들도 ‘마데이라 대통령’이라고 부르고 있다. 마데이라에서 선출되는 포르투갈 국회의원 수는 6명이다.

포르투갈 헌법 제6조에서는 “아조레스와 마데이라 제도는 그들 자신의 정치적ㆍ행정적 법률을 가진 자치지역을 구성하고, 그들 자신의 자치정부기관을 갖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마데이라와 아조레스에 관한 배려는 포르투갈 헌법 곳곳에 나타나 있다. 포르투갈 헌법 제9조에서는 국가의 기본적 책무로서 “전체 영토의 조화로운 발전을 증진시킴과 함께, 아조레스와 마데이라 제도에 대해서는 변방에 있는 섬 지역이라는 특성을 감안한 특별한 배려”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주대 법과정책연구소,《제주특별자치도의 헌법적 근거마련 방안 연구》.2008)

핀란드의 올란드 제도

올란드 제도(스웨덴어: Landskapet Åland 란스카페트 올란드)는 발트 해 북쪽 보트니아 만 어귀에 자리 잡은 제도이자 핀란드의 자치령이다. 주도는 ‘마리에함(Mariehamn)’이며 핀란드어권에서는 ‘아흐베난마 제도(핀란드어: Ahvenanmaan maakunta 아흐베난만 마쿤타)’라고 부른다. 핀란드 영토이지만, 공용어로 스웨덴어를 사용한다. 핀란드에서 면적이 가장 작은 지역이며 핀란드 전체 인구의 0.5%(2008년 추산 27,210명), 넓이의 0.49%(13,517㎢)를 차지한다.

올란드 제도의 주 섬은 ‘파스타 올란드(Fasta Åland)’이며 인구의 90%가 이곳에 거주한다. 6500개 이상의 암초와 섬들로 구성된 동쪽 제도로 이루어져 있다. 파스타 올란드는 스웨덴 해안에서 서쪽 오픈 워터(open water)의 40킬로미터까지 구분된다. 동쪽의 올란드 제도는 사실상 핀란드의 다도해와 인접해 있다. 올란드 유일의 내륙 국경은 스웨덴과 국경을 공유하는 메르케트(Märket) 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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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란드 제도의 위치.


올란드 제도는 스웨덴과 핀란드 간의 영토분쟁을 거쳐 확립된 것이다. 핀란드의 자치는 1921년 국제연합의 결정에 의해 확립되었다. 당시에 국제연합은 올란드 제도가 핀란드의 영토에 속하되, 자치권을 부여받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올란드 제도의 자치권은 핀란드 헌법과 1920년에 핀란드 의회에서 통과된 ‘올란드의 자치에 관한 법률’에 의해 보장되었는데, 올란드 제도의 자치권은 핀란드의 EU 가입 시에 재확인되기도 했다. 올란드 제도는 핀란드 헌법에 근거를 둔 자치지역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기 때문에 핀란드의 다른 지역에 비해 폭넓은 자치권을 누리고 있다. 법에 의해 정치적으로 중립이고, 완전한 비무장지역이며, 주민들은 핀란드의 병역의무 및 핀란드 방위군 복무 의무 등이 면제되었다. 또한 올란드 제도는 독자적인 국기를 가지고 있고, 우표도 자체적으로 발행하고 있으며, 자치경찰도 운영하고 있다. 올란드 제도는 핀란드 의회에 한 명의 대표를 선출하고 있다.(《위키백과》, 《제주특별자치도의 헌법적 근거마련 방안 연구》)

이렇듯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받은 섬들이 있다. 거의 1국 2체제에 가까운 자치권을 누리고 있는 곳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눈앞에 보이는 땅투기 열풍 하나 스스로 방어해 낼 자치권조차 확보하지 못하면서 ‘특별자치도’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는 셈이다. 속된 말로 “자치는 무슨 얼어 죽을 자치인가?”


진정한 특별자치도의 실현을 위한 전제, 헌법 개정

‘특별자치’는 개념 그대로 이해하면, 한 국가 안에서 특정한 지역에 대해 다른 지역과는 차별성 있는 특별한 자치권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단일국가인 경우의 특별자치란, 연방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 국가 내에서 특정한 지역에 대해 차별성 있는 지위를 부여하거나 고도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연방국가가 아닌 단방국가(Unitary State) 체제하에서도 특정 지역에 대한 자치권의 특례를 헌법에서 인정하는 예는 앞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유럽에서는 다수 찾아볼 수 있으며, 유럽 이외에서도 단일 국가 내에서 자치의 특례를 인정하고 있는 경우로 대표적으로 홍콩특별자치도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특별자치’는 지방자치단체의 법적 지위, 조직형태, 자치권의 범위에 있어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 미국, 스위스, 독일, 영국 등 외국의 경우에는 지방자치단체의 법적 지위, 조직형태, 자치권의 범위에 있어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경우들이 많다. 또한 지방자치단체의 조직형태와 관련해서도 다양한 기관구성 형태를 인정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우리는 상대적으로 획일적이고 경직된 지방자치제도 운영하고 있다.

권한이양 작업에 있어서도 어려움에 부딪히고 있음. 현재 1단계, 2단계 제도개선작업이 마무리되고 3단계 제도개선이 추진되고 있지만, 권한이양 방식은 개별적ㆍ열거적인 권한이양방식을 취하고 있음. 즉, 일일이 이양하고자 하는 권한의 근거 법조문을 나열하면서 개별적ㆍ열거적으로 이양을 하고 있음. 그러다보니 제주특별자치도법은 400여 개 조에 달하는 복잡한 법률이 되었고, 하나의 조문도 매우 복잡한 구조를 취하고 있음. 또한 개별적·열거적으로 이양하는 과정에서 사후에 미흡한 점이 발견되더라도, 다시 법률을 개정하지 않고서는 보완할 길이 없음. 앞으로 제도개선 작업이 이루어지면 더 많은 권한이 이양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주특별자치도법의 조문 수는 더욱 증가하고 법률의 체제는 더욱 복잡해질 것임. 또한 법조문의 형식도 예외를 인정하고자 하는 법률의 조문들을 일일이 열거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이 이해하기에는 매우 난해한 법률이 될 수밖에 없음. 따라서 현 상황에서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출범취지를 실현하기 어려움. 이렇게 해서는 연방국가의 주 수준의 자치권 보장은 현실화되기 어려우며,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함. 이러한 변화는 헌법 개정의 문제와 연결됨.(제주대 법과정책연구소,《제주특별자치도의 헌법적 근거마련 방안 연구》.2008)

위 인용문에서처럼, 결국 특별자치도의 완성을 위해서는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을 통해, 포괄적 특별자치도의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인 것이다. 제도 개선 때마다 기획재정부 등 해당 부처는 타 지역과의 형평성 등을 이유로 번번이 반대 입장을 고수, 제도개선 핵심과제가 반영되지 않으면서 정부가 오히려 제주특별자치도의 발목을 잡는 일이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

현재 법률의 수준에서만 제도화되어 있는 특별자치도의 불안정한 위상으로는 애초의 입법취지인 “외교 국방 사법을 제외한 연방국가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한다.”는 특별법의 입법 취지마저 무색해지고 말 것이며, 또한 지속적으로 특별자치도의 권한과 지위와 관련해서 문제를 양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외교, 국방, 사법 이외의 권한을 전면 이양 받는 것은 물론, 앞의 외국의 두 사례에서 보았듯이, 헌법 개정을 통해 헌법에 특별자치도의 지위와 성격 등을 명시해야 비로소 제도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의 애향심과 단결력이 부족한가? 아니다. 다만, 오랜 중앙집권의 역사 속에 상상력이 빈곤한 것이다. 낙하산 특별자치도 지정을 받으면서, 준비된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지방자치단체측의 아직까지의 한계이기도 하다.

앞의 두 사례는 변방이기에 오히려 특례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 특례들은 온전히 두 ‘제도(諸島)’의 주민들의 삶을 위한 특례들이다. 그러나 오늘 제주도에 주어진 특례들은 주민들이 아닌 개발주체들과 외지자본에 관대한, 어쩌면 수탈의 특례들은 아닌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속 터질 노릇이다.

그러므로 이번 선거는 단순히 도지사의 세대교체나 민선공무원도지사시대에서 민간도지사시대로의 진입이라는 의미를 넘어, 진정한 자치도의 실현이라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즉, 이번에 도지사를 할 사람은 좋든 싫든 누구를 위한 자치도인가를 검증해내고 제주도민을 위한 자치도로서의 ‘자치도 바로 세우기’라는 과업을 수행할 자라야 한다.

제주특별자치도는 2006년 7월에 출범했지만, 그 출범을 담당한 자들이 자치도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 가능성과 목표를 제대로 인식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저 오랫동안 지방자치에 관심을 가져온 소위 대한민국의 ‘비주류’ 출신 대통령에 의해 도발된, 미리 온 역사적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철저한 중앙집권과 소위 메인스트림의 나라에서 평화와 자치를 구현하는 특별자치도를 임기 내에 시작하고 싶었던 매우 독특한 한 대통령,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하늘에서 던져진 그야말로 ‘낙한산 자치도’를 얼떨결에 받아 안은 셈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 600년 만의 자치의 귀환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인지도 모른다. 또한 그렇게 낙하산 자치도로 받은 것이기에 내가 어디까지 무엇을 챙겨야 할 것인지 모르는 일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고민이 깊지 않았다. 제주의 미래를 바꾸어줄 이 역사적 사건에 철학적 깊이를 더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고, 도민 모두 특별자치도가 무엇인지를 주체적으로 판단할 기회마저 그저 행정구조쯤 바뀌는 수준에서 그야말로 행정적 마인드로 처리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600년 만의 자치의 귀환에 대해 도민사회는 역사적, 문화적, 미래학적 백가쟁명식의 의미부여와 해석, 비전의 공론화가 이루어졌어야 했다. 즉, 몇몇 전문가와 행정조직을 넘어 좀 더 사회화되어야 했던 의제였다.

기실 특별자치도의 출범의 의미를 당시 위정자들이 좀 더 헤아렸다면, 자치도로 출범하는 섬의 이름은 당연히 제주 이전에 주변국들의 사서에 실릴 정도로 오랫동안 불려 온 ‘탐라특별자치도’로 출발하는 것이 마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특별자치도에 대한 담론은, 자치도를 시행하면 예산이 얼마나 더 들어 올까, 도지사의 권한과 도의회의 권한은 얼마나 커질까 등 지엽적인 데만 너무 몰입해 있었다. 자치도의 담론이 빈한했던 셈이다. 여담으로 제주섬 자치의 역사를 한번 훑어보자.


제주섬 자치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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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의 통일신라시대 사통팔달의 교역대상지들. 이러한 탐라의 자율적 교류와 교역의 전통은 고려조에 들어서도 보장받았다.
제주섬의 ‘자치의 역사’를 복기해보면, 독립국이었던 탐라국이 공식적으로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탐라는 공식적으로 고려 때인 1105년(숙종 10년) 고려의 지방행정체제의 1개 군으로 개편되면서 고려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는 현령관이 파견되기 시작한 1153년(의종 7년)간에 대외적인 탐라국의 국가체제가 사라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때까지도 탐라국의 왕제인 성주제는 상징적이나마 유지되었고, 토관들의 지방지배 역시 상대적으로 보장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제주 지역에 현령관이 파견된 이후부터는 현령관과 상보적인 협력 관계를 맺으며, 고려 정부의 제주 관할에 참여하게 된다. 이로써 제주섬은 당시 고려시대 다른 군현들 중 어느 지역보다도 자치성이 짙은 지방 행정 체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인 조선은 달랐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개국되고 개국을 둘러싼 피비린 권력투쟁은 1,2차 왕자의 난이 끝나고서야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 대단원의 주인공이 ‘이방원(李芳遠)’이다. 특히 그는 재상 중심의 정치를 추구하던 조선의 설계자이면서 제1개국공신인 정도전을 척살하고 왕실의 권위가 국가의 최우선이 되어야 함을 주창한 이가 아닌가? 그런 그에게 변방의 섬인 탐라에서 아직도 고대왕국 당시의 명칭인 성주․왕자 운운하는 것은 왕조 개창 초기인 만큼 반역적 행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며, 대의명분을 금과옥조로 삼는 개국 초기, 신지사대부들의 눈에는 탐라의 유풍(流風)은 그야말로 구태이며 구악으로 비쳤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왕실의 분위기는 제주의 지배세력들에게도 파다하게 전파되었을 것이며, 이에 전조와 다른 왕조의 속성을 알아차린 성주와 왕자세력은, 그가 조선 3대 국왕으로 등극한 이듬해인 1402년(태종 2년) 최종적으로 탐라국이라는 자치국의 상징마저 조선왕실에 손수 들어 바친다. 마지막 탐라성주 ‘고봉례(高鳳禮)’와 왕자 ‘문충세(文忠世)’가 왕조에 입조하여 “참람되이 분수에 맞지 않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으니 이를 개칭하여 줄 것”을 요청하며, 탐라의 국새에 해당하는 ‘인부(印符)’를 조선 조정에 반납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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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완성, 대동여지도. 탐라는 이제 제주로 완전히 고착되고 500여 년간 한반도의 변방으로 입지, 자치의 흔적은 사라지고 조선의 미개한 지역, 타율의 공간으로 남겨진다.

조선의 완성, 대동여지도. 탐라는 이제 제주로 완전히 고착되고 500여 년간 한반도의 변방으로 입지, 자치의 흔적은 사라지고 조선의 미개한 지역, 타율의 공간으로 남겨진다.

이로써 상징적 의미에서의 탐라국마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확실한 연대는 추정할 수 없지만, 적어도 사서에 등장하는 기원전 4세기 이전으로부터 계산한다면 1천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탐라국이 그 길고 긴 명줄을 놓은 것이다. 조선왕조는 이들의 충정(?)을 들어 전조인 고려왕조와는 달리 성주․왕자제를 혁파하고, 성주였던 고씨를 좌도지관((左都知管)에, 왕자였던 문씨를 우도지관(右都知管)에 임명해 토관직을 수여한다. 그러나 1445년(세종 27년), 도지관제마저 폐지하여 종전의 탐라-제주의 귀족층을 평민화함으로써 제주는 완전히 중앙집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제주섬의 자치전통이 완전한 멸절된 것이다.

그로부터 500년 동안 제주는 완전히 조선의 변방으로 편입된다. 소위 “말은 나면 제주로, 사람은 나면 서울로”라는 익숙한 제주도 비하의 격언으로 상징되는 변방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조선왕조 최고의 ‘원악유배지’, 목사 임지 기피 1호 지역, ‘출륙금지’할 정도로 살기 힘든 섬이 되었던 것이다. 애초에 바다 한가운데 붙박여 꼼짝달싹할 수 없었던 섬이라는 환경과 동아지중해의 중앙에 위치해 언제나 바람 잘 날 없던 섬의 운명은 ‘제주’라는 지명 유래에서처럼 조선의 입장에서는 ‘물 밖의 고을’이었다. 말이나 키우면 좋을.

해방공간, 잠시 맛본 자치의 기억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공간인 탐라 패망 550여 년 후, 이 섬에 자치가 부활한다. 바로 ‘제주도인민위원회’가 그것이다. 이 인민위원회는 1945년 해방과 동시에 몽양 여운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그 모태이다. 건준은 좌우가 망라된 전국조직이었다.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인 1945년 9월 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각 지역 ‘인민위원회’ 조직에 들어갔다. 1945년 8월 말경에는 전국에 145개소에 이르는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제주도의 경우도 각 면 단위의 조직이 먼저 결성되어, 1945년 8월 말 서귀면, 9월 6일~7일 대정면, 9월 8일 제주읍 등에서 조직을 완료했다.

9월 10일,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1읍 11개 면 건준 대의원 대표 4~6명씩 100여 명과 많은 도민이 참가한 가운데 제주농업학교 강당에서 결성됐다. 위원장은 1932년 ‘제주도 야체이카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오대진, 부위원장은 제주읍 건준위원장이었던 최남식이 선출되었고, 나머지 지도부들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사들이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에 따라 각 읍면에서도 9월 하순부터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인민위원회는 읍면 단위뿐만 아니라 각 리별로 조직되기도 했다.

하지만,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1945년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의 이름으로 한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미군정만이 존재한다고 발표함으로써, 해방직후 건국 사업에 나섰던 건준과 인민위원회 세력을 불법화하고 그해 겨울 강제적으로 해산한다. 당시 미군정의 관리로 근무했던 ‘리처드 로빈슨(Richard Robinson)’은 “‘인민위원회’나 ‘건준’을 인정하지 않고 해체시킨 것은 미군정의 매우 치명적인 실수였다.”라고 이야기했다.

‘제주도인민위원회’의 활동기간은 1945년 9월에서 1947년 3․1발포사건 이전까지의 기간으로, 이는 전국의 인민위원회가 불과 3,4개월 활동한 것에 비하면 경이적인 기록이다. ‘제주도인민위원회’가 유독 오래 탄탄하게 유지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제주도민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구성원들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했던 사람들로서 절반 이상이 옥살이를 했었고, 일제강점기로부터 벗어나 해방된 조선에서 충분한 내적 정당성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특히 인민위원회 위원장 등 핵심간부들은 1932년 세화리해녀항쟁과 연계된 제주 야체이카 사건에 관련해 투옥되었던 사람들로 제주도민들의 신뢰가 깊었다. 제주도민의 이 같은 신뢰뿐만 아니라, 타 지역의 인민위원회가 중앙위원회에 종속적이었던 데 반해, 제주도민의 이익을 위해서 자주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 독자성이 ‘제주도인민위원회’를 그토록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서 오랫동안 국무부 동북아지역 정세분석관으로 재직했던 ‘존 메릴(John Merril)’은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미군 점령 첫해에는 이 섬에 상주하던 미군정 중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미군정 중대는 이 섬을 관할하는 데 인민위원회를 이용했으며, 또한 이 단체에 ‘전심전력의 지원(wholehearted support)’도 아끼지 않았다. 이 놀라운 협력관계는 이 섬의 권력판도에 대한 군정중대의 현실주의적 인식이 바탕이 되어 이뤄진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제주도인민위원회는 광범위한 도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사실상 일본의 패망과 미군정의 정착 사이의 기간을 지배했던 사실상의 자치행정기구였다.

‘제주도인민위원회’의 특성은 다음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자치기구였다는 점, 둘째는 항일투쟁 경험자들이 주도했다는 점, 셋째는 온건한 정책을 추구했다는 점, 넷째는 미군정 중대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는 점, 다섯째는 존속기간이 전국에서 가장 길었다는 점, 여섯째는 중앙이나 전남 인민위 조직과도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어 독자성이 강했다는 점 등이다.(《제주4‧3사건진상규명보고서》)

그러나 1947년 3월 제주도의 군정장관, 제주도지사, 제주경찰감찰청장, 경찰고문관 등이 일거에 교체된다. 미군정은 해방된 국가의 자치와 평화로운 군정보다는, 당시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하는 동․서 냉전 시대를 대비한 동아시아 전략이 중요했다. 정국은 3․1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급격히 4․3사건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고, 해방 후 550년 만의 자치의 기회도 이념대립에 따른 강대국의 전략에 따라 다시 사라져 버리고 만다.

좌우익 이데올로기의 장막을 걷어 버리고 긴 역사과정에서의 자치의 기회를 놓고 볼 때, ‘제주도인민위원회’는 오래도록 중앙에 휘둘렸던 제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치의 경험이었다. 또한 그 기간 ‘제주도인민위원회’는 미군정에서도 인정할 만큼 성공적인 자치기구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었다. 갓 해방된 상태에서도 전국의 어느 지역보다도 제주도민들에게 자치의 역량이 충분히 있음을 보여주었던 역사적 경험이었다.

그리고 2006년 다시 제주섬에 자치의 기회가 돌아왔다. 해방공간으로부터 60여 년 만에 복귀한 자치의 기회다. 그리고 이번에는 ‘특별’이라는 수식어까지 달고 귀환했다. 조선 왕실에 온전히 상납했던 자치권이 조선의 패망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공간에 잠시 반짝거렸다가 ‘제주특별자치도’란 이름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자치도 쉽지 않다. 이름은 거창하게 ‘특별자치’라고 하지만, 그 ‘특별’이 제주도민을 위한 제주도민에 의한 제주도의 자치인지는 아직 그 정체가 정확치 않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자치를 내세우고 있으나, 여전히 자치권의 핵심적인 역량들은 중앙정부가 꽉 쥐고 놓아 줄 태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특별자치’란, 해방공간에 존재했던 미군정과 제주도민들의 동상이몽처럼, 이번엔 정부와 제주섬 주민들의 동상이몽의 게임일지도 모르겠다. 꼭 ‘국제자유도시’만을 위한 자치 말이다. 자치를 하라고 넘겨준 당사자였던 노 전 대통령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했다. 그가 바랐던 제주특별자치도는 어떤 자치도였을까? 

여전히 이행 중인 중앙권력의 지방이양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문제는 “누가 이를 완성할 책무를 질 것인가.”이다. 현재 진행형인 이 이행기에 특별자치도의 미래가 달려 있다. 언제나 그냥 돌아오는 떡고물은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고도의 자치권이 과연 제주도에서도 실현될 것인지는 결국 제주도민들의 선택과 노력에 달려 있다.


이번 선거는 특별자치도를 바로 세우기 위한 선거

“누구를 위한 특별자치도인가?” 글의 마지막에 던지는 가장 상식적이고 원초적인 질문이다. 언제나 정치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자치의 핵심은 지방의 주민들이다. 지방자치는 주민들의 주인의식과 주민들의 정체성에 기반한 주민정치의 실현이다. 자치란 주민들 스스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경영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준비되지 않은 자치는 자칫 지방토호들의 젯밥이 될 확률이 높다. 어쩌면 특별자치의 현 상태는 토착기득권자들과 제주의 자원을 활용하여 비즈니스를 펼칠 국내외 자본가들의 먹잇감이 된 지 오래되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다가 중국인 자본까지 융단폭격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치는 둘째 치고 자존도 힘들어지는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도민사회가 최근 느끼는 이 위기감과 혼란들은 바로 자치도의 진행 방향이 뭔가 빗나가고 있다는 예감에서 비롯된다. 즉, 도민을 위한 자치도인지, 아니면 특별자치도를 핑계로 한 제주의 자원수탈과 내부식민화를 위한 ‘특별’자치인지 하는 데서 오는 예감 말이다.

통시적으로 600여 년 만에 당도한, 가까이는 60여 년 만에 제주도민의 품으로 돌아온 ‘자치’의 꿈, 이번에는 제대로 세워야 할 때다. 국제자유도시를 위한 특별자치도 말고, 진짜 탐라자치도의 완성을 위해 이제 도민사회가 공론화하고, ‘자치도 바로 세우기’의 대업에 나서야 할 때다. 스스로 제주섬의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진정한 자치의 획득만이 변방으로서의 장구한 시간 동안 당해 온 피해의식의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자치의 ‘헌법적 지위’ 확보는 필수적인 일이다.

정치의 계절인 이 시기에 특별자치도 담론을 던지는 이유는, 이번 6․4선거에서 선출되는 도지사, 교육감, 도의원들이 바로 도민의 총의를 모으고, 제주섬 자치의 오랜 역사적 사명을 깨달으며, 이의 바로 세우기와 완성을 공동의 과제로 인식해, 함께 밀고 나가야 할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 특별자치도 의제는 피해 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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