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의 제주담론] (28)
2014 지방선거, ‘지속 가능한 섬’으로의 미래비전의 전환을 위해 ①

카산드라 콤플렉스와 미래의 운명

‘판글로스(Pangloss)’는 찬사를 받고 ‘카산드라(Casandra)’는 무시당하고 멸시받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트로이인들이 뒤늦게 깨달은 것은, 카산드라가 옳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녀의 예언을 존중했더라면 다가오는 역경에 대한 적절한 준비로, 잠깐 동안 무지로 느낄 수 있던 행복한 낙관주의 이후에 찾아온 참화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카산드라는 생물학, 생태학, 기후학과 여타 이론 및 응용 환경 과학 분야에서 고급 학위를 취득하고 있다. 출간된 많은 저서와 논문에서 이 과학자는, 만약 문명이 현재의 과정을 그대로 지속한다면 조만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재난이 우리나 가까운 우리 후손들에게 닥칠 거라고 경고하고 있다. 불만스런 대중과 그들이 선택한 정치 지도자들은 “그따위 소리는 집어치우시오!”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반면 “걱정 마세요, 괜찮을 겁니다.”라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낙관주의자들의 말은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낙관주의자들을 진정 신뢰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냉혹한 과학적 사실과 낙관주의자들 주장의 약점은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는다.’ - ‘어네스트 패트리지(Ernest Part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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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블린 드 모르간(Evelyn De Morgan)의 'Cassandra' .

‘카산드라(Cassandra)’는 호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비극의 여인으로 트로이의 공주다. 미래에 대한 예지력을 지닌 그녀는 아폴론의 미움을 사, 그녀의 예지력을 누구도 믿지 않게 되는 저주를 받는다. ‘트로이 목마’가 트로이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언을 해도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결국, 트로이는 그녀의 예언대로 멸망하고 만다.

‘판글로스(Pangloss)’는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인 볼테르(Voltaire)가 쓴 콩트인 《캉디드(Candide)》에 나오는 주인공 ‘캉디드’의 스승이다. 철인 판글로스는 현세가 존재 가능한 최선의 세상이라고 끝끝내 설파하는 극단적 낙관주의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변화를 바라지 않는 보수주의의 비조이기도 하다. 어쨌든 판글로스는 현재를 가장 최선의 상태로 인식하는 낙관주의자,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주의자의 표상이 되었다.

서두의 인용문은 세계적인 환경윤리학자인 ‘어네스트 패트리지(Ernest Partridge)’의 글이다. 그는 최근의 미래 환경위기의 전망과 관련하여, 전 세계 과학자들의 노력이 비극의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파국의 진실을 담고 있으나, 이러한 현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 대중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그들을 안심시키는 현대판 판글로스들의 세 치 혀에 의해 부정당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판 카산드라들의 절박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마지막 지속 가능한 지구 살리기의 마지막 기차표일 수도 있는 ‘교토의정서’를 허맹이 문서로 만들어 버리고, 지구생태의 ‘한계초과’ 상태에서도 여전히 성장의 장밋빛을 꿈꾸고 있으니 말이다.

필자를 비롯하여 보통사람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비관적인 전망들이 나올 때,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면 설령 귀가 솔깃해지더라도 너무도 무책임하게 “아직은 아닐 테지!”라며 판단을 유보하거나, “설마 그럴까?”라며 애써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내게 갈등을 일으키는 부정적인 정보를 접하게 되면 일단 부정하게 되는 것. 이런 행동양태를 ‘카산드라 콤플렉스(Cassandra Complex)’라고 한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좀(?) 장황한 이야기는 바로 이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 뻔하다. 그래도 시작해보자.

2004년 12월 26일, 진도 9.3의 해저 지진으로 인도양에 쓰나미가 발생한다. 쓰나미는 시속 800km의 속도로 동남아 해안을 덮쳤다. 이 쓰나미는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스리랑카,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소말리아에까지 피해를 입혔다. 전체 사망자만 23만 명에 달했으며 이는 인간이 기록한 최대 최악의 쓰나미 참사로 기록된다.

당시 쓰나미는 히로시마 원자 폭탄이 폭발한 것과 비슷한 위력을 보였으며, 전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쓰나미로 기록됐다. 파도의 높이는 10층 건물의 높이에 달했다. 당시 관광객들은 바로 등 뒤에 거대한 쓰나미 파도가 몰려오고 있음에도 전혀 모르다가 참변을 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스리랑카와 태국에서는 새떼, 코끼리와 원숭이떼가 해안에서 더 높은 지대로 이동하는 현상이 목격되기도 했다. 특히 코끼리들이 우리를 탈출하자 코끼리를 잡으러 갔던 사육사가 그 덕에 목숨을 건졌다고 언론에 보도된 일화는 유명하다.

해일은 해안에서 2마일이나 떨어진 스리랑카의 가장 큰 야생동물보호구역인 ‘얄라루후나국립공원(Yala Ruhuna National Park)’까지 덮쳤지만, 수백 마리의 야생코끼리와 표범 등은 단 한 마리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수마트라에 사는 원주민들은 이런 동물들의 변화를 보고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을 예감,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여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인도양 해안의 인간들 중 이들 수마트라 원주민들을 제외하고, 잠시 후 덮칠 거대한 쓰나미의 재난을 감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고 내다볼 것인가? 동물들은 지진 발생 당시의 P파를 감지, 재난을 예견하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능력이 없는 인간들은 수마트라 원주민 부족이 구름의 모양, 새떼와 동물들의 부산한 이동을 보면서 재난을 예견한 것처럼, 다양한 정보와 경험을 종합하여 미래를 판단하고 그에 대처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의 정보들을 수집하고 이를 귀담아 듣는 시간들을 유보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제주의 미래와 관련해서, 특히 제주미래의 지속 가능성에 관해 수마트라 원주민의 입장이 되어보자는 취지에서 던지는 성장에 관한 담론이다.

자본주의 욕망의 신기루 ‘두바이’

우리는 두바이열풍을 기억한다. 불과 5, 6년 전의 이야기다. 사막의 한가운데 피어난 유토피아 같은 도시건설의 프로젝트가 부국을 꿈꾸는 모든 나라들에게 하나의 대안처럼 이야기되던 때를 말이다.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던 MB는 “새만금을 한국의 두바이로 개발하겠다.”라며 큰소리를 치기도 했고, 전국의 지자체 단체장과 정치인들 그리고 기업인들은 두바이를 성지순례처럼 한 번쯤은 다녀와야 행세하던 시절이었다.

두바이의 현재진행형인 신화의 프로세스는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말 그대로 눈앞에서 사막 한가운데 신기루를 펼쳐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나 월드스타들의 입성은 웬만한 언론가십의 빈자리를 채우기에 더없이 좋은 기삿거리였다.

하지만, 2008년 세계자본주의의 심장인 미국 뉴욕의 월가에서 시작된 미국의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즉 미국의 ‘TOP 10’에 드는 초대형 모기지론 대부업체의 파산으로 인한 세계금융위기는 국제금융시장의 신용경색을 초래해 두바이를 강타한다. 두바이 정부의 국영기업인 ‘두바이 월드’는 모라토리엄(채무상환 유예)을 선언, 디폴트 상태까지 이른다. 대부분의 부동산 프로젝트는 중단되거나 공기를 수정해야만 했다.

물론 그 이후 UAE의 대통령이면서 아부다비의 통치자인 ‘칼리파 빈 자이드 알나하얀’이 긴급자금 100억 달러를 수혈하면서 국가부도사태는 모면했다. 두바이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820m의 세계최고층 빌딩이면서 두바이의 아이콘이자 랜드마크인 ‘버즈두바이’의 명칭을 ‘부르즈 칼리파’로 바꾼다. 어쨌든 그의 덕에 두바이는 다시 일어섰고 여전히 신기루는 건설 중이다.

사람·상품·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운(?) 특히 금융 허브와 중계무역 중심의 국제자유도시로서 말이다. 타국의 세법을 무장해제하는 Zero-Tax원칙으로 인해 소득세도 법인세도 없고 수입관세도 없는, 그야말로 다국적기업들의 ‘세금천국’인 국제도시의 위상으로 주변의 인도,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 레바논 등은 물론 멀리 CIS국가들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도 많은 무역상들이 몰려와 두바이에 둥지를 틀고 주변 국가를 대상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중계무역을 발달시키게 됐다.

수출입과정에서 발생하는 마진을 주 소득으로 하는 중계 무역상들에게 세금이 없다는 점은 엄청난 이점이기 때문이다. 물론 두바이는 금융위기에 휘청이던 상황과 두바이 건설과정에서 외국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등으로 더 이상 황금빛 벤치마킹과 경외의 대상은 아니다.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도 없고, 부채에 의존한 대규모 토목공사, 또한 Zero-Tax원칙은 아무 나라에서나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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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모의 사막에 세워진 신 바벨탑(?) ‘버즈두바이’와 신기루의 도시 두바이 전경. 두바이는 자본주의의 총아인 국제금융시장의 시스템 위에 존재하는 신기루다. 그것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바이의 고층빌딩군과 상상력을 압도하는 사막 위의 신기루 같은 미래계획에 환호하기만 했지, 왜 석유부국이 오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석유로 벌어들인 돈을 쏟아 부어 새로운 도시를 만들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사실 그들의 이러한 대역사는 석유시대 이후 만들어진 중동의 현대 속담에서 기인했다.

“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나는 롤스로이스를 타고, 내 아들은 제트기를 타고, 내 아들의 아들은 다시 낙타를 탈 것이다.”라는 이야기 말이다. 즉, 그것은 다시 낙타를 타는 시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수십 년간 추진해 온 장기지속의 대안이었던 것이다. 특히 두바이가 속한 중동지역은 역사적으로도 사막을 건넌 대상들의 도시가 있던, 고래로 중계무역이 번성했던 지역이다. 그들은 석유자본을 기반으로 다시 예전 그들의 전통산업을 복구한 셈이다.

물론 이러한 두바이의 미래비전이 과연 석유종말시대 이후 세계자본주의 금융시스템의 위기에도 지속 가능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프로젝트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문제다. 왜냐하면 두바이 모델은 세계자본주의의 안정성 위에서만 지속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에게는 두바이의 도시풍경은 결국 신기루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사막국가와 그 모든 피조물들은 신기루의 운명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말이다.

국제자유도시?

공교롭게도 두바이가 현재 이루어놓은 도시의 모습과 위상은 제주도가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은 국제자유도시 비전의 현현이다. 두바이의 모습은 소위 성장지상주의와 개발주의자들의 제주도 경제부흥와 지역개발의 궁극적 목표인 것이다.

제주는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 제정된 《제주도국제자유도시특별법》에 근거해 국제자유도시로 지정된 이후, 이의 실현을 지역의 장기적․주도적 발전방향으로 부여잡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기원에 있어서는 IMF로 상징되는 1998년 외환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외자유치에 대한 정책적 의도가 작동한 것이었으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세계화로 상징되는 2000년대 이후 세계적 추세인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맞춘 것이기도 하다.(양길현)

제주도는 제주국제자유도시를 선언하며, 국제자유도시의 청사진을 펼쳐보였다. 그것은 “사람·상품·자본의 국제적 이동과 기업 활동의 편의가 최대한 보장되도록 규제의 완화 및 국제적 기준이 적용되는 지역적 단위”로 만들겠다는 것이다.(《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 제2조) 즉, 이 법에 근거할 때, 제주도는 기업활동의 편의가 최대한 보장되는 도시가 궁극의 ‘도시’ 조성 목표다. 그 이후 이 조그만 섬은 도시가 되었다. 마치 대륙의 한가운데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인 국제적인 자유도시 말이다.

그런데 이 국제자유도시는 과연 현재까지도 유효한 전략적 목표인가? 제주도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인가? 이미 몇 년 전부터 제주지역의 시민단체들과 전문가들을 넘어서 일반시민들 사이에서도 이제 이 전망을 수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왜 그럴까? 왜 지난 14년 동안 일관되게 추진해 온 국제자유도시 조성의 비전을 이제 수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까?

이러한 문제의식의 기저에는 대부분 국제자유도시 계획의 실제적인 효과가 환경친화적이거나, 지역사회에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이익을 가져다주기보다는, 갈수록 위기로 치닫는 세계적 차원의 기후변화와 섬의 환경용량을 고려해 볼 때, 장기지속적인 비전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있다. 또한 관광객 1,000만 명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광의 ‘낙수효과’는 도민사회에 크지 않음(2013년 한국은행 제주본부는 연평균 성장률이나 1인당 명목 GRDP도 갑절 가까이 늘었으나, 관광산업의 지역경제 기여도가 크지 않다고 분석했다.

특히 관광산업 역외유출과 산업의 특성상 제조업보다 생산유발효과가 낮아 지역경제 성장에 대한 기여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평가했다.)이 드러났고, 실제 피부로도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최근 제주도정과 JDC의 성과로 치부되는 중국인 투자자들의 행보는 오히려 제주도민들에게 위기감까지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비전의 부적합성은 이제 오랜 기대심리의 유효기간이 임계점에 이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인증천국의 섬, 제주

제주도는 보물섬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가장 최근의 이야기다. 전근대시대에는 농업생산성이 부박한 척박한 땅이었고, 정치적으로도 원악유배지로서 변방의 섬이었으며, 문화적으로는 조선의 신유가적 문화 전통에서 낙후된 섬이었다. 하지만, 21세기 세계는 제주의 가치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가치는 무엇보다도 이 섬의 청정환경에서 비롯된다.

제주의 청정환경과 자연생태의 독특함은 세계적 차원의 각종 인증을 통해 제주도의 가치를 평가받은 인증천국의 섬으로 만들었다. ‘인증천국의 섬, 제주’. 과한 표현일까? 다른 지자체나 도시들은 하나도 따기 어려운 세계적 차원의 타이틀을 벌써 몇 개씩이나 보유하고 있으니 과한 표현도 아닐 듯싶다.

일단 우리 정부가 지정한 지위와 명칭이 다수 존재한다. ‘제주국제자유도시 지정(2002)’, ‘세계평화의 섬 지정(2005)’, ‘제주특별자치도 지정(2007)’이 그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제주도에만 부여한 특별한 지위와 명칭들이다. 

여기에 세계적 차원의 인증기관인 유네스코가 제주도에만 3개의 세계적 가치를 인정했다. ‘유네스코 제주도 생물권보전지역’ 지정(2002),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2007), ‘유네스코 제주도 세계지질공원’ 인증(2010). 이를 제주도에서는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이름으로 홍보하고 있다. 람사르(Ramsar)습지 지정, 여기에 더하여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세계 7대 자연경관의 섬, 제주’를 인증 받았다. 또한 2005년 세계보건기구(WHO)가 인증한 ‘건강도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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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플 크라운(?) 인증서들.

그리고 제주도는 현재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제1호 ‘세계환경수도’로 인증받기 위해 이 사업의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환경수도’는 국제적인 공신력·권위를 가진 국제기구·단체에서 일정한 평가·인증 기준에 따라 선정하는 도시로, 전 세계의 환경도시 중 모범이 되는 도시를 뜻한다. 이를 위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7대 자연경관 선정 때처럼 또다시 거도적으로 환경수도 인증획득운동을 벌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때만 되면 범도민적 역량을 모아야 하는 제주섬의 인증획득 게임

그런데 한쪽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한다. “이렇게 맨날 국제적인 인증만 따면 뭐하노?”라는 볼멘소리가 그것이다. 또 다른 소리도 들린다. “선보전 후개발이니 뭐니 하면서 알짜배기 땅들은 다 팔아먹고, 앞에서는 보전하면서 뒤에서는 곶자왈 깨부수는 판에 무슨 환경수도 이야기야?”라는.

정부가 인증(?)·지정한 제주국제자유도시는 지난 2000년 이후 14년이나 추진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도민들에게 뚜렷하게 공유되지 못하고 있다. 사람·상품·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운 기업의 섬을 만들겠다는 것이 도통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일이며, 과연 그런 섬의 비전이 제주섬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감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한 국제자유도시인가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면서 관광개발의 낙수효과는 우영팟의 감귤나무만큼 피부에 와 닿는 경제적 체감온도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또한 이는 2000년대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흐름에 편승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 제주섬의 주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신자유주의의 ‘테스트베드’로 활용하고자 한 혐의가 짙다는 말이다. 영리병원 논란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또한 ‘세계평화의 섬’이라고 했지만, 강정에 해군기지가 추진되면서 평화의 섬 비전을 한 번에 망가뜨리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라.”라는 오래된 성서의 가르침처럼, “무기를 들고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965년 교황 바오로 6세 20차 UN총회 연설 중)라는 말처럼, 군사기지와 평화는 양립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강력한 국방력이 평화를 가져온다.’라고 믿는 부류들이 있다고 해도, 어린아이들의 눈으로도 명쾌하게 보이는 것은 무력과 평화의 양립은 모순이라는 변치 않는 사실이다. 그런데 평화의 섬에 핵잠수함이, 핵추진 항공모함이, 이지스전투함들이 들락거리는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는 사실은 평화의 섬 비전을 일거에 무너뜨린, 무기가 평화를 가져온다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주도하는 국가주의의 폭력이다.

평화의 섬 비전은 이미 끝난 게임이 되어 버렸다. 비싼 강연료를 주면서 세계적인 명망성을 지닌 정치인들을 끌어다가 국제적인 평화포럼을 해보았자,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평화를 아시아의, 또는 우리의 가시권 내로 그리고 피부 가까이 끌어오기에는 너무도 무관하고 무의미한 이벤트가 되기 때문이다. 평화포럼은 이제 구차한 평화라는 명칭도 떼어버리고 제주포럼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물론 헤드카피로 “평화와 번영을 위한”이라는 문구는 남겨두었지만 말이다. 평화는 번영의 전제이자 그 자체이지만, 어쩌면 제주도에서의 평화담론은 구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제주특별자치도를 보자. 2006년 정식 출범한 지 햇수로 9년차를 맞았고, 이를 위해 행정계층구조 개편과 제도개선 그리고 중앙정부의 권한이 대폭 이양되었다지만, 사실 특별한 자치도로서 구현된 게 무엇인지 실체가 없다.

중앙정부의 권한 이양은 결국 제왕적 도지사를 출현시켰고, 기초단체가 사라진 자리에 어정쩡한 행정시가 자리 잡으면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구현도, 행정자치의 효율성도 다 놓쳐버린 상황에서 차라리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은 것은, 제주도의 특별자치도 실험이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군사, 외교부문만 빼고 고도의 자치권을 이양 받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기초단체가 존속되었을 때보다 지방재정의 전체적인 파이는 더욱 열악해졌고, 도지사에 이양된 권한들은 지역의 난개발과 제왕적 도지사의 출현을 목도하게 하였다.

그러면 범도민적인 역량을 몰아 선취한 세계적 차원의 지정․인증 결과는 무엇인가? ‘유네스코 제주도 생물권보전지역’ 지정(2002)의 경우, 제주도 내 생물권 보전지역을 3개 권역으로 나누어 보전·관리하는데, 핵심지역으로 한라산국립공원, 영천·효돈천 천연보호구역, 섶섬·문섬·범섬 천연보호구역을, 완충지역으로 한라산국립공원 인근 국유림 및 국립공원 북측 일부, 서귀포해양도립공원 일부를, 전이지역으로 도시계획구역을 제외한 해발고도 200~600m의 중산간 지역, 영천·효돈천 양측 500m 지역, 서귀포해양도립공원 및 효돈천 하구 앞 해상을 지정해 집중 관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강정에 해군기지 조성사업이 추진되면서 이 역시 무색해지고 말았다. 핵심적인 생물권보전지역 코앞에 핵잠수함이 오갈 수 있는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미 다 끝난 이야기 아닌가? 다음의 그림에서 보듯이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은 누더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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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중국자본이 들어오면서 개발붐이 이루어지는 곳들은 대부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의 권역 내부이다. <출처=MBC뉴스플러스 화면캡처>

국제자유도시브랜드 가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제주섬의 ‘환경보전’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제주도가 2007년 제31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Jeju Volcanic Island and Lava Tubes)’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제주도 세계지질공원’ 인증(2010), 이미 2002년 획득한 ‘유네스코 제주도 생물권보전지역’ 지정까지를 포함해 제주특별자치도는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이라는 이름으로 홍보하고 있다. 스포츠에서 쓰이는 이 용어가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세계유산 3관왕이라는 의미에서 제주섬의 청정자연을 관광용 패키지로 홍보하기에는 알맞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이면에는 여전히 곶자왈지대의 개발과 외자유치를 통한 대규모 개발사업을 통해 경제활성화를 일으키려는 반환경적인 정책이 지속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환경보존 시스템 구축에 나서면서 뒷문으로는 이를 해체하는 상호모순적인 정책이 지속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모순의 지속성은 기실 여전히 제주특별자치도가 ‘국제자유도시’의 비전, 즉, 두바이 모델을 포기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미 세계금융위기를 통해, 이러한 비전이 얼마나 허황될 수 있는지를 간파하지 못하는 미래비전에 대한 무지와 오류가 공존한 결과이기도 하다.

세계적 인증을 받은 또 다른 사례가 있는데, 그것은 2005년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받은 ‘건강도시’ 인증이다. 인증 10년이 지났지만, 도민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인증 사실 자체가 희석되어버린 경우다. 인증 당시에는 건강도시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거창한 계획을 발표했으나, 지난 10년 동안 전담부서 하나 설치되지 못한 채 후속조처는 나 몰라라 한 셈이다. 결국 누구도 모른 인증사례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제주특별자치도는 ‘세계환경수도 지정’을 또 다른 목표로 설정하고 나섰다. 이미 따온 것도 제대로 지키거나 추진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인증만 자꾸 따오면 뭐하나.”라는 질책의 소리가 나올 수밖에.

이러한 세계적 차원의 인증들이나 국가에서 부여한 특별한 지위들이 별 무소용인 것은, 사실 사람·자본·상품의 이동이 자유로운 기업하기 좋은 도시로의 지향과는 상충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두바이처럼 국제금융의 허브가 되지 못한 결국 ‘땅장사자유도시’가 될 뿐임을 우리는 최근 목도하고 있다.

그런 자유도시에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은 불필요한 규제에 불과해진다. 또한 섬의 환경총량을 생각하면, 대규모 개발사업을 끌어들일 수 없다. 1,000만 관광객을 넘어서서 2,000만을 불러들이기 위해선 탄소발자국 이론 같은 것은 무시하고 넘어가야 한다. 공공의료시스템을 붕괴시키는 의료민영화의 첨병지가 되기 위해서는 건강도시 인증 같은 것은 거추장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의 무한증식이 가능한 섬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국제적 인증 따위는 투자유치의 매력도를 증진시키는, 제주섬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딱 그만한 수준에서 멈추면 좋을 일인 것이다. 국제자유도시를 위해서는 이곳이 상품가치가 있음을 홍보하기 위한 인증의 수준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환경수도’ 지정사업의 추진도 이를 통해 제주도의 모든 반생태환경적인 것을 새롭게 탈바꿈시키기 위한 계기로 삼고, 정녕 제주를 지속 가능한 세계환경수도로 만들어 가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라기보다는 관광객 증대와 부동산산업의 매력도를 높이기 위한 브랜드전략의 하나로 접근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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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그러나 이러한 국제자유도시의 비전은 불행하게도 지속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우리들에게 도래할 미래의 시간들은 이제 그러한 방식으로는 지속될 수 없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장과 개발, 값싼 석유문명에 기반한 속도와 소비의 시대가 저물고 있기 때문이다. / 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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