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의 제주신화 이야기] (80) 노일저대구일의딸 원형 2

욕망의 화신 

노일저대구일의딸은 미성숙하고 자신만 아는 딸아이의 원형이다.
세상의 서러움과 기쁨을 경험하지 못한 채 자기 욕심만 내세우는 딸아이 같다. ‘이것 하나 못 해주냐,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는 말에 한없이 초라해지는 어머니의 서글픔을 모르는 철없는 아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온갖 방법을 동원하며 얻어내었던 이 원형은 자신을 희생하거나 양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어린애다.  

이 원형은 천진난만하고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 솔직함, 생기발랄함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심술꾸러기들에게서 느끼는 귀여움은 이 원형의 것이기도 하다. 톡톡 튀는 행동으로 끊임없이 주변을 긴장시키는 힘은 이 원형들을 주목하게 한다. 이리 흘러가고 저리 흘러가며 타협만 해 온 사람,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늘 눈치만 보아온 사람들은 노일저대 원형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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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니케 시스타드 야콥센 감독(노르웨이. 2011).<너무 밝히는 소녀 알마>. (스틸사진/2012 제13회 제주여성영화제 상영작. 제주여성영화제 제공). 명랑 엉뚱 소녀 알마의 욕망을 그린 코믹 영화.

노일저대구일의딸 원형은 사리사욕이 많은 여성들의 원형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무심하며, 자신 때문에 생긴 불행일지라도 헤아리지 못한다. 힐끔 눈과, 과장된 손사래로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상황은 간단하고도 재빠르게 거부한다. 
누구에게나 욕심은 있고, 그것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만 야비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려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 가능성이 많다는 점은 비극적이다. 상대방을 조롱하고 파괴하며 결국은 자신도 파괴하고 말테니.

이 여성은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가진 경우가 많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진전되면 한없이 부드럽고 친절하다가도 조금이라도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신경질을 내고 싸움을 건다.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는 것,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은 것들에 시간을 내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타인을 중상하거나 모함하기도 하고 짜증을 잘 내며 흥분하기 쉽다. 그래서 욕을 먹기도 하고 수모를 당하기도 하지만 별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에 집중하는 추진력과 인내는 놀랄 만하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심드렁함 역시 놀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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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문화예술재단의 2013제주설화프로젝트 중 문전신화의 여산부인과 노일저대구일의딸을 닥종이로 만들었다.(프로젝트 참가자 홍인화 선생님 작품/ 2013.12.9./애월읍 봉성리 새별작은도서관)

기성 체제에 대한 저항  

노일저대구일의딸 원형만큼 자신의 인생에 매순간 자신에게 충족감을 가지는 원형은 없다. 동시에 그만큼 상대에게 치명적인 원형도 없다. 이런 극단적인 단절은 사회의 인식방법에 대한 단절, 지금껏 유지되어 왔었던 질서에 대한 거부와 단절을 의미한다.

노일저대구일의딸 원형은 ‘나는 나이고, 세계의 중심‘이라 외치는 새로운 세대와 그 성향들이다.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이랄 수 있는 이것은 아직 '질서'라는 이름을 얻지 못했다. 안정, 조직 화합은 이미 권력을 획득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기성세대가 장악하고 있는 이 현실에서 새로운 세대들은 ’버릇없다‘ ’종 잡을 수 없이 자기 멋대로 다‘ ’어처구니 없다‘ ’사회의 질서도 안 지키는 웃긴 놈들이다‘는 핀잔만 듣기 일쑤다. 그러나 이런 비난과 억압은 자유민주주의의 우리가 늘 추구했던 ’질서‘라는 것이 각각의 개성, 정체성을 찾아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도록 요구하는 질서였고, 다른 계층을 도외시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써의 질서였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도외시되고 억압받아 왔던 것은 가난하고 힘없고 경험과 학식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제3세계 국가만이 아니다. 여성만이 아니다. 어린이도, 그리고 이 새로운 세대들도 도외시 되어 왔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이런 노일저대구일의딸 원형에 강렬한 유혹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지금껏 배우고 따라 왔던 믿음과 가치들, 기성세대들이 격식 있는 말투로 대대손손 앞세워 온 믿음과 가치들이 위선과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국 알아차린,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이기도 하다. 기성세대의, 양보와 배려, 화합과 단결의 캠페인 뒤에 숨어 있는, 부정不正의 욕망의 속살을 보고난 후의 저항 말이다.

새로운 세대들의 일탈과 저항은 당연히 예정되어 있다.
‘안정’과 거의 동의어에 가까운 ‘질서’는, 사실은 ‘관행’이기도 하다. 변화된 사회와 새로운 관계의 출현에도 여전히 체제의 관행을 좇는 것은 뿌리 깊은 비민주적 요소다. 그래서 이들의 저항은 무분별한 것으로 치부되기보다는 ‘온전한 질서’가 무엇인지를, 개체성을 존중하는 바로 그것임을 그들은, 그들의 특성처럼, 주저함 없이 하품나지 않게 보여주고 있다.

신세대의 이미지 ‘네 멋대로 해라’는 사실 기성세대들이 ‘그들 멋대로 견고한 질서로 구축하며 살아왔던 것’에 대한  저항일 것이다. 이들은 기성세대들이 스스로 가장 잘하고 있다고 자긍심을 가지는 ‘선과 악의 구분’에 별 관심이 없다. 다만 ‘자신에게 좋은 가 나쁜 가’ ‘행복한 가 아닌 가’에 관심을 두고 선택과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세상을 좀 더 나은(?) 쪽으로 이끄는 데 별로 기여를 하지 않는 듯 보이는 새로운 이 세대는, 오히려 믿음직스럽기도 하다. 기득권들이 얘기했던 ‘더 나은 세상’이란 건 바로 그들이 지도한 세상이고 그들이 계속 선점하고자 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없는 욕망으로 친하게 지내는 친구를 헐뜯고, 조금만 틀어지면 아무에게든 함부로 하고, 이기적인 무심함으로 가까운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쌍말로 사랑하고, 날씬한 것들 예쁜 것들은 모두 없어져라 악담하고, 나만 아니면 돼, 저 된장녀 쩍벌남은 세상에서 아웃시키고 말거야, 가난해서 왕따 부자여서 왕따, 말을 잘해도 왕따 못해도 왕따 …. 모두가 모두를 왕따 시키는 최악의 조합으로, 그 빛나는 새로움이 어두운 질곡으로 빠지기 쉽다는 것은 그들의 이름에 반하는 치명적인 결점이다. (계속/ 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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