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5일 유럽중앙은행이 중대한 결정을 했다. 대출금리는 0.25%에서 0.15%로 더 낮추고 예금금리는 더 이상 낮출 수가 없어 마이너스 0.1%로 정했다. 즉, 법정지불준비금을 초과해 자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하면 연 0.1%의 이자를 거꾸로 물어야 한다. 이와 병행해 4000억유로(약 5400억달러)의 장기저리 대출을 은행들에게 풀기로 했다. 2011년 12월 및 2012년 3월 두번에 걸친 장기저리대출 1조유로에 이어 세번째의 대형 장기저리대출이다.

마이너스 금리는 작년부터 미루어오던 어려운 결정이었다. 뒷걸음질치고 있던 유럽 경제 성장률이 금년 1분기에 겨우 플러스로 돌아섰지만 독일의 0.8% 성장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마이너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뻔했다.

그나마 독일마저도 성장 잠재력이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통독 이후 11%까지 올랐던 실업률이 5.2%로 낮아진 것은 좋은 일이지만 노동예비군이 줄어들면서 한 나라의 잠재성장률이 낮아진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OECD에 의하면 인구통계학적 요인으로 독일의 잠재성장률은 연 1%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유럽의 침체상을 보여주는 것이 인플레이션율이다. 금년에 0.7%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유럽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유럽중앙은행의 타깃 2%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서 이번의 결정을 재촉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미국에 이어 유럽도 세계경제를 인플레이셔니즘(inflationism)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있다.

한때 미국의 중앙은행, 연방준비이사회(연준)가 양적완화의 테이퍼링(채권매입 규모의 단계적 축소)을 발표해 국제자본 및 외환시장에 혼선을 가져오기도 했다.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은 연준이 사주지 않으면 미국의 장기금리가 상승하고 신흥국에 몰렸던 국제자본도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예측했으나 이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마이너스 예금금리 결정한 유럽중앙은행

연준은 사들이는 금액만 줄었을 뿐 여전히 막대한 양의 채권을 지속적으로 사들였다. 연준 홈페이지에 의하면 연준 보유 미국 국채와 주택 모기지 증권(MBS)은 6월 5일 현재 4조260억달러로 전년 말에 비해 3200억달러, 최근 한달 만에 440억달러 증가한 것이다. 그리스의 연간 총생산이 2400억달러인 것과 비교하면 그 크기가 가늠이 된다.

거기에 가세해 기관투자가들도 달러의 단기 금리가 한동안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단기차입 장기운용하는 만기 미스매치(maturity mismatch) 방법을 사용해 땅짚고 헤엄치기로 장기 채권 매수 세력에 가담했다. 당연히 가격은 오르고 금리(yield)는 떨어진다.

만기 미스매치는 금리인상에 따른 리스크가 너무 커서 여간해서는 사용 안하는 자금운용 방법이지만 지금과 같이 연준이 금리의 인상 시점을 확실히 가르쳐주는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가 존재하는 한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물가안정'이라는 말의 의미가 변하고 있다. 물가가 너무 오르지 않게 하는 것은 옛 이야기고 물가가 안 오르는 것을 악으로 보는 시대에 세계경제는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연준은 미국의 실업률이 당초 목표로 내걸었던 6%에 접근하려 하자 이제는 인플레이션 타깃 2%의 달성이 아직 멀었음을 초저금리를 유지하는 명분으로 붙들고 있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낮음을 구실로 돈을 더 풀어 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 그렇게 해 서민들의 장바구니를 넘어 부동산과 채권과 주식 가격들을 포함해 모든 물가를 끌어올리려는 정책 수단이 바로 인플레이셔니즘이다.

너도 나도 매수(買收)

돈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의 혜택은 채무자들이 본다. 미국의 경우 그것은 미국정부 자신이고 유럽의 경우는 부채 비율이 높은 정부와 기업과 가계들이다.

재정위기 때문에 가려져 있던 유럽의 가계부채 문제가 최근 새로운 불안의 요인으로 대두하고 있다. 2006년 미국의 가계부채는 미국 GDP의 128%로 정점을 기록했는데 지금 유럽연합 27개국 중에 15개 나라의 가계부채비율이 매우 위험한 160% 선을 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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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미국은 서브프라임 사태를 겪으면서 크게 혼이 났는데 유럽은 불발탄을 깔고 앉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금리와 인플레이션 촉진, 그리고 대출장려 정책에 몰두하고 있다.

저금리는 약(藥)이지만 부채가 늘어나는 것은 독(毒)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미국과 유럽의 금융 당국이 이러한 극약 처방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문득 두려워진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 이 글은 <내일신문> 6월 11일자 '김국주의 글로벌경제' 에 실린 내용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제주의소리>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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