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나눔 릴레이] (14) 윤용택 제주대 교수의 ‘생명평화의 섬 제주를 꿈꾸며’

참가와 동시에 참가비의 일부가 자동 기부되는 ‘아름다운제주국제마라톤대회’, 어려운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연탄나눔’을 통해 지역사회에 기부와 나눔의 홀씨를 퍼뜨려온 [제주의소리]가 한국의 대표 사회적기업 ‘아름다운 가게’ 신제주점(매니저 김정민)과 새로운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제주지역 명사(名士)는 물론 나눔행렬에 동참한 일반 시민들이 각자 사연이 깃든 소중한 물건을 기증하는 ‘아름다운 나눔릴레이’이다. 이 소중하고 특별한 물건의 판매 수익금은 제주여성장애인상담소를 통해 출산·육아 비용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장애인 산모들에게 전달된다. [제주의소리]는 기증품에 얽힌 사연을 통해 나눔과 공유의 가치를 확산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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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용택 제주대 교수. ⓒ제주의소리

늦둥이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 홀로 힘겹게 그를 키웠다. 그는 유년시절이 남들보다 뭐든지 ‘늦됐다’고 얘기한다. 재수 시절 아놀드 토인비의 ‘미래를 산다’를 읽고 인간을 탐구하겠다는 맘으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게 됐다.

하지만 집 형편은 여전히 어렵고 어머니 건강도 좋지 않았다. 때문에 휴학한 뒤 고향에 잠시 내려왔다 대학을 포기하기로 맘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너는 공부해야 할 놈이니 당장 서울로 올라가라’는 친구의 맹렬한 충고를 듣고 동네 아주머니에게 차비 3만원을 빌려 옷가지 몇 개를 챙기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학비 낼 돈이 없어 리어카를 끌고다니며 생선장사를 해야만 했고 입주과외도 해야만 했다.

1980년대, 교정이 얼음판이었던 시절. 그의 선후배들, 같은 대학 학생들은 유인물을 뿌리다 체포돼 군대에 끌려가기도 했고, 시위를 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끝내 학교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많았고 강제징집 되었다가 목숨을 잃은 이도 있었다. 그 때의 부채의식은 그가 최근 시민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유가 됐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했다. 본인 스스로 돌아보기에도 ‘최선을 다하면 살아온 4년’이었다. 교수들의 인정을 받아 대학원에도 진학했고, 현재는 국립대 철학과 교수로까지 삶을 이어오게 됐다. 바로 윤용택 제주대 교수에 대한 얘기다.

윤 교수는 아름다운가게에서 기증 릴레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선뜻 자신의 책들을 책으로 기증했다. 그가 편찬위원으로 참가한 ‘철학사전’을 비롯해, ‘인과와 자유’, ‘제주와 오키나와’, ‘생명평화의 섬 제주를 꿈꾸며’ 등이다. 또 더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 이성권 작가로부터 선물받은 붉은사철란 사진도 함께 내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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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교수가 기증한 그의 저서들. ⓒ제주의소리

“‘일강정은 살아있다’ 만든 이유? 꽃과 바위들이 ‘나도 찍어줘’하고 부탁하더라”

- 적극적으로 시민사회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대학 때) 같은 과에 우리 친구들 스무 명이 입학했지만 10명도 제대로 졸업을 못했다. 그러다보니 부채의식이 있다. 같은 과만이 아니고 후배들, 선배들, 훌륭하신 분들이 공부를 계속 못하고 학교를 떠났어야 했는데... 그래도 이제 학교에 계속 남아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 내가 소위 말하는 대학교수라면 나름대로 역할이 있을텐데 당연히 해야한다고 본다.”

- 굉장히 힘든 청소년기, 대학시절을 보냈다고 들었다.

“힘든거라고 하는게... 절망의 끝은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절망하고 있다고 하는 건 그래도 뭔가 건덕지가 있으니까 절망하는 거 아닌가. 절망할 곳에 있다면 더 이상은 올라갈 곳밖에 없다. 이보다 더 힘들 수밖에 없으니.

많이 힘들었지 않냐 하는데 저는 힘들지 않았다. 저는 그 대학생활을 즐겼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진짜 빡셌던 것 같고 그 때 4년 내지 대학원까지 해서 10년간 그야말로 밀도 있게 살지 않았나 생각한다. 만약 펼친다면 엄청난 양이 된다는 거다. 공부로 치나 경험으로 치나.

어머니 같은 경우는 대학이라는 걸 잘 모르시는 분인데 옛날분이라. 다른 애들은 4년이면 졸업하는데 너는 10년이 되도 졸업을 못하냐고 하셨다. 졸업 못하는 걸 못 보고, 박사학위 받는 걸 못 보고 돌아가셨다.

또 좋았던 친구들, 좋아했던 사람들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참 둘도 없는 친구들이 떠나는 걸 보면서 참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그래서 저는 이제 살아가는 게 사는 게 보너스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마땅히 뭔가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한 게 많다. 이 만큼 노력했는데 왜 그만큼 주어지지 않냐 하고, 주변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던가 친구가 죽거나 하면 ‘왜 나야’라고 하지만 반대로 ‘나도’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참 존재하면서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 대학공부를 중간에 포기하려 했던 일도 있었다. 여러 가지로 여의치 않았을텐데 힘들지 않았다고 하니 신기하다.

“누군가 ‘대학 다니면서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저는 그랬다. 언젠가는 이게 끝날 생활이라는 거다. 대학이라고 하는 거 길어야 4년 아닌가. 4년이 지나면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대학 다니면서 대학원 다닌다는 생각은 못했다. 우스개 소리로 처음에 대학 갔을 때는 대학원이라는 걸 모르고 갔다. 얼마나 웃겼냐하면 박사, 석사라는 제도를 박사는 공부 잘하는 애, 석사는 공부 그 다음으로 잘 하는 졸업생에 주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사실 대학원 가려는 것도 전혀 생각을 못했다. 생각을 할 수도 없었고 내 처지에 대학원에 간다는 건... 대학만 졸업해도 큰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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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용택 제주대 교수. ⓒ제주의소리

- 대학시절, 4년간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대학생활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졸업할 때는 오라는 데 없어도 갈 곳은 많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때는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정해졌기 때문에 직업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공무원을 할 수도 있고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전혀 직업의 귀천이 없고. 청소부를 한다고 하더라도 행복한 청소부가 될 수 있을 거 같았다. 오늘을 열심히 산 사람은 내일이 두렵지 않다. 대학 4년 열심히 사니 대학 졸업 후에 뭘 할까 걱정이 안되더라.

이것의 연장선인거 같다. 난 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세상을 열심히 재밌게 살면 그 다음 지옥이 있던 뭐가 있던 상관 안할거다. 지옥에 간다면 가지. 그래서 나에겐 늘 현재에 충실하는 게 중요하다. 내일을 걱정하는 것 보다 더... 내일을 걱정하기 보다는 현재를 꽉 채우는 삶을 사는 게 좋은 거 같다.”

- 2005년부터 제주환경운동연합 의장을 맡아왔다. 강정문제로 가장 첨예한 시기에 대표를 맡은 셈이다.

“환경연합에 관심을 가졌던 게 제가 환경철학을 가르치니까, 이론적인 것뿐만 아니라 현장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이론과 실천이 접목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당시 의장이 네 명이나 되고, 부담이 없을 거라는 얘기를 듣고 했는데... 막상 저 혼자 밖에 남은 사람이 없었다.

그 때 강정문제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때다. 환경단체의 어떤 대표다 보니 또 범대위 차원에서 상임대표들이 꾸려지다보니 강정에 갔던 거다. 또 가게 되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되는게 제 성격이고. 그렇게 된 거다.

그래서 6년 했는데, 이렇게 오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왜냐면 다들 안하겠다고 하니까. 해군기지 문제가 특히 너무 첨예하게 되던 상황에서 누구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오랫동안 했던 거다. 힘들다기보다는 보람이 있고 많은 걸 배우고 얻고 또 좋은 사람 만나고 그랬던 거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 본인이 직접 찍은 5000여장의 사진을 하나의 영상으로 묶은 ‘일강정이 살아있다’는 영상이 유명하다. 강정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해군기지가 지어지자마자 찍기 시작했다.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강정 구럼비를 찾아가서 돌맹이 하나까지도 다 찍으려고 했다. 언젠가는 강정 바다의 옛 모습을 그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 제가 처음부터 이걸 만들려고 했던 건 아니다. 다만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가 계속 부르는 거 같아서 강정에 갔다.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는 어머니를 찾아뵙는 심정으로 갔다. 저는 사진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

가서 참 낯선 경험들을 했다. 돌들이, 파도가, 또 꽃들이 ‘나도 찍어줘’하고 부탁을 하는거다. ‘나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어’, 바위들도 ‘내가 여기 내가 있었다는 것조차 아무도 모를거야. 하지만 넌 알고 있잖아. 넌 찍고 알려줘 내가 살아있는 걸’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거다.

그러다보니 3000~4000장이 쌓였다. 저는 그때 당시 50년 후에 내가 죽은 다음에 강정이 이랬었다는 걸 좀 역사적인 자료로 남겨놓고 싶었는데 사진들이 자꾸 얘기를 하는 거다. ‘이렇게 컴퓨터 안에 파일로 저장해놓으려고 나를 찍었냐. 내가 이렇게 있다는 걸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달라’고 얘길하는 거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끔 지인에게 부탁해 슬라이드 영상으로 만들었다.”

- 제주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윤 교수가 바라는 제주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어떤 모습인가?

“생명평화의 섬 제주를 꿈꾼다. 제주도가 이제 죽음의 섬이 아니고 삶의 섬이 되야 한다. 이미 4.3의 아픔이 많이 있지 않나. 생명을 얘기하는 것이다. 생명평화는 하나의 명분이다. 또 생태는 살아가는 삶의 어떤 실질적인 조건일수도 있다. 그래서 제주가 생태적인 섬이 돼서 세계인의 고향으로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모든 나라가 인류평화를 영구히 보장하는 비무장평화지대 하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곳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마음의 고향으로 찾아갈 것이다. 늘 제주가 그런 곳이어야 한다고 얘기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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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교수가 기증한 이성권 작가의 사진.

[편집자 주] 윤 교수의 기증품은 아름다운가게 신제주점(064-749-0038)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각별한 사연이 깃든 소중한 물건, 남다른 의미를 가진 귀한 소장품을 이웃과 나누고 싶은 분들은 아름다운가게 신제주점이나 제주의소리(064-711-7021)로 연락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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